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엠퍼시와 연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핏각하면 감정적인 심퍼시가 선의와 관련 있을 것 같지만, 의견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공감하는 데에는 굳이 선의가 필요 없다.
인간이 남의 신발을 신어보려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한번분발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야말로 선의, 아니 선의와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왜 나한테 주는데?"
팀은 커다란 초록색 눈으로 아들을 보며 물었다.
질문은 아들을 향했지만, 외려 내가 팀의 눈빛에 가슴을꿰뚫린 것만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팀은 "고마워." 하고는 교복을 쇼핑백에 넣고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다음 현관으로 나갔다.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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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을 보고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의말과 행동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사람이 어떤 세상에서살아왔고 어떤 세상으로 가려 하는가도 봐야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가정하고 있거나 추론해낸 그 사람의 품성이나 가치에 기반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앞에 왔느냐와 나를 떠나 어디로 가느냐가 더결정적이다. 심리학이 200년 가까이 인간을 연구한 결과의 흐름 하나를 말콤 글래드웰은 여기서도 한 문장으로 절묘하게 묶어냈다.
"인간은 현재의 느낌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토록 긴 과거에 대한평가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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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대상과 나 사이의, 사랑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에만 찾아오는 관계 맺음이다. 길들여야 할 것은 여우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길들인 후에야 아름다움은 나를 찾아온다.
고등학교 학기 말, 미술 선생님이 내 스케치북을 찬찬히 살펴보신 적이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장 한 장 넘기시고는, "아이쿠, 도저히 안 되겠구나. 스케치북 도로 가져가렴."
당연히 미술 실기 점수는 형편없었다. 그림은 지금도 전혀 못 그린다. 내 맘에 드는 그림을 찾아 감탄할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갖추게 된 것은 아내와의 만남 덕분이다. 그림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취미를 함께하고자,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서양미술사』를 밑줄 그어 가며 공부하듯 읽었고, 인상파 화가를 중심으로 화보집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아니 글쎄, 내게도 그림을 보는 취향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 그림이라고 다 같은 그림이 아니었다. 내 맘에 들어 넋 놓고 계속 보게되는 그림들도, 다른 이가 아무리 명화라 해도, 내게는 영 별로인그림들도 생겼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름다움은 결국 누적된 체험의 결과다. 준비된 사람만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누적된 체험이 다르니, 아름다움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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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확산은 의학적 위급 상황이기에 앞서 수학적 비상사태이다. 사실 수학은 숫자의 학문이 아니라 관계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서로 다른 실체 사이의 연결과 교환을 기술한다. 그 실체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문자, 함수, 벡터, 점과 곡면으로 추상화한다. 그러니 전염은 우리 연결 관계의 감염이다.

....대항할 항체가 없기에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우리는 항상 일이 시작되고 끝나는 날짜를 알려고한다. 자연의 시간에 따르기보다 자연에 우리의 시간을 부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따라서 전염이 일주일 사이에 종식되기를, 곧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전염의 시대에는 우리가 무엇을 실제로 기대해도 되고 기대하면 안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작정선의 것을 바라는 것과 적절한 선에서 기대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불가능하거나 매우 불확실한 것을 기대한다면 거듭되는 실망에 빠질 것이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허황된 마술적 사고는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할뿐이다.

그런데 Cov-2는 신종 바이러스이다. 우리는 항체도백신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리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SIR 모델로 볼 때,
이 새로운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감염 가능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을참고 견뎌야 한다. 다소 불편이 따르겠지만, 현재 우리가쓸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은 신중함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내게 아주 침착하게, 특정한 상황에서는 그저 단념하는 게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 될 수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전염병은 우리가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정상적인 사회체제에서 우리가 발휘하지 못했던 상상력을 거침없이 펼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고, 개인적 선택을 할 때도타인의 존재를 고려해야 한다.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단일유기체의 일부다. 전염의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전염의 시대에, ‘인간은 섬이 아니다‘ 라는 존 던JohnDont의 묵상이 더욱 의미심장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은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유예된 활동, 격리된 시간들은 그 초대에 응할 기회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우리야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것.

우리는 코로나19가 개별적인 사건이고, 역경이나 재앙이며, 다 ‘그들‘ 잘못이라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러는 건자유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 사태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할 수 있다. 정상적인 일상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생각의 시간‘으로 이 시기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되돌아가고 싶은지등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날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Marguerite Duras*의 문장이 있다. ‘평화는 이미 어렴풋이 보인다. 거대한 어둠이 내리는 것 같다. 망각의 시작이다. 전쟁이 끝나면 모두 끔찍했던 기억을 서둘러 잊으려 한다. 질병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유행의 시작이 비밀 군사 실험에 있지 않고,
환경 및 자연과 위태로운 관계, 산림 파괴, 우리의 부주의한 소비에 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다.
대유행은 우리가 대부분 기술적으로 준비되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 점을 잊고 싶지 않다.
나는 가족 앞에서 용감하지도 의연하지도 지혜롭지도못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다. 서로가 가장 필요했을 때사기를 북돋아주지 못했고, 나 자신도 위로하지 못했다.

우리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각자가 알아서, 그리고 함께 성찰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괴물같은 자본주의에 지혜롭게 저항할 수 있는지, 경제 체제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 환경과의 협정을 어떻게 다시맺어야 하는지 모른다. 심지어 나의 행동을 어떻게 바꿔야하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각하는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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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 삶의 지향을 규정하는 내 생각을어떻게 형성했는지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런 나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다른 사라고마찬가지로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면서 내 사의 뜻대로 삼고 있는데, 그 생각을 내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그런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생각하다‘의 과정 없이 ‘생각‘을 머릿속 가득 입력하여갖고 있다는 특별한 점이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나‘들은 "내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라는 물음을 던지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만큼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음에도 머릿속에는많은 생각을 충만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바꿔말해야 한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만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것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다.

회의하다, 그것이 생각하다‘ 이다(Douter, c’est penser)."
데카르트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명제다. 회의하다 = 생각하다라고 할 때, 우리는 학교에서 암기했고 주입받았을 뿐 생각한 적이 없다. 따라서 회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사이면서 고정인 ‘생각하다‘와 명사이면서 결과인 ‘생각‘의 성질이 정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이 워낙 중요하므로 거듭 강조의 성질은 고집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생각해본 적이거의 없다.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생각하도록 하지않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생각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래서우리는 실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각하다‘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의식세계에 입력된 생각을 막무가내로 고집하게 된다. 게다가 입력된 것은 정답이라고 주장된 것들이다. 얼마나 강고하게 고집하겠는가.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周)
사이불학측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공자님 말씀이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우고 익힘을 강조하셨던 공자님도 "나는 생각한다" 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배우기와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는 게 2,500년 전부터 내려온 동 양의 지혜인데, 우리에겐 배우기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다. 그래서 얻는 것이 없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얻 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머릿속이 차라리 비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나는 회의한다)"가 없는 채 지배 세력이 선정한 생각(=고집)을 정답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에

왜 그럴까? ‘80에 속한 ‘나’들의 처지가 갈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나‘들의 의식이 거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의 사유세계에는 그런 정책 제안이 있다는 정보 자체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나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모르고 있다면, 나의 사유세계에 무엇인가 들씌워져 있는 게아닌가, 또는 내가 그런 정보들에 무관심하거나 모르도록 만드는 환경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내가 기본자본이나기본소득, 무상의료나 대학 무상교육, 공공임대주택 건설, 토지보유세 강화 등의 정책 제안에 대해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정책이라면서 지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거나 아예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다면, 그런 생각을 내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고! 그 생각, 내가 갖고 태어났을까? 아니다.
그 생각, 내가 창조했나?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그 생각, 내가선택했을까? 그럴 리 없다. 그 정책들이 실현된다면 나의 처지가 훨씬 좋아질 텐데 왜 내가 그 정책을 거부하는 생각을 선택하겠나? 하지만 실제 일어나는 일은 항상 이런 것이다. ‘80‘에속한 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유의 날개는 저 먼 곳에서 슬픈 날갯짓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외할아버지가 잠시 뜸을 들이시다가나에게 물었다. "얘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니?" 나는 주저 없이그거야 서당 선생 먹으라고 하지 않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건 왜 그러냐?" 나는 또 서슴없이 "큰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치며 좋아했으니까 그렇죠, 뭐!" 라고대답했다. 내 대답에는 주저함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자외할아버지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지막 세 번째 개똥은 서당 선생이 먹어야마땅하지. 그런데 얘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마라. 앞으로네가 살아가면서 오늘처럼 세 번째 개똥을 서당 선생이 먹어야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할 때엔, 그땐 네가 그세 번째 개똥을 먹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았어살아가면서 세 번째 개똥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 번째 개똥은 당신 몫입니다!"라고 발언했어야 마땅했음에도 침묵하고 지나갔던 나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그렇지만 세 번째 개똥을 되도록 적게먹으려고 노력했다.

세 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 형제 중에서 막내와 일치시킨 것과 관련되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나? 나는 첫째와 둘째를타자화했고 능멸했다. 그런 나는 첫째보다 글 읽기를 즐기고있나?‘ ‘나는 둘째보다 겁이 없나?‘ 이런 물음들이 나를 헤집었다. 나는 글 읽기보다는 놀이를 훨씬 더 즐겼다. 또 겁도 많다.
나는 막내보다 첫째와 둘째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진짜 모습에 가까웠던 첫째와 둘째를 타자화하고 업신여겼던 나 자신을되돌아봐야 했다. 개똥 세 개의 등장인물이 ‘세 자매‘가 아니라 삼 형제‘라는 점을 알아차린 건 그보다 또 한참 뒤의 일이었는데, 그러자 삼 형제의 바깥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랑스 땅에서 가난한 난민의 처지가 되었을 때, 막내는커녕첫째나 둘째도 아닌, 서당 마당을 쓰는 개똥이가 된 내 모습을발견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세 번째 개똥을 되도록 먹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애썼던 것은 사실이다. 돌아보면, 나의 평탄치 못한 삶은 시대적 환경도 작용했겠지만 세 번째 개똥을 적게 먹으려고 노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내 처지가 바뀌지않았다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닌 셋째와 나를 동일시하면서쭐해했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말해, 나 자신의 모습인데도 남인 양 계속 타자화하고 업신여!
길 뿐만 아니라, 나의 사유세계 바깥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지 못한채 오늘을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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