저는 성적으로 학대받고 매 맞으며 친족에 강간당하고 괴롭힘당한 여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의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고 대중에게 신상이 공개되고 일자리와 경력을 잃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했고요.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많은 여자는 그 무엇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어떤 의미인지 가해자가 정확히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여자들은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 미래를 꿈 꿀 수 있기 위해서 그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온전한 인간이자 실재하는 인간임을 가해자가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가한 폭력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기를요. 그들은 가해자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가해자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거쳐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 P303

사과란 대체 무엇일까요? 사과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오만을 버리는 일입니다. 죄를 시인하는 일입니다. 항복입니다. 평형추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교감입니다.
사과는 망각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망각은 편리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분노를 삽니다. 이 망각이 국가와 우리의 가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과는 폭력의 서사를 존속시키는 거짓, 부정, 근거 없는 믿음, 망상을 걷어 치웁니다. 사과는 기억하는 일이며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 P305

제 아버지는 어느 책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남자는 남자들의 적이라고 배웠습니다. 한 명이 자기 잘못을 인정해 버리고 나면 모든 서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고요. - P306

우리는 평생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나와 상관있든 아니든 진실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우리 신경 체계 안에 있는 정지 신호와 같아서 이것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거짓은 차마 부정할 수 없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끈덕지게 남아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의합니다. 거짓은 암세포처럼 시스템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 P307

사과는 방법인 동시에 실천입니다. 진정한 사과는 그 행위만으로도 변화와 해방의 가능성을 가져옵니다. 진정한 사과를 행하고 수용할 때 모든 공격과 원한, 증오, 악의, 고통이 용해되어 우리 신체와 정신과 심리 전체에 연금술적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진실한 용서일 테지요. 엠마 골드만 Emma Goldman이 말했듯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 P310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트럼프 정부는 이라크, 시리아, 이란,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예멘, 이슬람 7개국에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을 가장 미국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국적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땅과 안전한 피난처를 기꺼이 제공하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다운 정신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을 지배하는 기업과 인종 차별주의자, 부자들이 이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 미국이 입국을 막은 대부분의 국가는 우리가 제국주의적 간섭을 통해 이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이를 생각하면 상처 위에 모욕까지 더하는 형국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있다. 이중 추방, 반이상적 추방이다. 추방에 추방을 더하는 격이다. - P324

우리 몸의 어떤 점 때문에 당신이 우리 몸을 침범하고 결정하고 통제하고 입법하고 폭력을 저지르고 우리 의지에 반하는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마도 당신들은 우리의 관대함을 나약함으로, 우리의 인내심을 수동성으로, 우리의 예민함을 여림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해요.
그래서 당신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는 사실을요. 우리는 이 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 P338

자유와 선택할 권리가 주는 달콤함을 한 번이라도 맛보았다면, 내 몸을 진정 소유해 보았다면, 진실로 해방되어 내 몸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았다면, 내 몸의 주체가 되어 내 모든 구멍에서 솟구치는 그 생명력을 느껴보았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해도요. - P339

우리는 당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피임과 평등한 결혼과 시민권, 투표권, 그 밖의 무수한 것을 빼앗으려는 사악한 계획의 시작일 뿐이겠지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미래를 막기 위한 당신들의 필사적인 노력이요. 과거를 올바르게 알고 반성하는 미래, 비판적 인종 이론과 백인 우월주의, 성 차별주의, 트랜스포비아에 관해 진실을 가르치는 미래와 지구를 염려하고 공기, 물, 숲, 동물, 모든 생명체를 지키는 데 삶을 헌신하는 미래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몸과 자궁, 젠더를 결정하는 미래, 원하면 결혼하고 원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으며, 아이를 원하면 아이를 갖고 원하지 않으면 갖지 않는 미래, 이 모든 미래를 막기 위해. 당신의 그 모든 거짓과 술수, 기만적인 책략에도 당신들은 우리를 멈추지 못해요. 그냥 사실이 그래요. 당신들이 우리의 분노와 연대와 단합을 불러일으켰어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기나긴 세월 동안 싸워온 모든 것이 위태로운 때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나는 내 몸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 모든 자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몸을 바칠 거예요. 그리고 나는 알고 있어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주, 아주 많다는 것을요. - P340

우리의 낙원에 신화적이며 기업 친화적인 아버지와 군대는 필요하지 않음을 이브는 알았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일상을 지배한 뒤 재물을 약탈해 부를 쌓았고 우리에게는 얌전히 기다리라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백마 탄 왕자가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주기를, 눈부시게 빛나는 구름 속에서 낙원이 내려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브는 알고 있었어요. 왜냐면 낙원은 줄곧 여기에 있었으니까요. 누군가가 낙원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브는 이미 존재하는 낙원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눈과 능력과 열망이 필요함을 알았던 거예요. 낙원은 계층이나 경쟁, 지배, 탐욕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연대와 공조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낙원은 이 땅에 태초부터 있었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인간이 꿈꾸는 것 그 이상을 줄 수 있습니다. - P349

오드리 로드 Audre Lorde는 《에로틱의 용도 The Uses of the Erotic》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비합리적 지식에서 솟아오르는 그 힘을 줄곧 신뢰하지 못했다. 남성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쩐지 그것에 반감을 갖도록 평생 경고받아 왔다. 그들의 세상은 여성이 남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느끼는 것을 인정하나, 그 정도 깊이의 감정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기들 안에서는 그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못하고 있다. 물론, 권한을 지닌 여성들은 위험하다. - P352

이브는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기억을 소환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녀는 우리 어머니의 몸 안에 있으며 우리는 그 기억을 소환하기 바로 직전에 있지요.
기억을 어떻게 소환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 회상과 이미지, 감각을 방해할까요? 우선, 우리는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열매를 베어 물어야 합니다. 열매는 우리에게 비전과 상상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열매를 먹는 일 은 현존하는 권력이 설계해 영속시키는 이야기와 신화들을 들여다보고 우리 스스로 다시 배우는 일입니다. 의례와 시, 시간, 교류, 식물 의학을 다시 가져오고,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배우고, 신비를 쓰다듬고, 춤을 추고, 성교하고, 우리의 지식을 신뢰하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 P353

우리는 지금 가부장제로 오염된 자본주의자들의 황폐한 정원에 갇혀 기업이라는 아버지 신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진짜 염려하기라도 한다는 듯이요. 성찰도 깨달음도 없이 나른한, 자기들끼리 낙원이라 부르는 이곳이 마치 진짜이기라도 한 것처럼요. 유혹적인 소비지상주의와 전체주의적 감시, 기업이 소유한 미디어, 공허하기만 한 셀러브리티 문화, 인터넷 관음증과 괴롭힘으로 뒤범벅된 이곳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착각한 채로 말이에요. 이브는 이것들이 신기루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진짜 정원, 태초의 정원을 갈구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가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이 땅에 자기 질서와 폭력, 징벌을 심기 이전의 정원을 원한 거예요. - P358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iwin은 이렇게 멋진 글을 남겼어요.

그가 니그로의 지배적인 힘에서 풀려날 유일한 방법은 합의, 바로 흑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기만의 고독한 권력의 정점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장벽을 쌓고 애석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어두운 밤이 되면 남몰래 찾아오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 고통으로 가득 찬, 춤추는 나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P3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그 모든 퇴보 중 가장 심각한 사안이다. 아이들은 교육을 받고 나면 자기 권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다. 직업을 갖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여자아이들은 그 즉시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는 존재로 전락해 이른 결혼을 강요받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런 상황은 여성 할례에도 적잖은 영향을 초래한다. 딸이 교육을 받고 나면 생계비를 벌어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딸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는 아버지들도 간혹 있다. 그런데 교육 기회가 사라져 버리면 전통에 따라 지참금을 받기 위해 딸을 파는 아버지들이 늘어난다. 케냐의 여성할례반대협회 Anti-Female Genital Mutilation Board 의장 아그네스 파레이요Agnes Pareiyo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19는 우리 학교를 닫게 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여 자아이를 교육하는 일은 할례를 막을 수 있어요. 슬프게도 현실은 그 반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 P184

코로나19를 계기로 여성 문제에 관한 한 우리가 모순된 두 가지 관념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삶의 모든 측면에 있어 인간 종족의 생존을 위해 여성이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은 학대받고 지워지고 희생되기 대단히 쉽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중성으로 인해 가부장제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감염병이 훤히 드러냈다. 우리 인간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이 모순을 치유해 온전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 P187

가장 먼저, 대중이 가부장제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종말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교육과 포럼 등을 통해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러 형태의 압제로 이어지는지도 공부해야 한다. 예술은 우리를 치유해 주고 트라우마와 슬픔, 분노, 공격성, 비애를 달래주며 온전한 우리를 되찾게 도와준다. 의도적인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과거를 언급하지 않으려는 우리 문화가 불행과 잘못을 반복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와 종교인들이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경청과 공감을 위해 섬세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대중 포럼과 사적 장소 모두에서 배상과 사과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과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1986년, 페미니스트 작가 거다 러너 Gerdia Lerer는 이렇게 썼다. "역사적 구조 안에서 태동한 가부장제는 종국에 끝을 맞이할 것이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여성과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가부장제가 군국주의, 인종 차별주의, 계급주의와 결탁해온 이 끈질긴 관계가 지구 생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 P188

위기가 닥쳐올 때 여성과 소녀들을 착취하고 지배하고 학대하는 대신 그들을 중심에 두고 존중하고 가르치고 기꺼이 지원해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보살펴 주는 세상을 만든다면 과연 이 땅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 P190

트라우마로 얼룩진 기억을 낭포로 종양으로 혹으로 덩어리로 짊어진 여자들의 몸. 그것들은 악이 흔적을 남긴 곳에서 자라난다. 언제나 봉사하고 먹이고 씻기고 안고 돌보고 다른 이들을 살찌우는, 그러나 자기 몸을 돌볼 여력은 한시도 없는 여자들의 몸.
‘완전함‘ 또는 ‘불완전함‘ 때문에 혐오받는 여자들의 몸. 너무 말라서, 너무 뚱뚱해서, 너무 풍만해서, 너무 밋밋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느끼게 해서 혐오받는 여자들의 몸. - P194

우리의 애도를 표하는 제복이 아니라면 군대란 무엇일까?
우리의 슬픔을 조준하는 무기가 아니라면, 우리 슬픔과 닮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조준한 무기가 아니라면 드론과 자동 소총, 폭탄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가장 깊은 상실과 갈망을 보여주는 천박한 공연이 아니라면 포르노그래피는 무엇이란 말인가? - P216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유명 액션 댄서인 엘리자베스 스트렙Elizabeth Streb은 말한다 "추락 Falling?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없다. 다른 어떤 점보다 추락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완전히. 추락은 당신이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다. 미래는 마침내 ‘지금‘이 순간이 된다. 추락할 때 할 수 있는 것은 추락뿐. 계획, 아이디어, 숙련된 기술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 아무것도." - P227

우리는 안마하고 어루만지고 진정시키고 간지럼 태운다. 우리는 눈물과 들썩거리는 몸으로 상실과 애도를 표현하고 작고 소박한 손길로 우리의 분노를 치유한다. 우리 몸에는 미묘한 차별부터 심각한 공격까지 상처가 가득 쌓여 있다. 우리는 애도로 마음을 추스르는 법을 알고 분노가 우리 몸을 옥죈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가 우리를 그토록 안정시키고 평안하게 하며 확신을 주는 특별한 포옹에 능숙하다. 포옹은 우리가 여기 존재함을 알게 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와 의미와 가치, 실체를 느끼는 방식이자 우리의 사랑, 공감, 염려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 P273

킹스턴, 뉴욕, 2016년
이 글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9개월 전 〈가디언〉에 쓴 글이다.
[…]
그는 가부장제의 현현이며 오로지 아버지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입된 신념이다. 이 나라와 지구에 대한 결정권을 쥔 남자들이 우리 모두를 거의 끝장내고 있음에도.
그는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환상, 단절된 가상현실, 리얼리티 TV쇼의 산물이다. 그는 기업의 후원을 받는 대중 매체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들은 ‘중립‘을 표방하는 척하며 인종차별주의자, 독재자, 파시스트, 혐오꾼 등이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지원해 재산을 불린다.
그는 미쳐 날뛴다고밖에 할 수 없는 폭력 문화와 나날이 심각해지는 불친절, 잔인함에 무뎌지게하는 괴롭힘, 산업화되는 징벌, 자국민을 향해 선포하는 끝없는 전쟁 따위를 내버려 둔 결과다.
그는 자국민을 먹이고 교육하기보다 제국주의 군대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정부,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보다 지구를 파괴하는 정부, 사람들을 향한 폭력을 종식시키기보다는 그 땅을 약탈하는 데 혈안이 된 정부, 경찰들이 의미 있는 임무가 아닌 국민과 맞서 싸우게 하는 정부, 이 모두를 합한 정부다. - P2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평등에 분노하고 공감하며 울부짖는다. 상처입어 아픈 사람들을 끌어안아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어쩌면 영영 몰랐을 ‘그들의 아픔’을 나 또한 공감할 수 밖에 없어 끝내 슬퍼하며 울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 보여. 안 보인다고. 안경을 썼는데도 보이지가 않아. 도무지 보이지 않아. 깨어날 수 없어, 눈구멍을 열 수가 없다고.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깨어나. 이미 무언가 달라진 내 안의 그것, 이미 사라져 버린 그것을 다시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계속해서 그것을 깨워 보려고, 눈을 뜨게 해 보려고. 눈은 바로 거기 있어. 이 병실 안에 눈이 있다고. 여기는 진짜 병실이고. 눈은 몸 안에, 침대 위에, 병실 안에 있다고. 난 눈을 뜨고 싶은데. 내 눈은 더는 그런 것이 아니야. 눈이 아니지. 눈아, 나는 네가 보이는데. 볼 수가 없네. - P83

청중을 보고 싶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보이나요? 안 보여요? 이렇게 와주다니 정말 친절하시네요. 알파벳을 원해. A, B, C, D,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낱말도 보고 싶어. 케적 그리고 석회석, 또, 라이스 푸딩, 매시 포테이토, <왈가닥 루시>, 제임스 조이스 Jane Joyce, 펜타마민pentamamine, 급수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것들을 원하고, 짜증이 날 만큼 시끄러운 새들, 아일랜드의 비, 아일랜드 모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초록빛이 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테리!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널 만지고 싶어, 겨울이면 거칠어지는 네 살결을 느끼고 싶어, 내 친구들을 보고 싶어, 깨어 나고 싶어. 깨어나고 싶어. 정말이지 깨고 싶어······. (그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 폴, 계속 헤엄쳐 나아가렴. 앞으로 곧장. 그래, 계속 나아가렴. - P85

어머니는 내게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은 주셨지만 평온함 같은 것은 주지 않으셨어. 그래서인가봐, 신비와 익명성, 연기와 진심, 경외와 사랑 사이에서 나는 늘 길을 잃고 말아. - P87

모정 결핍mother hunger은 병이 아니라 부상이라고들 한다. 상처. 가장 중심부에 난 구멍. 어머니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게 젖을 물려줄 어머니의 가슴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담배 연기를 마셨다. 나는 그가 내게 하는 짓을 막아줄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공범이 되었다.
나는 출생과 동시에 실종되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사라진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단어는 내게 숲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여는, 어머니의 암호를 해독하는 빵 조각들. - P93

그리고 물론 술과 마약은 내 몸에서, 고통의 근원에서 나를 멀리멀리 데려가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나 자신에게서도 떨어뜨려 놓았다. 그만둬, 싫어, 너는 누구지, 나는 정말 원하지 않아, 부탁이야 그만해 같은 말 들로부터도. 동의와 선택권들로부터도. 내 몸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물건이 되어버렸다. 다치고 슬픈 것, 두들겨 맞고 후려쳐지고 유린당하고 빼앗기고 강간당한 그런 것. 내 몸뚱어리는 공공재산이 되었다. 그의 사유물이던 것이 이제는 그들의 사유물이 되었다. - P116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믿는다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당신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이 겪어온 일을 제대로 마주하고 진실을 따르겠다는 뜻이겠지요. 전 세계 여성 인구 3분의 1이 성폭행을 당했거나 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면 당신들 중에서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를 믿는 일은 당신이 겪었던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에도 손을 내미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일은 때때로 견딜 수 없이 괴로워요. 저 또한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고 저의 가해자, 아버지를 끊어내기까지 수년이 걸렸기에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껏 전전긍긍하며 쌓아 올린 내 안락한 인생이 순식간에 전복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드러내야 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거짓 속에 사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저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P121

수많은 저널리스트가 이미 이 여자들의 인생을 헤집어 놓고 떠났다. 여자들은 침략당하고 빼앗기고 속은 기분이 되었다. 난민 직원들이 나를 캠프에 머물게 해 주고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때로는 내게 관심을 주었다는 사실은 영광이자 특권이었다. 나는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었으며 나 스스로를 치유자이자 문제 해결사로 여겼다. 이 미친 현실과 잔인함 그리고 상실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 절실한 통제 욕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분석적이고 해석적이며 심지어 이 전쟁 통의 잔학함 속에서 예술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 욕구는 나의 무능에서 기인했다.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있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듣지도, 느끼지도, 이 진창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지도 못하는 무능. - P134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더 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 P137

이곳의 페미사이드는 서구가 콩고에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구리, 주석, 금, 아이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콜탄 같은 광물과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말이다.
여자들은 유린당하고 가족과 공동체는 무너진다.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이자 광산 관리자인 민병대를 피해 달아난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얽혀 만든 죽음의 교차로가 이제는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 - P141

나는 판지 병원에서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여자들이 길게 줄지어 선다. 인터뷰를 하러 오는 여자들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멍하고 무감각하며 죽은 사람 같다. 여자들을 만나면서 나 는 그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았다. 바로 잊히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 기울이기만해도 그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 P150

누가 여성들을 강간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가? 어쩌면, 누가 강간하지 않는가가 더 나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범인은 인터라므웨 Interahamwe 후투족 Hutu 민병들, 콩고 군인들, 무장 민간단체, 유엔 평화유지군이다. 무퀘게 의사 그리고 나와 함께 시티 오브 조이 the City of Joy (생존자들의 피난처이자 리더십 혁신 센터)를 설립하고 9년째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판지 병원과 콩고 여성들의 열렬한 후원자인 크리스틴 슐러 데쉬베Christine Schuler Deschryver 가 말한다. "그들 모두가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어요. 마치 국가 대항전처럼요. 여자들에게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든 적이에요. 이것은 경제 전쟁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콜탄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광물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 P157

무퀘게는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 형제인 헤르만에 따르면 그는 피해 여성들을 돌보는 데 자기 삶을 온전히 바치느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그의 에너지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피로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폭력 그리고 잔학 행위를 마주하는 삶에 어쩔 수 없이 드리워지는, 그의 잠을 방해하는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강간하는 일은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자기 삶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동물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들은 교미할 때 대단히 다정합니다. 인간인 남자들은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 P159

나는 고릴라 보호구역에서 파수꾼으로 일하는 한 남자를 인터뷰한다. 적군인 민병대가 공원 내 보호구역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마을 지휘관들에게 가 고릴라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승낙했다. 그러나 내가 왜 여자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지 않는지 묻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P160

"세계 온갖 단체에서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는 말을 잇는다. "그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눈물 흘리지만, 도와주겠다고 다시 오는 사람은 없어요. 카빌라 대통령 조차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영부인이 오기는 했어요. 그녀도 눈물은 흘렸지만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았고요." 무퀘게는 병원을 떠난 여자들이 최소한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가 아무리 환자들을 꿰매어 붙여 놓는다 해도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또다시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실제로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다시 온 여자들도 있었고요." - P161

나는 이 같은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 그동안 자료, 거리두기, 열정, 호소, 절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시대에 걸맞은 언어가 있기는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부장제에 기반한 우리 제도는 이런 현실을 바꿀 실효성 있는 개입을 하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엔 같은 기구조차 평화유지군 스스로 강간범이 되어 문제를 확대시켰다. - P171

이는 또 나를 사랑으로,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금세기의 실패는 사랑의 실패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무엇이 우리, 그러니까 이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까?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신자유주 의적인 사랑은 아닐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이타적인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사랑. 여성과 인류를 향한 온갖 혐오스러운 범죄에 무감각해진 우리를 일깨워 결코 멈추지 않는 공동의 저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 신비를 추앙하고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사랑. 경쟁보다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 난민들을 향해 벽을 쌓고 최루 가스를 던지고 우리 해변에 떠다니는 그들의 시체를 치우는 대신 그들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사랑. 너무도 강렬히 타올라 우리의 죽은 내면에까지 스미는, 우리의 담을 허물고, 우리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사랑이 필요하다. - P174

감금, 경제적 불안,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록다운의 조건은 학대가 발생하기에 완벽했다. 2021년에 자신의 부인, 여자친구, 아이들을 통제하고 괴롭히고 때리는 일에 열성이며 그럴 권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그 어떤 정부도 록다운을 계획하며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경을 거스르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 P178

미국에서는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20년 11월까지 여성 오백만 명 이상이 직업을 잃었다. 여성들이 하는 일의 상당수는 식당, 상점, 보육, 의료 서비스 현장처럼 대중과 신체 접촉을 요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여성들은 종종 최전방을 지키는, 그러므로 상당히 큰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 역할을 떠맡아 야 했다. 병원 근로자 77퍼센트, 학교 직원 74퍼센트가 여성이다. 게다가 극도로 제한된 보육 선택권으로 여성들은 그러한 일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다. 유자녀 이성애자 아버지라면 같은 문제를 겪지 않는다. 흑인 여성과 라틴계 여성 실업률은 바이러스 확산 이전에도 높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백하건대, 나는 ‘불행으로 인한 술꾼‘이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니까 우리 현에서 많이 보이던 그 구제불능의 술꾼 말이다. 내 주변에는 두서넛의 구제불능의 술꾼 말고는 이웃사촌 조차 없었는데, 주정뱅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이 딸꾹질과 한숨 소리로 채워졌다. 혼자 있는 편이 차라리 더 견딜 만했다. - P37

남편 분은 늘 장난을 칩니다, 백작 부인.
실비오가 그녀에게 대답했소.
한번은 장난삼아 제 따귀를 치더니, 여기 이 모자엔 장난삼아 총알 자국을 냈고, 지금도 장난삼아 저를 비껴 쏘았습니다. 이쯤 되니 저도 장난을 치고 싶어집니다만... 이 말을 하면서 그는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려고 했지요... 그녀의 눈앞에서 말입니다! 마샤는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어나요. 마샤, 부끄럽지도 않소!
나는 격분해 소리쳤지요. 이 양반아. 가엾은 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쏠 건가 말 건가?
쏘지 않겠네.
실비오가 대답했소.
나는 만족하오. 당신이 당황하고 겁먹는 모습을 본 걸로 만족해. 당신이 나를 쏘게 만들었으니 이걸로 되었소. 나를 기억할 테지. 당신의 양심에 당신을 맡기겠소. - P48

준비는 끝났다. 삼십 분 후면 마샤는 부모님 집과 자기 방, 고요한 처녀 시절의 삶을 뒤로 남긴 채 떠난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 전체가 조용해졌고 모두 잠이 들었다. - P58

교훈적인 경구는 우리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마땅한 근거를 생각해내지 못할 때 놀라울 정도로 유익한 법이다. - P68

마리야 가브릴로브나는 그에게 각별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생각에 잠기는 평소 모습 대신 생기가 돌았다. 마샤가 그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시인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P72

"댁의 장사는 어떻습니까?" 아드리얀이 물었다.
"허, 그게 참" 슐츠가 대답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고 해두겠습니다. 물론 제가 파는 물건은 선생님의 것과 다르지만 말입니다. 산 사람은 장화 없이도 산다지만 죽은 사람은 관 없이는 살지 못하잖습니까."
"딱 맞는 말이군요." 아드리얀이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산 사람이야 장화 살 돈이 없으면 맨발로 다닐 테니 댁이 화가 날 일은 없지요. 그런데 죽은 거지는 공짜로 관을 가져간다오." - P89

"날 모르겠나, 프로호로프?" 해골이 말했다.
"퇴역 근위 중사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을 기억 못하나? 1799년 자네가 처음으로 관을 판 사람 말일세. 게다가 그때 소나무 관을 참나무 관이라고 속였잖나?" 이렇게 말하면서 망자는 그를 포옹하려고 뼈만 남은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아드리얀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해골을 밀어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의 해골은 휘청거리다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망자들 사이에서 분노와 불평이 일었다. 모두들 동료의 명예를 위해 들고 일어나서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아드리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고함 소리 에 귀가 먹먹해지고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에 처한 가엾은 집주인은 넋을 잃고 퇴역 근위 중사 쿠릴킨의 뼈 무더기 위로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 P99

지금에 와서는 이도 저도 다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계급순‘이라는 모두에게 편리한 법칙 대신, 가령 ‘세상은 지혜순‘과 같은 다른 법칙을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별의별 꼴같잖은 말다툼이 벌어질 게 뻔하지! 게다가 하인들은 어떤 분부터 먼저 음식 접시를 날라야 하겠는가? - P109

나는 초라하지만 말끔히 정돈된 그의 거처를 장식하고 있는 여러 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돌아온 탕자에 관한 그림이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실내모와 실내복을 입은 덕망 있는 노인이 들떠 있는 청년을 배웅하고 있었는데, 청년은 부친이 주는 축복의 말과 돈 꾸러미를 급하게 챙기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에는 젊은이의 방탕한 행동이 생생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거짓 친구들과 수치를 모르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다음 그림에는 돈을 탕진한 청년이 돼지치기가 되어 삼각 모자와 누더기를 걸친 채 돼지 밥을 같이 먹고 있었는데, 얼굴에 깊은 수심과 후회가 가득했다. 종국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똑같은 실내모에 실내복을 입은 선량한 노인이 아들을 마중하러 뛰어간다. 탕아는 무릎을 꿇고 있다. 저 멀리 요리사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있고 장남은 하인에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이유를 묻는다. 그림에 어울리는 독일어 시구가 밑에 적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모조리 다 읽었다. - P110

겉모습만 보고 던진 농담 몇 마디가 그들의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성격의 특징‘ 즉 ‘개성(individualite)‘ 같은 것 말이다. 장 폴(독일 낭만주의 작가로 본명은 프리드리히 리히터)은 이것이 없다면 인간 존재의 위대함 또한 없다고 말했다. 수도의 여인들은 어쩌면 최상의 교육을 받았겠지만, 사교계의 관습이 곧 그들의 개성을 말끔히 다림질하며 마치 모자처럼 그들의 영혼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말로 타인을 재단하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어느 고대의 주석가가 썼듯이 Nota nostra manet(우리의 주석은 유효하다)인 것이다. - P141

리자는 조용히 농노 아가씨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나스챠에게 귓속말로 미스 잭슨에게 전할 말을 일러두고는 뒷문으로 나가 텃밭을 가로질러 들판으로 뛰어갔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환하게 밝았고 황금빛 구름 행렬은 마치 군주의 알현을 대기 중인 신하들처럼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 신선한 아침 공기, 이슬방울, 한 줄기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가 리자의 마음에 어린애다운 명랑한 기운을 가득 불어넣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그녀의 행보는 걷는다기보다 날아가는 듯 보였다. 아버지 영지 경계에 있는 숲 가까이 이르렀을 때, 리자는 소리를 더 죽여가며 걸었다. 그녀는 여기서 알렉세이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는데 왜 그런지는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우리들의 철부지 장난에 수반되기 마련인 두려움이야말로 그 장난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한 것을. - P148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제복을 입은 무롬스키 집안의 하인 둘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 계단을 올랐다. 뒤이어 말을 타고 도착한 그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식사가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이웃 지주를 대접했고, 식사 전에 정원과 사육장을 구경하자면서 정성껏 쓸고 닦아 모래로 덮은 오솔길로 안내했다.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속으로 이다지도 쓸모없는 취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생각 했지만 예의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구두쇠 지주의 불만에도, 허영기 많은 영국광의 열의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숱하게 접한 집주인의 딸이 등장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비록 그의 마음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미 꽉 차 있었지만, 젊은 미녀는 언제나 그의 상상력을 자극할 권리를 가진 법.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