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여. 안 보인다고. 안경을 썼는데도 보이지가 않아. 도무지 보이지 않아. 깨어날 수 없어, 눈구멍을 열 수가 없다고.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깨어나. 이미 무언가 달라진 내 안의 그것, 이미 사라져 버린 그것을 다시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계속해서 그것을 깨워 보려고, 눈을 뜨게 해 보려고. 눈은 바로 거기 있어. 이 병실 안에 눈이 있다고. 여기는 진짜 병실이고. 눈은 몸 안에, 침대 위에, 병실 안에 있다고. 난 눈을 뜨고 싶은데. 내 눈은 더는 그런 것이 아니야. 눈이 아니지. 눈아, 나는 네가 보이는데. 볼 수가 없네. - P83
청중을 보고 싶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보이나요? 안 보여요? 이렇게 와주다니 정말 친절하시네요. 알파벳을 원해. A, B, C, D,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낱말도 보고 싶어. 케적 그리고 석회석, 또, 라이스 푸딩, 매시 포테이토, <왈가닥 루시>, 제임스 조이스 Jane Joyce, 펜타마민pentamamine, 급수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것들을 원하고, 짜증이 날 만큼 시끄러운 새들, 아일랜드의 비, 아일랜드 모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초록빛이 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테리!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널 만지고 싶어, 겨울이면 거칠어지는 네 살결을 느끼고 싶어, 내 친구들을 보고 싶어, 깨어 나고 싶어. 깨어나고 싶어. 정말이지 깨고 싶어······. (그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 폴, 계속 헤엄쳐 나아가렴. 앞으로 곧장. 그래, 계속 나아가렴. - P85
어머니는 내게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은 주셨지만 평온함 같은 것은 주지 않으셨어. 그래서인가봐, 신비와 익명성, 연기와 진심, 경외와 사랑 사이에서 나는 늘 길을 잃고 말아. - P87
모정 결핍mother hunger은 병이 아니라 부상이라고들 한다. 상처. 가장 중심부에 난 구멍. 어머니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게 젖을 물려줄 어머니의 가슴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담배 연기를 마셨다. 나는 그가 내게 하는 짓을 막아줄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공범이 되었다. 나는 출생과 동시에 실종되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사라진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단어는 내게 숲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여는, 어머니의 암호를 해독하는 빵 조각들. - P93
그리고 물론 술과 마약은 내 몸에서, 고통의 근원에서 나를 멀리멀리 데려가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나 자신에게서도 떨어뜨려 놓았다. 그만둬, 싫어, 너는 누구지, 나는 정말 원하지 않아, 부탁이야 그만해 같은 말 들로부터도. 동의와 선택권들로부터도. 내 몸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물건이 되어버렸다. 다치고 슬픈 것, 두들겨 맞고 후려쳐지고 유린당하고 빼앗기고 강간당한 그런 것. 내 몸뚱어리는 공공재산이 되었다. 그의 사유물이던 것이 이제는 그들의 사유물이 되었다. - P116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믿는다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당신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이 겪어온 일을 제대로 마주하고 진실을 따르겠다는 뜻이겠지요. 전 세계 여성 인구 3분의 1이 성폭행을 당했거나 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면 당신들 중에서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를 믿는 일은 당신이 겪었던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에도 손을 내미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일은 때때로 견딜 수 없이 괴로워요. 저 또한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고 저의 가해자, 아버지를 끊어내기까지 수년이 걸렸기에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껏 전전긍긍하며 쌓아 올린 내 안락한 인생이 순식간에 전복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드러내야 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거짓 속에 사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저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P121
수많은 저널리스트가 이미 이 여자들의 인생을 헤집어 놓고 떠났다. 여자들은 침략당하고 빼앗기고 속은 기분이 되었다. 난민 직원들이 나를 캠프에 머물게 해 주고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때로는 내게 관심을 주었다는 사실은 영광이자 특권이었다. 나는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었으며 나 스스로를 치유자이자 문제 해결사로 여겼다. 이 미친 현실과 잔인함 그리고 상실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 절실한 통제 욕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분석적이고 해석적이며 심지어 이 전쟁 통의 잔학함 속에서 예술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 욕구는 나의 무능에서 기인했다.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있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듣지도, 느끼지도, 이 진창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지도 못하는 무능. - P134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더 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 P137
이곳의 페미사이드는 서구가 콩고에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구리, 주석, 금, 아이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콜탄 같은 광물과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말이다. 여자들은 유린당하고 가족과 공동체는 무너진다.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이자 광산 관리자인 민병대를 피해 달아난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얽혀 만든 죽음의 교차로가 이제는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 - P141
나는 판지 병원에서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여자들이 길게 줄지어 선다. 인터뷰를 하러 오는 여자들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멍하고 무감각하며 죽은 사람 같다. 여자들을 만나면서 나 는 그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았다. 바로 잊히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 기울이기만해도 그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 P150
누가 여성들을 강간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가? 어쩌면, 누가 강간하지 않는가가 더 나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범인은 인터라므웨 Interahamwe 후투족 Hutu 민병들, 콩고 군인들, 무장 민간단체, 유엔 평화유지군이다. 무퀘게 의사 그리고 나와 함께 시티 오브 조이 the City of Joy (생존자들의 피난처이자 리더십 혁신 센터)를 설립하고 9년째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판지 병원과 콩고 여성들의 열렬한 후원자인 크리스틴 슐러 데쉬베Christine Schuler Deschryver 가 말한다. "그들 모두가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어요. 마치 국가 대항전처럼요. 여자들에게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든 적이에요. 이것은 경제 전쟁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콜탄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광물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 P157
무퀘게는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 형제인 헤르만에 따르면 그는 피해 여성들을 돌보는 데 자기 삶을 온전히 바치느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그의 에너지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피로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폭력 그리고 잔학 행위를 마주하는 삶에 어쩔 수 없이 드리워지는, 그의 잠을 방해하는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강간하는 일은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자기 삶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동물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들은 교미할 때 대단히 다정합니다. 인간인 남자들은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 P159
나는 고릴라 보호구역에서 파수꾼으로 일하는 한 남자를 인터뷰한다. 적군인 민병대가 공원 내 보호구역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마을 지휘관들에게 가 고릴라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승낙했다. 그러나 내가 왜 여자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지 않는지 묻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P160
"세계 온갖 단체에서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는 말을 잇는다. "그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눈물 흘리지만, 도와주겠다고 다시 오는 사람은 없어요. 카빌라 대통령 조차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영부인이 오기는 했어요. 그녀도 눈물은 흘렸지만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았고요." 무퀘게는 병원을 떠난 여자들이 최소한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가 아무리 환자들을 꿰매어 붙여 놓는다 해도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또다시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실제로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다시 온 여자들도 있었고요." - P161
나는 이 같은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 그동안 자료, 거리두기, 열정, 호소, 절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시대에 걸맞은 언어가 있기는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부장제에 기반한 우리 제도는 이런 현실을 바꿀 실효성 있는 개입을 하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엔 같은 기구조차 평화유지군 스스로 강간범이 되어 문제를 확대시켰다. - P171
이는 또 나를 사랑으로,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금세기의 실패는 사랑의 실패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무엇이 우리, 그러니까 이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까?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신자유주 의적인 사랑은 아닐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이타적인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사랑. 여성과 인류를 향한 온갖 혐오스러운 범죄에 무감각해진 우리를 일깨워 결코 멈추지 않는 공동의 저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 신비를 추앙하고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사랑. 경쟁보다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 난민들을 향해 벽을 쌓고 최루 가스를 던지고 우리 해변에 떠다니는 그들의 시체를 치우는 대신 그들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사랑. 너무도 강렬히 타올라 우리의 죽은 내면에까지 스미는, 우리의 담을 허물고, 우리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사랑이 필요하다. - P174
감금, 경제적 불안,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록다운의 조건은 학대가 발생하기에 완벽했다. 2021년에 자신의 부인, 여자친구, 아이들을 통제하고 괴롭히고 때리는 일에 열성이며 그럴 권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그 어떤 정부도 록다운을 계획하며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경을 거스르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 P178
미국에서는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20년 11월까지 여성 오백만 명 이상이 직업을 잃었다. 여성들이 하는 일의 상당수는 식당, 상점, 보육, 의료 서비스 현장처럼 대중과 신체 접촉을 요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여성들은 종종 최전방을 지키는, 그러므로 상당히 큰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 역할을 떠맡아 야 했다. 병원 근로자 77퍼센트, 학교 직원 74퍼센트가 여성이다. 게다가 극도로 제한된 보육 선택권으로 여성들은 그러한 일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다. 유자녀 이성애자 아버지라면 같은 문제를 겪지 않는다. 흑인 여성과 라틴계 여성 실업률은 바이러스 확산 이전에도 높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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