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해요." 카를이 대답했다. "세상을 바깥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속도를 늦춰요. 문자도, 인터넷도, 전화도, TV도, 주의를 금방 산만하게 만드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아요. 그 대신 백일몽을 꾸고, 창밖을 내다보고,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생각에잠기고, 잘 먹고, 양심의 가책 없이 졸기도 하죠. 20분만 아무것도 읽지 말고, 게임도 하지 말고, 정리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말아 봐요.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고 아무 일도 하지않는 것은 배워야 하는 그 무엇이랍니다. 정말이에요. 아주 놀라운 일들은 천천히 생기는 법이니까요." "무슨 뜻인가요?" 나는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노래를 쓰고, 도자기를 빚고, 희귀 식물을 연구하고, 위대한 사랑을 만드는 이 모든 일에는 긴 시간이 필요해요. 깊이생각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에 도달하죠. 창의력은공감과 지루함에서 생겨나고 아름다움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이미 나 자신이 누군가가 샤워 후에 실수로 탈의실에 두고 간 수건처럼 느껴진 지오래였다. 나는 잊히고, 버림받고, 분실됐다. 하지만 그렇게된 데는 이렇다 할 이유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모든 것을바꿔 버린 어떤 전환점도 없었다. 이유는 오로지 나였다. 이런 마음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내 능력은 포핸드 실력보다도 뛰어났다. 다들 나의 성장에 투자한 데다 나에게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누가 갑자기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수 있으랴?
운동선수로서는 성장했지만 운동이 나를 더 당당하고 강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여리고 예민하게 만들었다는사실을,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혼자 경기장에서 있기 싫다는 것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따뜻한 공동체를, 함께 이기고 함께 지는 집단을 열망했다는 것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될진대…………….
그는 진단 결과를 읽어 주고 바로 서류철을 덮었어요.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가 이 결과를 다룰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죠. 첫째, 내 운명을 원망하며상황에 굴복하고 현실을 외면한다. 다른 하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작은 자루에 가득 차게 모으기 시작한다. 정말 문자 그대로 그렇게 말했어요. 작은 자루에 가득한 행복한 순간들. ‘왜 하필 나지?‘가 아니라 ‘내가 아니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라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죠. 질병은 이제 나의 한 부분이라고요. 힘든 순간에도 병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어요. 어차피 다른 존재로서는 이제 살아가지 못할테니까요. 내 병은 치료법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고했어요."
카를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스스000로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이따금 잊어버리기도 하죠. 하지만난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아요. 수영을 끝내고 마시는 커피한 잔이 하루 중에 가장 멋지다는 사실을요. 당신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어요. 여기서 아주 가까워요."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활짝 열려 있죠?" 내가 물었다. "나라면 오늘 아침에 당신에게 집으로 커피를 마시러 오라고 초대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텐데......." 카를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아마 연습의 문제, 어떤 사람이 쌓는 경험의 문제일 거예요. 용기를 자주 낼수록 그게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점점 더 확실하게 느껴요. 책의 등장인물에게서 좀 배우기도 하고요. 나는 그들과 함께 이미 수많은 길을 걸었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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