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소리 없이 증식해 있던 호르몬 부대를 출동시켜 엄마 없이는 잠도 못 자던 아이를 엄마 손끝이 닿는 것조차 못 견뎌하는 10대로 바꿔놓은 터였다. 엄마가 내 스웨터에 묻은 보풀을 뜯어내거나, 견갑골 사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구부정한 등을 펴려 하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러 주름을 없애주려고 할 때마다 마치 뜨겁게 달군 다리미가 살갗을 누르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딴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엄마가 사소한 제안만 하려 들어도 신경질이 팍 났다. 나의 분노와 예민함은 갈수록 심해져 틈만 나면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하기 일쑤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나는 단박에 진저리치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만지지 좀 마!" "나 좀 내버려둘 수 없어?" "주름 좀 있으면 어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건데." - P66

봄이 여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고 사람들은 윗도리를 벗어서 팔에 걸치고 다녔다. 익숙한 근질거림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어떤 야생적인 상태—낮이 더 길어져 도시를 걷는 일이 아침부터 밤까지 마냥 기분좋기만 한 때, 모든 책임을 저 길가로 내던진 채 운동화를 신고 텅 빈 거리를 생각 없이 내달리고 싶은 그런 때—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충동을 외면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방학이, 유유자적한 나날이 내게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조만간 뭔가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 P72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로 나를 만들어보려 한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더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런 식으론 1년도 더 못 버티고 결국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할 거라 믿고 전략을 더 세련된 걸로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 때문에 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았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 P84

피터는 뉴욕으로 차를 몰고 왔다. 피터는 두시에 식당 문을 닫자마자 바로 내달려 새벽 네시에 그레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고선 끈적끈적한 블러드오렌지 마르가리타와 꾸덕꾸덕한 레프리토스 얼룩이 묻은 청바지 차림 그대로, 소파에 누운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가 자신의 회색 대학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온종일 꽉꽉 억누른 감정을 기어이 쏟아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피터가, 굳이 오지 말라고 한 내 말을 듣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피터는 한참 지나서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신에게 먼저 전화했노라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았노라고.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에 반드시 내 옆에 있겠다고 두 분에게 약속했노라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자기가 내 옆에 있겠노라고. - P84

내가 집을 떠나 살아온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모두 치유해주었으리라고, 내 10대 시절을 짓누르던 엄마의 중압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유진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충분한 공간을 찾아냈고, 나 역시 줄기찬 비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원 없이 창작 욕구를 발산한 덕분에 그간 엄마가 한 모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건만 아빠의 고백은, 그럼에도 엄마에겐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내비쳤다. - P87

콜레트 아주머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갈수록 이상해 보이고 미심쩍고 심지어 반페미니스트로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 인생의 주축이던,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엄마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 보이지 않는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열정에 헌신하지도 않고 실용적인 기술 개발도 소홀히 한 전업주부가 남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받은 보살핌을 그동안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서 몇 년이 지난 뒤였다. - P92

당시에는 소수자 정서가 뭔지 몰랐다. 음악계에서 대표성을 둘러싼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다른 여자들은 잘 몰랐기에, 실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여자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같은 처지의 백인 남자는 어떨지 상상해 유추해볼 능력도 없었다. 그 남자가 이를테면 스투지스의 라이브 공연 DVD를 보면서, 이미 이기 팝이 있는데 음악계에 또다른 백인 남자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캐런 오는 음악에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해주었고,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었다. - P97

자신들이 직접 쓴 노래를 연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누군가를 직접 보는 경험은 내게 계시와도 같았다. 투어 생활의 지속적인 고됨을 토로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공연 예매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는, 기껏해야 서른 명도 안 돼 보이는 청중 앞에서 그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이 사람과 무대를 했다니. 이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있었다니. 그때 예술가의 삶을 얼핏 본 기분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순간 그 길이 티끌만큼은 내게 더 가까워진 듯했다. - P105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116

이제 나는 기쁨과 긍정의 기운을 마구마구 내뿜을 것이고 그러면 엄마의 병이 나을 것이다.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입을 거고, 집안일을 군말 없이 싹 해치울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워 전부 해드릴 거다. 엄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 혼자 막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엄마에게 진 빛을 낱낱이 갚을 것이고, 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전혀 안 와도 된다고 생각한 걸 후회하게 만들 거다. 완벽한 딸이 될 테다. - P117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끈적한 크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손은 더는 내가 화들짝 피하기 바쁜 불쾌한 손이 아니라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이었다. 마치 엄마의 애정에 이끌리는 어떤 중심이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자기장에서 떠나 있었을 때까지 새롭게 충전된 중심이. 나는 또다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홀로서기하느라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그걸 달콤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스웨터를 세탁기에 돌려 버려 두 치수 작게 쪼그라뜨린 일을, 점심을 먹으러 고급 식당에 갔다가 무료인 줄 알고 시켜 마신 탄산수에 12달러를 쓴 일을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옳았어, 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투항하고 싶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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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와 틸리가 시골길을 산책해요
모니카 쿨링 지음, 시드니 스미스 그림, 김난령 옮김 / 불광출판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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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사는 곳과 다른 곳을 동경하게 된다. 표지의 제목을 보면 액자 안에 적혀 있는데 이 책이 그랜트 우드의 화가가 되기 전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책이기 때문. 펼쳐보면 화풍이 따뜻하고 친근하며 독특하기까지 하다. 읽고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마법같은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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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어머니는 자기 수프에서 고깃조각들을 건져내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좀 피곤해 보이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도 별로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우리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시게 하라고, 혹시 지금 어머니의 몸안에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확인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 P22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 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 P34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 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 P35

엄마의 규칙과 기대는 내 진을 다 빼놨지만, 엄마에게서 벗어날라치면 혼자 알아서 놀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두 가지 충동이 분열된 채로 지냈다. 어느 날엔 결국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타고난 선머슴 기질에 따라 행동했다가, 다음날엔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식이었다.
[…]
혼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방을 치우고, 부모님의 짐 가방을 정리하고, 수건으로 가구를 구석구석 닦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두 분이 돌아와서 내가 한 일을 봐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나는 바퀴 달린 어린이용 침대에 앉아 방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직 두 분의 얼굴이 기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생각에, 내일 아침이면 청소부가 와서 치울 거라는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이 돌아와서 아무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방안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면서 내가 한 착한 일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 P39

엄마는 다른 영역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앞세웠지만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무척 관대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먹게 하지 않았고, 내 몫의 절반만 먹고 남겨도 결코 접시를 다 비우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음식은 즐기는 것이어야 하며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밀어넣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유일한 규칙은 뭐든지 적어도 한 번은 맛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우리 가족은 내 용기를 칭찬했고, 나 역시 스스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의 무언가가 나를 새로운 길로 들여놓았다. 비록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용감한 아이가 되는 것만은 제법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련된 입맛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 P42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 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호밀밭의 파수꾼』 구판본도 건네주지 않았고,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이든 뭐든 내가 문화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학습 모델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만의 방식 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두 분은 세상을 실컷 구경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원 없이 맛보았다.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으로 만회했다. 나는 순대며 생선 내장이며 캐비아 같은 음식을 마음껏 맛보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고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 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 P43

"엄마가 모자 한번 써보라 해도 너는 싫어하잖아."
[…]
한국 아이돌로 살 수도 있겠다는 나의 희망은 그렇게 단박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깐이나마 나는 어쩌면 연예인이 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낱 그 중식당의 애완용 악어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수조에 갇혀 사람들의 심심풀이 구경거리 노릇을 하다가, 나이들어 몸이 더는 수조에 맞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치워지는 신세가. - P62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엄마는 또렷한 한국말로 연신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소파에 앉은 아빠 무릎에 기댄 채로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도 같이 울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래서 할머니 방에 있던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지켜보던 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엄마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는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하듯,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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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차에서 도시로 돌아가면서 여기를 걷고 있다. 해가 지고 있는데 나는 동쪽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이중의 여정을 밟는다. 하나의 여정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여정이다. 마주 오는 사람은 초록이 물들어가는 인적 없는 지역을 걸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데 이 평화롭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자기 앞으로 늘어진 그림자를 본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땅 위로 움직인다. 그림자의 다리가 창백하고 길다. 나는 인적 없는 곳을 가로지른다. 그림자가 갈색 벽 위로 올라가더니 갑자기 머리가 없어진다. 마주 오는 사람은 이걸 보지 못한다. 이걸 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두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홀로 들어선다. 홀은 끝없이 높고 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이곳의 흙은 약간 퀴퀴하고 마치 텃밭의 흙처럼 다루기 쉽다. 마주 오는 들개 한 마리가 미리 한쪽으로 비키면서 벽 옆으로 달려 간다. 우리는 서로 지나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뒤에 남겨진 문턱이 빛난다. 거기 문턱 위에서 순간적으로 홍염이 개를 휩싼다. 그다음에 개는 황야로 달려간다. 그리고 지금에야 나는 개의 털빛이 붉은색이라고 단정할 기회를 얻는다. - P71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시력으로 볼 수 있는 나라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길을 걷던 사람이 개와 마주친다, 해가 진다, 황야가 초록으로 물들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는 관심과 상상의 나라이다. 여행자는 외롭지 않다! 두 명의 누이가 양옆에서 걸으며 손을 잡고 이끈다. 누이 한 명의 이름은 관심이고 다른 누이의 이름은 상상이다. - P72

약속은 잊어버리자. 나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다. 나는 거리의 선량한 천재이다. 내게로 오시오! 내게로 오시라고!
3시 15분이다. 시곗바늘이 겹쳐져서 수평으로 뻗어 있다. 그걸 보고 나는 생각한다.
‘파리가 발을 비비는 거야. 심란한 시간의 파리 한 마리가?‘
어리석어! 무슨 놈의 시간의 파리야!
그녀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 - P73

관심의 세계는 머리맡에서 시작되고, 꿈나라로 떠나기 전에 당신이 옷을 벗으면서 침대 가까이로 끌어오는 의자 위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면 온 집 안이 아직 잠에 빠져 있고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고요하다. 움직임 없이 가득한 햇빛을 그대로 두려면 꼼짝하지 마시라. 의자 위에 양말이 놓여 있다. 갈색 양말이다. 그런데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당신은 갈색 직물 속에 위로 구불구불하게 뻗친 빨갛고 파랗고 오렌지 빛깔인 털 가닥들을 갑자기 발견한다. - P80

"기다려!" 돌멩이가 외쳤다.
"날 좀 봐!"
그리고 정말로 나는 기억했다. 돌멩이를 잘 살펴봐야 했다. 정말,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돌멩이는 놀라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돌멩이가 관목들 사이에서, 풀숲 사이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걸 손안에 쥐었던 나는 그것이 어떤 색깔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돌멩이는 연보랏빛이었을 수도 있고, 한 덩어리가 아니라 몇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화석이 그 돌멩이 안에 들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죽은 딱정벌레나 버찌 씨 같은 것 말이다. 그 돌멩이는 구멍이 숭숭 많이 난 것일 수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내가 땅바닥에서 주워 든 것이 사실은 전혀 돌멩이가 아니라 녹색 빛을 띤 뼛조각이었을 수도 있다! - P82

중요한 것은, 아이들은 진지한 이야기를, 보다 정확하게는 반박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어른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다고 치부되었다.
그뿐인가. 아이들의 대화나 생각, 열망 속에는 언제나 점잖지 못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 P87

그때가 당도했습니다. 제가 위대한 문학을 읽기 시작한 겁니다. 그 영향이 굉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건이 마침내 일어난 겁니다.
생전 처음으로 돈키호테에 대한 지식이 제 두뇌에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한 인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갔습니다. 지상에서 가능한 형태의 불멸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저는 이 불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여자를 인식하는 것처럼 유일무이하고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 P92

아버지에게는 제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것이 제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그 광경은 아버지에게 자기 만족을 불러일으키고, 아버지가 한 번도 이루어본 적 없는 어떤 업적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긍지와, 왠지 모르게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저한테는 그 웃음이 바보처럼 생각되고요. 저는 아버지가 보는 데서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그걸 피합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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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어나 바닥 위에 간신히 서서 옷을 입었다. 더 이상 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세계의 법칙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경계심을 가지고 몸을 움직였다. 어떤 부주의한 행동으로 놀라운 영향을 불러일으킬지 몰라 두려워하면서. 그냥 생각하고 사물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밤새 그에게 생각을 물질화하는 능력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추정할 근거가 있다. 예를 들면, 우선 단추들이 저절로 채워졌다. 또한, 예를 들면, 머리카락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빗을 적셔야 했을 때 갑자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돌아보았다. 햇살 아래 벽에서 렐랴의 옷들이 한 아름으로 몽골피에 Montgolfier 형제의 열기구 색깔로 불타고 있었다. - P27

자갈들이 버석거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내 눈길 밑으로 타이어가 달려 나간다. 쪽문이, 구부러진 지팡이처럼, 내 어깨 밑으로 파고들 기회를 노리고, 녹이 잔뜩 슬어서 부풀어 보이는 어떤 나사못이 길 위에 누워 있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된다! - P42

눈에 작은 파리가 들어갔다. 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가 달리는 곳은 이렇게 넓은데,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데, 꼭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전혀 일치점이 없는 두 종류의 운동(나의 움직임과 벌레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작은 내 눈 속에서 충돌했어야만 하는가 말이다!
시야가 쓰라려온다. 얼마나 심하게 눈을 찡그렸던지 눈썹이 뺨에 닿을 지경이다. 핸들을 놓아서는 안 된다. 눈꺼풀을 쳐들려고 애를 쓰지만 눈꺼풀은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나는 브레이크를 잡고 자전거에서 내린다. 자전거가 누워 있고 페달은 여전히 돌아간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벌린다. 눈알이 밑으로 돌아간다. 나는 붉은 눈꺼풀 안쪽을 본다.
눈 속에 들어간 벌레는 왜 즉시 죽어버리는 걸까? 내가 독액이라도 분비한단 말인가? - P42

새로운 줄타기 곡예사가 옛것을 패러디한다.
그리 오래되기 전에 우리는 나이아가라의 줄타기 곡예사들도 보았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였고 변절이었다. 이 곡예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연했는데, 헬멧을 쓰고 로마식 장비를 갖추고는 자전거를 타고 와이어 줄 위로 다니는 장갑 보병들이었다. 폭죽이 터지는가 하면 일제 사격도 이루어졌다. 특수효과가 강렬했다. 그러나 흔들거리는 와이어 줄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오를 줄 아는, 해진 바지를 입은 소박한 사람의 공연을 보면, 때로는 이 사람이 이미 살아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외관상 수수한 이 공연이 가장 드높은 장인의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 P54

코즐렌코프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는 꿈을 떠올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물러났다. 회계책의 페이지들이 곤두섰다.
그는 옆 사무실로 가는 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섰다. 바로 그 때 모든 고개들이 숙여졌다. 그는 창문들이 열려 있고 창문 너머에 초록이 우거지고 나뭇가지들이 드리운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창문들이 움직였다. 어떤 힘이, 어떤 기운이 창문에 날아들어 창 문짝을 사방으로 흔들어놓았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설렁거렸다. 책상에서부터 회오리를 일으키며 서류들이 날아올랐다. 그의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맞은편 문은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보았다. 모든 고개들이 푹 숙여지더니 얼굴이 책상에 가닿는 것이었다. 물론 맞바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그를 향해 시선을 들지 못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얼마든지 좋을 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모두들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렸어. 난 걸어간다. 난 천사를 보았어. 나는 예언자야. 나는 기적을 행해야 돼.‘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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