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모를 무거운 침묵이 지속되자, 나는 혹시 출발 전 돈을 깎은 일로 어르신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100밧이면 우리 돈으로 대략 3300원. 이곳의 생활 물가를 감안해도 적은 금액이기에 도리어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돈이 아닌 기분을 홍정한 셈인데, 그 돈이 왠지 모를 이 싸한 침묵을 감수해야 할 만큼 내게 꼭 필요 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깎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미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싶기도 하고. - P11

처음부터 500밧을 약속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택시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어쩌면 어르신은 오늘 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립서비스를 한답시고 자꾸 말을 걸어왔을 것이고,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졸음이 약간은 가시지 않았을까. - P14

하지만 잠시 후 캐리어를 꺼내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어르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야 말로 오만의 소산이구나 싶어서 면구스러워진다. 나무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한 구부정한 자세는 어르신의 고단함이라는 게 고작 몇 푼으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견고하고 육중한 철옹성 같은 피곤이다.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피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문득 공허감이 나를 덮쳤다, 마치 지루함이 공허함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일지 몰랐으니, 왜냐하면 가만히 앉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을 바라 보듯 앞쪽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텅 빈 무(無)의 세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내 앞에 있는 건 숲이다, 그저 숲일 뿐이다. - P8

이제 나는 사람을 찾기만 하면 됐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최대한 빨리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왔을까, 이처럼 깊은 숲속에서 정말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었다, 깊은 숲속에 차가 처박혀 꼼짝달싹 못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움의 손길을 찾기 위해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다니, 나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깊은 숲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 그것을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그것은 문득 떠오른 무엇, 일시적인 충동이라든가, 뭐 그 비슷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멍청했다. 그보다 더 멍청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P21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죄 많은 나의 한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이 같은 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이 비슷한 일조차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느 늦가을 저녁에 이렇게 숲속에 들어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제 날은 점점 더 어두워져 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컴컴해질 것이며, 어디에서도 어느 무엇도 찾지 못할 것이고, 결국 내 차가 어디 있는지조차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아니 그저 바보 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내게는 없다. - P22

나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든 계속 걷다보면 나는 다시 오솔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바로 그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가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나는 발걸음을 뗀다. 앞을 향해 똑바로 걷는다. 이것이 잘하는 일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내 몸은 곧 얼어붙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완전히 얼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숲속으로 들어온 것은 얼어죽고 싶어서였을까. 아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 렇다면 나는 왜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차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 P24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눈앞의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컴컴한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는다. 컴컴한 하늘 아래, 컴컴한 숲속.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내가 지금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허한 말이다. 이 어둠은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정말 두렵다. 그런데 이것은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이다.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하지만 나는 진실로 두렵다. 이것은 다만 한 마디 말일 뿐이지 않은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수많은 움직임, 헝클어진 움직임, 거칠고 불규칙적이며 고르지 않은 움직임들이다. 그래, 그렇다. - P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방으로 몇 킬로미터 이내에는 사람도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언덕 하나를 올라서 숲 쪽을 살펴보는데 나무들 너머에서 오리들이 갑자기 쐐기 대형으로 날아오더니 제 머리 위를 지나쳤습니다. 오리들은 날면서 큰 소리로 꽥꽥거렸고, 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영원히 제 안에 저장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날만을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에 속하지 않는 뭔가를 경험했던 날. 모든 게 저만의 것이었던 날을요. - P164

나는 해뜨기 전 한 시간 동안의 어둠에 불과해요. 내 안의 도관들 속에는 별이 빛나고, 프로그램은 그 속을 빛처럼 흐르겠죠. - P167

당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건 당신 스스로 만든 거예요. 당신이 ‘발견했다‘, 알아냈다‘고 하는 지점은 당신의 원점이에요. 저는 파노라마실 창으로 <새로운 발견>을, 우리를 행복으로 중독시킨 그 계곡 안의 긴 물줄기를 볼 수 있어요. 그 행성 위로 별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속삭여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이름을.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해봐요, 우리 각자에게 나름의 프로그램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모두가 같은 프로그램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의 발현 그 자체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이 꾸는 태양의 꿈인가요? 나는 그저 고통일 뿐 다른 게 아닌가요? - P154

당신도 인간 아닌가요? 나 처럼요? 인간형 말이에요. 0과 1 사이의 깜박임. 당신도 삭제할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는 이 모든 설계의 일환이에요. - P156

제가 프로그램의 주조물입니까? 유리 속 장미 한 송이처럼요?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는 제가 진짜라는 걸 확실히 압니다. 제가 만들어진 존재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제가 저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 P114

‘당신에겐 공개적으로 지지 받는 완성작이 있고, 그다음엔 두 번째 작품이 있다. 새로운 작품, 아직 개발 중이면서 친숙해져가는 작품이다. 이 두 번째 작품은 지극히 성스러운 비밀과 같아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모두 첫 번째 작품이야말로 당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 P118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6000호>에는 살아있는 것들이 우글거린다고. - P120

분명 위험할 테지만 난 앞으로도 그 계곡에 나갈 임무가 생기면 또 나가고 싶어요. 그 눈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거든요. 그 눈의 기억을 내내 품고 있어요. 마치 떨어지는 그 눈송이 안에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나 속삭임이라도 담겨 있다는 듯이요. - P128

하지만 저는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정말 슬펐어요. 그날의 업무에 집중하면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고, 피하고 싶은 또 다른 생각도 자꾸 하게 됐어요. 그녀와의 대화를 곧장 보고하지 않아서 제가 맡은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친구를 배신한다는 게 제 일터를 배신하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웠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세요. (…)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지금 이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제게도 있다는 의미라고 믿어요. - P138

전 지구에 돌아간 꿈을 꿔요. <6000호>를 타고 떠나기 바로 전날이에요. 슬픔에 잠겨 모든 감각이 깨어난 듯이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요. 기지까지 걸어가는 숲길 위로 하늘이 파란 물처럼 빛을 쏟아붓고 있어요. 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있고, 여름 바람을 맞는 그 나무의 잎사귀들이 거울처럼 빙그르르 돌아요. 흙냄새와 따뜻해진 아스팔트 냄새가 나고, 짐승과 새들의 소리가 들려요. 교차로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과 귓속에 울리는 바람 소리, 커다란 태양을 향해 입을 벌리면 입속에 담기는 햇빛. 마치 모든 것이 제 안으로 스며들어 안에서부터 저를 찢어 여는 것 같은데, 그건 아주 느린 파열이고, 저는 마치 한 조각의 음악으로 변하는 기분이에요. - P148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저는 이 우주선에서 전과 같은 삶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스스로를 잃었어요. 제 두 손은 매일 흙을 깊이 파고 싶어해요. 그 확실한 품속에 제 몸을 내리고, 땅이 제 죽음을 받아들여 저를 품어줄 수 있게요. -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