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 삶의 지향을 규정하는 내 생각을어떻게 형성했는지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런 나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다른 사라고마찬가지로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면서 내 사의 뜻대로 삼고 있는데, 그 생각을 내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그런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생각하다‘의 과정 없이 ‘생각‘을 머릿속 가득 입력하여갖고 있다는 특별한 점이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나‘들은 "내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라는 물음을 던지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만큼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음에도 머릿속에는많은 생각을 충만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바꿔말해야 한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만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것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다.

회의하다, 그것이 생각하다‘ 이다(Douter, c’est penser)."
데카르트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명제다. 회의하다 = 생각하다라고 할 때, 우리는 학교에서 암기했고 주입받았을 뿐 생각한 적이 없다. 따라서 회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사이면서 고정인 ‘생각하다‘와 명사이면서 결과인 ‘생각‘의 성질이 정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이 워낙 중요하므로 거듭 강조의 성질은 고집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생각해본 적이거의 없다.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생각하도록 하지않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생각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래서우리는 실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각하다‘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의식세계에 입력된 생각을 막무가내로 고집하게 된다. 게다가 입력된 것은 정답이라고 주장된 것들이다. 얼마나 강고하게 고집하겠는가.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周)
사이불학측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공자님 말씀이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우고 익힘을 강조하셨던 공자님도 "나는 생각한다" 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배우기와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는 게 2,500년 전부터 내려온 동 양의 지혜인데, 우리에겐 배우기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다. 그래서 얻는 것이 없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얻 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머릿속이 차라리 비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나는 회의한다)"가 없는 채 지배 세력이 선정한 생각(=고집)을 정답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에

왜 그럴까? ‘80에 속한 ‘나’들의 처지가 갈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나‘들의 의식이 거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의 사유세계에는 그런 정책 제안이 있다는 정보 자체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나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모르고 있다면, 나의 사유세계에 무엇인가 들씌워져 있는 게아닌가, 또는 내가 그런 정보들에 무관심하거나 모르도록 만드는 환경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내가 기본자본이나기본소득, 무상의료나 대학 무상교육, 공공임대주택 건설, 토지보유세 강화 등의 정책 제안에 대해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정책이라면서 지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거나 아예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다면, 그런 생각을 내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고! 그 생각, 내가 갖고 태어났을까? 아니다.
그 생각, 내가 창조했나?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그 생각, 내가선택했을까? 그럴 리 없다. 그 정책들이 실현된다면 나의 처지가 훨씬 좋아질 텐데 왜 내가 그 정책을 거부하는 생각을 선택하겠나? 하지만 실제 일어나는 일은 항상 이런 것이다. ‘80‘에속한 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유의 날개는 저 먼 곳에서 슬픈 날갯짓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외할아버지가 잠시 뜸을 들이시다가나에게 물었다. "얘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니?" 나는 주저 없이그거야 서당 선생 먹으라고 하지 않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건 왜 그러냐?" 나는 또 서슴없이 "큰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치며 좋아했으니까 그렇죠, 뭐!" 라고대답했다. 내 대답에는 주저함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자외할아버지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지막 세 번째 개똥은 서당 선생이 먹어야마땅하지. 그런데 얘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마라. 앞으로네가 살아가면서 오늘처럼 세 번째 개똥을 서당 선생이 먹어야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할 때엔, 그땐 네가 그세 번째 개똥을 먹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았어살아가면서 세 번째 개똥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 번째 개똥은 당신 몫입니다!"라고 발언했어야 마땅했음에도 침묵하고 지나갔던 나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그렇지만 세 번째 개똥을 되도록 적게먹으려고 노력했다.

세 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 형제 중에서 막내와 일치시킨 것과 관련되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나? 나는 첫째와 둘째를타자화했고 능멸했다. 그런 나는 첫째보다 글 읽기를 즐기고있나?‘ ‘나는 둘째보다 겁이 없나?‘ 이런 물음들이 나를 헤집었다. 나는 글 읽기보다는 놀이를 훨씬 더 즐겼다. 또 겁도 많다.
나는 막내보다 첫째와 둘째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진짜 모습에 가까웠던 첫째와 둘째를 타자화하고 업신여겼던 나 자신을되돌아봐야 했다. 개똥 세 개의 등장인물이 ‘세 자매‘가 아니라 삼 형제‘라는 점을 알아차린 건 그보다 또 한참 뒤의 일이었는데, 그러자 삼 형제의 바깥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랑스 땅에서 가난한 난민의 처지가 되었을 때, 막내는커녕첫째나 둘째도 아닌, 서당 마당을 쓰는 개똥이가 된 내 모습을발견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세 번째 개똥을 되도록 먹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애썼던 것은 사실이다. 돌아보면, 나의 평탄치 못한 삶은 시대적 환경도 작용했겠지만 세 번째 개똥을 적게 먹으려고 노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내 처지가 바뀌지않았다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닌 셋째와 나를 동일시하면서쭐해했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말해, 나 자신의 모습인데도 남인 양 계속 타자화하고 업신여!
길 뿐만 아니라, 나의 사유세계 바깥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지 못한채 오늘을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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