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마다 갇힌 것과 깨부수는 장면을 동시에상상한다. 엘렌 식수의 말을 빌려 글쓰기는 H이기 때문이다. H, 이 글자는 두 개의 I와 그 사이를 잇는 하나의 선으로이뤄져 있다. 두 ㅣ는 각각의 다른 언어이며, 가운데 선은그 둘을 잇는다. 여기까지는 식수의 말이다. 나는 이것을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내 안에 깊숙이 가둬둔 언어, 가둬둔것을 깨부수고 꺼내는 또 하나의 언어, 그리고 그 둘 사이를격렬하게 잇는 것. 그것이 바로 H, 글쓰기라고.
또한 식수는 H에서 ‘사다리의 윤곽‘을 봤다. 그는그것을 ‘글이 오르는 사다리‘라고 불렀다. 식수의 말에 의하면이 사다리는 ‘내려가는‘ 쪽으로 움직인다. 웅덩이 아래로,물속으로, 차가운 바닥으로, 일단 내려가봐야 한다. 그래야 그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또 무엇을 부수고 올라와야 하는지 알수있다
뒤라스의 산문집 《물질적 삶》에서 그의 주방 벽에 붙어있던 물건의 목록을 본 적이 있다. 가는소금부터 락스, 철수세미, 절연 테이프까지 꼼꼼히 적혀 있던 생필품들. 두번의 전쟁을 겪었던 그의 어머니가 늘 벽장 속에 채워뒀던물품들과 꼭 닮은 목록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만든 집을 떠나어머니를 닮은 집을 만들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우리에게돌아갈 집 그 자체가 되어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그런 집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들이다. 뒤라스의세계에서 집으로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스스로 집이 되고,그곳에 결국 ‘혼자’남게 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이다.
뒤라스의 어머니는 ‘개간 가능한 토지‘라는 정부의말에 속아 황무지를 매입하며 전 재산을 잃었다. 하지만포기를 몰랐던 그의 어머니는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려했다. 태평양을 막으려는 여자와 그가 쌓은 제방을 매번무너뜨리는 바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신화, 정확히는실패한 신화처럼 읽힌다. 이렇게 실패한 신화는 우리의삶에 두 가지 방식으로 남는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우리를형성하거나, 뒤라스에게는 양쪽 다였던 듯하다. 어머니와바다는 평생 그를 괴롭혔고, 또 그를 형성했다. 어머니와바다가 없었다면, 그 둘의 광기를 목격하지 않았다면뒤라스의 문학이 존재했을까. 오해는 없길 바란다. 뒤라스의문학을 만든 것은 광기를 응시했던 그의 시선이지 광기 그자체는 아니다.
뒤라스의 눈으로 여자와 바다를 보자. 무너질 것을알면서도 다시 제방을 쌓는 여자. 그 여자의 행위는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반복의 중독에 가깝다. 무너진 것을다시 세우고 또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제방이성공하리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세우지 않는 상태를 견딜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자의 광기는 이해할 수 없는행위가 아니라, ‘멈출 수 없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뫼르meurs‘는 프랑스어 동사, ‘죽다(mourir의 일인칭현재형과 철자가 같다)‘를, ‘소saut‘는 ‘도약‘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과 움직임, 멈춤과 도약이라는 이중적인 이미지가담긴 이름이다. 한낮의 태양과 닮았다. 생명의 근원이자만물을 비추는 빛이 숨 막히는 열기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재앙을 예감한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태양에도 그이중적인 얼굴이 있다. 작열하는 빛에 이마에 땀이 흐르고,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파고들 때, 인간은 감정을 느끼고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는육체로 축소된다.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슬픔도 예외는아니다. 하지만 그는 태양과 싸울 수도, 그것을 이해할 수도없다. 그저 견딜 뿐이다.
의미 없이 산꼭대기까지 바위를밀어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처럼. 애도의순간에도 냉혹하게 빛을 쏟아내는 태양, 고통에 상관없이계속 굴러떨어지는 바위, 인간의 감정과 세계의 무심한사이의 이 간극을 카뮈는 ‘부조리‘라고 불렀다.
피해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글은 고발의 열기로뜨거울 수 있지만,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틀 안에창작물, 갇히게 된다. 반대로 만족은 세계에 안주하게 한다. 자신의위치에 안주하는 순간, 예술가는 더 이상 질문하지않고, 질문이 없는 예술은 생명력을 잃는다. 카뮈에게 가난과빛은 그 두 극단을 막아주는 장치였다. 전쟁에서 사망한아버지, 글을 읽지 못하고 청각이 좋지 못했던 어머니, 좁은집, 어릴 때부터 침묵과 노동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살아온그는 일찍부터 세계의 불공정과 침묵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가난은 비참한 불행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을 날것 그대로마주하게 하는 힘이었다.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 정확히아는 사람은 쉽게 자기연민이나 오만에 빠지지 않으니까. 또 그에게는 유년의 햇살이 있지 않았던가. 그의 말을 빌려고향의 태양은 그에게 ‘가난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빛을뿌려줬고 그가 현실을 반항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수용하게하는 원동력이 됐다.
카뮈는 《최초의 인간》을 쓰기 시작한다. 알제리의 유년과 어머니, 가난과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이야기다.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은 후에 거대한 이념이아니라 가장 사적인 기억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카뮈답다. 정의를 지지하는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가를 묻는 말에 ‘정의보다 어머니를 지키겠다‘라고 말했던 카뮈가 아닌가. 추상적 이념보다 구체적 생명을 택한 카뮈에게서 내가 배우고싶은 것은 대단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한계 안에서 인간이지켜야 할 품위이다.
1960년, 상스의 국도에서 자동차 한 대가 플라타너스나무를 들이박는다. 그 사고로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카뮈가즉사한다. 부조리를 말했던 철학자의 삶은 이렇게 부조리로끝났다. 사고 당시 그의 가방 안에는 《최초의 인간》의 원고가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로 삶은 멈췄지만, 한 인간이 남긴의미는 소멸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것이 카뮈가말하는 마지막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는 부조리를외면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 하지만 카뮈의 말처럼 그것을마주하며 세계와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는 법을 배우고자기만의 창조적 방식으로 반항할 수는 있다. 삶에 초월적구원은 없겠지만,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서 순간의 아름다움과기쁨에 집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카뮈가 그랬듯이 어쩌면그런 것들이 절망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게 하는 힘이되어주지 않을까.
바람이 잠잠해진다. 다시 빛이 방 안을 휘감는다. 이제야 신이 침묵하는 이유를 알겠다. 신은 답하는 자가아니라 질문하는 자. 그는 빛을 창조할 수 있지만, 의미를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롯이 빛을 가진 자의 몫이다. 이 빛은 내게 무엇인가. 내게도 질문이 왔다. 답을 찾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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