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라니.
그래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네요.
보통 제 또래의 한국 사람들은 집을 구할 때 이런 곳을 선호하지않아요. 한국에서는 아파트를 선호하죠.
들어 본 적 있죠? 아파트라는 단어.
제 짐작이지만 그중에서도 새 아파트가 가장 인기인데.
그런 조건의 아파트는 서울에서는 무시무시한 가격이고그렇다 보니 대부분 수도권의 신도시에서 살게 되는 거죠.
그런 곳이라면 말씀하신 것처럼 경쟁이 치열할 거예요.
상당히요.
그런데 여기는 아파트가 없잖아요.
경쟁이 있을 리가요."

"아, 그런 거라면 이해는 되지만… 그렇지만…나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를 거닐 때이런 풍경을 보고 싶을 것 같은데."

나와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시는 선생님께서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인생은 지나치게 우발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고. 자신은고민거리가 생기면 선택할 수 있는 수백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하는데, 문제는 정작 선택의 순간이 오면그 수백 가지 옵션들에 없었던 이상하고 엉뚱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 실컷합리적인 척하다가 끝에는 충동적인 선택만 하는, 그런 자신이 너무도 싫은데도대체 매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다. 일종의 자아비판인 셈인데, 그때는 그얘기가 재밌어서 실컷 웃고 말았지만, 어느 날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어쩐지 마냥 웃기지만은 않더라니.

188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도시형 한옥 공급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기여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선택한 방식이 바로 부동산개발인 셈이니 2023년, 현대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척 재밌는 부분이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한일합병 이후 급증한 경성 이주일본인들을 위해 명동과 남산 일대에는 ‘문화주택‘으로 알려진 근대화된 일본식주택이 빠르게 지어지고 있었다. 이런 문화주택은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상류층 사이에서도 유행인 지경이었다. 현재까지 그 일대에 남아 있는 일본식주택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은밀한 문화적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집과 주거형태를 지키는 것은 당연히 민족의 문화를 지키는 일이 아니었을까. 정세권선생은 청계천을 그 저지선으로 삼았고 청계천 이북의 동네들에 도시형 한옥을공급하는 사업을 벌였다. 현재까지 청계천 앞 익선동 일대를 시작으로 북악산아래까지, 종로구 일대에 남아 있는 소형 한옥들 대부분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군대식 표현이긴 하지만 청계천 이북, 현재의 종로구가 일제의 주거 문화침략에 대항하는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더욱 놀라운점은 이때 한옥 대단지가 건설된 많은 구역이 2023년 현재에도 근대 도시문화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옥부터 시작해 오래된 골목과작은 집들이 어우러진 동네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이미 서울에서는 몇안 되는 곳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나름 도시형으로 설계한 효율적인소형 한옥도 지금의 수직적인 도시가 요구하는 주거 유형과는 거리가 멀어진지 오래다. 여전히 엊그제 같은 나의 어린 시절만 떠올려 보아도 서울은그만큼이나 많이 변했다.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중이다.

50후에 나는 이 구역을 ‘북촌 빌라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 처음으로공개하는, 내 멋대로 붙인 이름이니 개의치 말길 바란다. 북촌 한옥마을에가려져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구역에 대한 애정을담았다. 북촌 빌라마을이 속한 ‘원서동‘이라는 지명은 창덕궁 후원의 숲인비원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일제가 창경궁을 격하시켜 만든창경원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어쩐지 아름다운 이름이다. 북촌의 원서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철저히

이탈리아의 석학이자 사회혁신을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2009년 세계 유수의디자인 대학들을 연결하기 시작한 데시스 네트워크(DESIS Network)의설립자인 에치오 만치니(Ezio Manzini)는 저서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은 거시적인 것보다는 미시적인 것에 집중한다고했으며, 이러한 흐름을 ‘SLOC‘라는 시나리오로 설명했다. SLOC는 약자로
‘작고(Small) 지역적이며(Local) 열려 있고(Open) 연결된(Connected)‘것을 의미한다. 그 요지는 디자인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작은 규모와지역적인 특징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치고 말았는데 바로 북촌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정말이다. 내가 사는 곳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SLOC의 특성가운데 무엇 하나 이 동네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다.
먼저 북촌은 율곡로 이북으로 삼청동까지 남북으로 800~900미터 남짓한작은(Small) 동네다. 서쪽으로는 경복궁이 동쪽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이놓여 있다. 한양도성 성곽의 전체 길이가 동서남북으로 약 18.6킬로미터에불과하다니 북촌이 현대의 서울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면적을 차지하고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너무 크면 하나의 동네로 인식되지 않고 너무작으면 정체성이 형성되기 힘들다. 북촌은 작고 하루 정도면 둘러보기 적당한크기인데 그렇다고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둘러볼 수는 없다. 직선으로는 짧은거리이긴 하나 중간중간 불규칙하게 뻗어나가는 골목들 탓이다. 이 골목들의길이를 모두 합친다면 10킬로미터는 족히 넘지 않을까? 작지만 알찬 것의매력을 잘 보여주는 동네라고 할 수 있겠다.

지역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멋들어진 저택이나한옥에 사는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오래전 재개발 대신 동네의 보전을택했던 서촌처럼 북촌에서도 주민들 사이에 조용한 연대가 지속되고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북촌은 열려 있음(Open)으로 모든 곳과 연결되는(Connected) 곳이다. 북촌은 더 이상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만을위한 공간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모두의 공간이 되었다. 한양이 닫혀있는 성곽 도시이자 팔도를 연결하는 조선의 수도였던 것처럼 도성 안에속한 북촌도 변화하는 도시 문화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의주산으로 인왕산을 주장하던 무학대사 대신 북촌의 백악산(북악산)을내세우던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자 신하들은 당시 한양(남경)의 입지적특성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태조실록》

처음 이곳에 이사 와서 계동길을 걸으며 흥미롭게 본 것이 있다.
바로 적지 않은 수의 점포에서 창이나 문에 붙여 둔 가게 운영자의흑백사진들이었다. 철물점부터 슈퍼, 편의점, 공방, 카페 등 계동길을채우는 상점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주인분들의활짝 웃고 계시는 전신사진이 깔끔하게 부착된 곳들은 확실히 눈에띄었다. 후에 이 사진들이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에 있는 물나무사진관에서 촬영한 일종의 지역 기반 문화 예술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을알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계동길에 뿌리를 내리고 계신 분들이 일종의인증마크처럼 자신의 사진으로 가게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사 후 이런저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가게들을 먼저 찾게 되었다.
관광객들이나 외지인들이 태반인 거리에서 그 사진들을 보면 어쩐지정체불명의 믿음이 생겨났다. ‘사장님, 저 여기 사는데요.‘ ‘저 여기 자주오는데요! 하고 상호 경계를 해제하기 위해 멋쩍은 인사를 건네야만 할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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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4
리처드 파인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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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물리학에 대해서, 그림들과 방정식들에관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과 눈의 광채가 전달하는은 비밀스러운 농담이 아니라 물리학, 그 자체의 즐거움이었다!
이 즐거움에는 전염성이 있다. 우리는 이 전염병에 걸리는 행운을누렸다. 자, 이제 당신 차례이다. 파인만식 삶의 즐거움을 경험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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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열려있지만 곧 닫힐 참이다. 높고 육중한 한쪽 문짝이 천천히 다른 문짝 위로 떨어진다. 나는 뛰어서 틈을 통과한다.
문 너머에는 첫 번째 것과 똑같은 또 다른 문이 있다. 이 문도 닫히기 일보 직전이고, 이번에도 나는 뛰어서 통과한다. 다음 문이있고 또 다음 문이 있다. 늦지 않게 닿으려면 아주 빨리 움직여야한다. 그럼에도 나는 문이 닫히지 않은 걸 보면서 매번 내가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 그러자면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하고,
나는 갈수록 지쳐간다.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다. 문은 하나씩 차례로 나타나는데, 모두 똑같은 문이다. 나는 아직은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다. 항상 또 다른 문이 있을 테니. (Le porte)

모든 문은 모순된 역할을 하는 이중적인 본성을 띤다. 한편으로는 장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출입 지점으로 기능한다. 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를 채근한다. 각각의문이 새로운 발견, 새로운 도전,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를 이끈다. 이탈리아어로 ‘문‘을 뜻하는 단어 ‘porta‘는 ‘가져오다‘라는 동사 ‘portare‘에서 나왔고, 다시 이 단어가 ‘sollevare‘ 즉
‘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니, 그것이 "로물루스가 쟁기로 도시의 담장을 배치하며 정확히 출입문porte 이 세워질위치에 담장을 올렸기 때문이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문은비록 생명 없는 물체로 남아 있지만, 이 말의 뿌리는 강단고 역동적인 행위에 맞닿아 있다.

‘최후의 일기’(Diario ultimo- Lalla Romano)는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과 자기 확인의 필연성, 경계를 넘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렬하게 증언하는 내밀하고 파편적인 텍스트다. 시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로마노의글쓰기는 오히려 더 정교하고 투명해진다. 절충과 짐작에 기댈지라도 그의 시각은 칼날처럼 빛을 뿜는다.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실명과 비슷하다는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글쓰기란 다름 아닌 세계를 인식하고관찰하고 시각화하는 것이니까. 이제 나도 이탈리아어로 앞을 볼 수는 있지만, 시야의 일부만 보일 뿐이다. 여전히 반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 나도 로마노처럼 불확실한손으로 글을 쓴다.
최후의 일기』는 시력의 상실이 부여하는 새로운 관점을들춰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내 이탈리아어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독자들과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로마노가 나를 일깨웠다.

‘잃어버린 사랑』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단어 가운데 하나는 ‘접목‘을 뜻하는 ‘innesto‘였다. 이 단편은 두 딸과 복잡한갈등 관계에 놓인 엄마가 주인공이다. 그는 한때 딸들을 버리고 떠났다 돌아온 이력이 있다. 딸에게 있는 못마땅한 기질,
딸들과 자기 사이에서 감지되는 유전적인 편차가 이 엄마의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페란테는 이렇게 적는다.

두 딸들에게서 내가 스스로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면들을확인할 때조차 나는 뭔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딸들은 그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의 가장 빼어난 자질이 그 애들의 몸에서는 결국 잘못 접목된, 우스꽝스러운 흉내에 그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창피하기도 했다.

이국에서 온 낯선 사람이 새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사회의 유익한일원으로 융화될 때, 이 인물이 체현하는 것이 곧 ‘접목‘이다.
‘접목‘은 보편적인 인간의 충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우리 각자가 왜 무언가 다른 것, 조금 더 많은 것을추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획득해나가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사는 도시, 국적, 신체, 얼굴, 성별, 가족, 종교를바꿀 수 있다. 접목이라는 방식으로 전보다 훨씬 쉽게 우리의기원을 부인할 수 있다.
접목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억지나 가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접목을 겪거나 스스로에게 단행하는 사람들을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 사회와 문명이 전진하고 발전하려면, 자양분의 원천을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 내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의 제언으로 쓴 너대니얼 호손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인간의 본성도 감자와 같아서 오랜 세월 한곳에 계속 심으면 땅이 메말라 번성하지 못할 터이다." 언어든 사람이든 나라든, 모든 것은 오직 타자와의 접촉, 친밀, 교류를 통해서만 새로워진다.
나는 이탈리아어가 내 언어가 아님을, 내 소유가 아니지만내가 사랑하고 사용하는 제2의 언어임을 한시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도 자문한다. 언어를 누가, 무슨 이유로소유하는가? 문제는 혈통인가? 완벽한 구사력인가? 쓸모인가? 영향인가? 애착인가? 어떤 언어에 속한다는 건 결국 무슨의미인가?

왜 이탈리아어냐고?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문을 열려고,
다르게 보려고, 나 자신을 다른 존재에 접목해보려고.

담으려는 욕구와 풀어놓으려는 욕구, 이 두 가지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소설 『끈』에서 상호작용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충동들이다. ‘담다‘라는 이탈리아어는 라틴어 동사
‘continere‘에서 나온 ‘contenere‘다. 이 단어에는 ‘담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억제하다, 억누르다, 제한하다, 저지하다‘ 등의의미가 있다. 영어에서도 우리의 분노, 재미, 호기심을 담거나 억누른다고 표현할 때 동사 ‘contain‘을 쓴다.
통은 그 안에 무언가가 담기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내용물이 없거나 내용물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비어있거나 차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정체성을 갖는다. 통에는 주로 소중한 것이 담긴다. 통은 우리의 비밀을 보관한다. 통은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만 가두거나 옭아맬 수도 있다. 이상적으로, 통은 혼란을 저지한다. 사물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영어의 ‘unhappiness‘와 뜻이 통하지만, 이것보다는 훨씬 강도높은 못마땅함을 나타낸다. 이 말에는 좌절, 불만족, 실망, 불쾌감이 뒤섞여 있다. 아울러 어원이 다르더라도 소리나 형태가 유사하고 주제적 연관성이 높은 특정한 이탈리아어 동사들, 가령 ‘contenere담다, 억제하다‘와 ‘contentare 만족시키다‘라든지
‘allacciare묶다’와 ‘lasciare놔두다‘ 간의 상호 근접성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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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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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산사 진입로와 같아서 환상적인경관을 맞으러 가기 위한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제공한다. 대문 열고 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덕 너머에 있다는 것은, 연극으로 치면 서막이고 음악으로 치면 잔잔하게 흐르는 전주곡 같다.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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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움직임의 동기‘에 주목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없다. 나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는지보다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가장 눈부신 열정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것일까. 그 해답을 우연히 강연 중에 찾은 적이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테마로 강연을 하면서, ‘당신을 결과와 관계없이 가장 몰입하게 하는 블리스(bliss, 내적 희열), 당신의 모든 슬픔을 잊고 몰두하게 하는 것은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의 기쁨을이야기했고, 학생들은 만화, 농구, 노래 등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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