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데르우리는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들"로 연명할 수는 없다. 단순한 종교적 교리와 규정은 내면의 양식이 되지 못한다. 내게 믿음이란 사랑하면서 찾는 것이고, 찾으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은단순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쓰이도록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차츰차츰 생성되는 작품이다. 예술작품과 아주 흡사하다. 그 안에 창조적인 힘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현존이 활동하고, 우리는 그에 힘입어 살아간다.
바이올린 마이스터로서 이 책에서 바이올린 완성 과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외적으로는 내 공방을 안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내적인 길이기도 하다. 나무의 섬유결과 사출수를 알아차리는 일, 음색을 찾는 노력, 칠의 깊이와 다양한 수지의 매력, 곡선 형태의 아름다움, 열정적인 음악가들과의만남. 이 모든 것에서 삶에 대한 비유가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산의 거목들은 다르다. 산속 가문비나무들은 천천히 성장하면서 아래쪽 가지들을 포기한다. 어두운 산중에서 위쪽 가지들은 빛을 향해 위로 위로 뻗어나가고, 아래쪽 가지들은 사멸한다. 그들의 침엽에 더 이상 빛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길게 뻗은 줄기에서 바이올린 제작에 안성맞춤인 가지 없는 목재가 형성된다. 수목한계선 바로 아래의 척박한 땅과 기후는 가문비나무의 생존에 고난이 되지만, 울림에는 축복이 된다. 메마른 땅이라는 ‘위기‘를 통해 나무들이 아주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이런목재에 울림의 소명이 주어진다.
좋은 울림이 있는 바이올린을 위해 이 모든 수고가 요구된다면, 울림이 있는 삶을 사는 데 그보다 덜 요구될 수 있을까. 우리 인생은 순례의 길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슴을 주신 것은 그분을 찾게끔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느님을 찾는 것이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까? <시편>은 "하느님을 찾는자들은 그 마음이 생기를 얻을 것이다"(<시편> 69:32)라고 한다. 이구절에서 ‘찾은‘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찾는 자들이라고 말하는것은 주목할 만하다! 찾고, 듣는 믿음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바로 목재가 바이올린 소리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삶은 수목의 성장이 빠르고 목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저지대의 길이 아니다. 인생은 실패와 역경과 어려움을 통과하는 길이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길에서 공통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열정이 없는 영혼은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것이다. 믿는 것에익숙해진다는 것은 미묘한 형태의 불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믿음은 힘이 없다. 깨어 있는 믿음은 하느님이나 세상에 익숙해질수가 없다. 익숙해지면 마음은 희망을 잃고, 영은 물음을 잃어버린다.
사물을 그냥 받아들이고 더 이상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삶은 자극이 없고 지지부진해진다. 생물학 용어이기도 한 적응adaption이란 자극에 무뎌지는 것을 의미한다. 세포의 반응률은 감소하고, 더 이상 반응하지 않기도 한다. 믿음도 그와 같다. 자신의영적 환경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자극이 와도 무덤덤하게그냥 졸고 있을 정도가 된다. 더는 반응이 실행 되지 않는다. 적응의 마지막은 자극 없는 삶이다.
찾는 자로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영혼이 따라야 할 소중한계명이다. 슈투이벤 숲의 수목한계선까지 올라갔던 경험은 내게그런 비유가 되었다. 질문은 우리를 찾는 자로 만들고, 비전은 희망하는 자로, 동경은 사랑하는 자로 만든다. 삶이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을 보고 그것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찾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순례자란 무엇일까? 순례자는 자신이 가는 길에서 자신의 근본과 소명과 한계를 의식하는 자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무엇을 해도 되는지 잘 모르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아는 자인처럼 여긴다. 반면 의미에 민감한 사람은 소명을 묻고, 자신의 한계에 주의한다
우리가 믿는 바는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설파하는 세계관에서가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우리가 어떤 일에 힘을 쏟는지에서 드러난다. "내게 당신이 뭘 하는지 보여주시 오. 그러면 내가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보여주겠소"라고 말할수 있다.
의미를 찾는 데 아무런 희생이 따르지 않는다면, 제대로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동경의 불꽃이 차갑게 식으면, 과거에 믿음이었던 것은 종교적 교리라는 차가운 재로 남게될 것이다. 때로 하느님은 우리가 질문하는 자로 남게 하려고 우리에게서 모습을 감추신다. 묻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약속 앞에서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 모든 예언자들은 이렇게 찾는 믿음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편 69편은 "하느님을 찾는 자들은 그 마음이 생기를 얻을것이다"라고 말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여기서도 이미 찾은 자가아닌 찾는 자를 이야기한다. 거룩한 불안은 우리가 찾아 나서게하고, 삶을 민감하게 돌아보게 한다. 거룩한 불안에 무심함은 없다. 비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얼마나 자주 무심한 자로서의 미성숙한 안심과 내몰린 자로서의 미성숙한 불안 사이를 오가는가. 《장자》 (기원전 300년경)의 다음과 같은 비유처럼 말이다. "그대들은 가되 무엇이 그대들을 몰아가는지를 알지못한다. 그대들은 쉬되 무엇이 그대들을 지탱해주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정해진 길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선택의 정글을통과하는 길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포기할지결정해야 한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에서 우리는 특별한지혜를 만난다. 물론 산속 가문비나무도 우듬지에는 푸른 잎이달린 가지들이 있다. 가지들은 빛을 향해 뻗어나가고 그 덕분에가문비나무가 산다. 빛을 통해서만 침엽이 만들어지고, 나무가 힘을 얻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죽는다. 그리고 죽은 것은 유기체에 부담이 된다!
가문비나무는자연적인 지혜로, 어둠 속에 놓인 마르고 시든 가지는 떨궈버린다.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것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울림의 진수가 생겨난다! 그것은 언젠가 바이올린이 될, 나이테가 얇고 가지가 없으며 섬유가 길고 단단한 질 좋은 울림 목재다.
울리는 삶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죽은 부분과 결별해야 할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 정직한 마음은 스스로에게서 힘과 가치를 앗아가는 죽은 가지를 분간한다. 우리 삶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삶의 모든가지와 모든 욕망에서 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삶은 학습하는 것이다! "내게 와서 배워라"(<마태복음> 11:28)라는예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라서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요한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