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스 BLISS - 내 안의 찬란함을 위하여
임현정 지음 / CRETA(크레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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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 상쾌 & 열정& 공감….임현정 피아니스트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만나게 해준책. 음악만큼이나 멋진 임현정씨를 만나서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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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스 BLISS - 내 안의 찬란함을 위하여
임현정 지음 / CRETA(크레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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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나와 흑건만이존재했다. 어느새 나는 열두 살의 말괄량이로 돌아갔고 이방인이 된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저 피아노 건반과 재밌게 노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묘한 침묵이 교실을 덮었다. 영원과 같았던 침묵의 순간이 흐르는 동안 모두와친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 명씩, 조금씩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 같이환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피아노는 두려움을 극복시키면서 내 마음 그대로를 전달해주었다. 단 몇 분의 음악은 9000킬로미터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언어와 국경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고, 이렇게 음악은 나와바깥세상을 연결해 주는 가장 멋있는 다리이자 고유한 언어가되었다. 내 영혼은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게 되었고, 비로소 나는 진정으로 음악을 만났다. 내게 피아니스트는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닌 뚜렷한 사명으로, 직업이 아닌 존재 이유로 다가왔다. 음악이 ‘유니버설한 언어‘라는 표현은 언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생존 키트‘로 다가왔고, 부당한 인종차별을 직접 당하면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얼마나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좁은 우물 안 개구리가 갑자기 끝도 없이 넓은 대서양을 보며 정신이 활짝 열린 것이다.

"오만한 아름다움으로 로마를 지배하고 있는 이 빌라 메디치 VillaMedici, 로마상이 열리는 장소는 순수한 기쁨을 신뢰와 함께 안고 올 수있는 장소, 그런 모든 예술의 활기찬 지성의 중심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에게 이곳은 단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오는 장소일 뿐입니다. (…) 그곳에서 ‘연구‘라는것은 그저 의무적으로 어서 ‘보내버려야 할 것‘으로만 여겨지고있고, 정말 연구를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기는 결과만나오고 있습니다.- 드뷔시가 로마상 수상후-

적어도 한 시대의 아름다움을 검증하는 예술적 운명을 완수하기위해서는 로마상이 쓸모없다는 점을 그 어떤 비판보다 더 잘 증명하는 우울한 결론입니다.
로마상을 받은 젊은이들, 당신이 어떤 용감한 사람을 만나서, 예술이란 정부에서 보존하는 기념물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 어떠한 불행을 겪더라도 모든 관점에서부터예술을 사랑해야 하며, 절대로 예술을 통해 그 어떠한 ‘지위‘에도오르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모든 콩쿠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콩쿠르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다지고 발전시킬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콩쿠르라는 시스템이 음악가들을 지나치게 지배하고 있다. 콩쿠르가 아니면 음악인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는 인식깊게 뿌리내렸다. 음악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빛낼 수있는 길이 보다 더 다양해져야 한다.

"항상 기회는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잘 안되어도 슬프지 않고, 잘되어도 그렇게 기뻐하지는 않아요. 제가 세워놓은 목표가너무나도 높기에 상을 받아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오히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이 제 목표 달성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가야할 길이 많거든요. 미래에꼭 완벽한 음악가가 되고 싶고, 피아노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도사가 되고 싶어요."

피아니스트 여러분! 쇼팽이 우리에게 남겨준 자산을 잊지 맙시다. 그는 피아니스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드립니다. 당신이 창조한 이상을당신 마음 안에서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자유롭게 따라가십시오. 아주 대담해지세요. 당신 자신의 능력과 힘을 자신 있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든지 좋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는 동안 세상이 등을 돌렸던 반 고흐는 의욕조차사라졌을 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동생 테오에게 한 말이다.
"희망도 없고 무엇을 해내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은 이미 깨져버렸어. 그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야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
그의 생의 마지막 편지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어쨌든! 난나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나의 이성까지 반쯤 잃어버렸어"

‘겸손‘의 한자어를 풀이하면 謙겸손할 겸은 말씀 언과할 겸이, 遜겸손할 손은 쉬엄쉬엄 갈 착과 孫손자 손이 합쳐져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겸손할 겸의 언급 옆에 있는 겸이 벼 두포기를 손으로 잡은 모양이다. 즉 ‘말을 묶어두어라‘, 혹은 ‘말을아끼다‘라는 뜻이 될 수 있고, 다르게 해석하면 ‘상대의 입장과자기 입장을 동시에 겸하다‘라는 뜻도 된다.

착과 손이 합쳐져 있는 손은 ‘어른의 그림자도 밟지 않고 간다‘라는 뜻으로 ‘어린 손자가 어르신과 함께 갈 때 보폭을맞춰서 쉬엄쉬엄 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손자 같은 어린 자와 함께 할 때 쉬엄쉬엄 기다리며 천천히 간다‘고 달리 해석할수도 있다.
‘겸허허는 ‘비다‘, ‘없다‘라는 뜻이다. 말과 마음을 비우고 상대를 대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겸손과 겸허함은 상대적일 수 있다. 겸손의 손자는 겸손, 겸허의 상대성이 잘 나타나 있다. 높은 이가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함께 기다려 주며 보폭을 맞춰 소통하는 ‘겸손함‘이 있고, 아랫사람이 높은 이를 대할 때는 많이 배우려는 자세로 마음을 비우고 소통하는 ‘겸허함‘이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 겸손과 겸허가 상대적으로 표현된다.

한자어로 겸손의 뜻을 풀이했을 때 그 어디에도 자기를 일부러 더 못나게 한다거나, 잘한 것을 감춘다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부러 부정한다는 뜻은 없었다.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겸손과 가식, 그리고 겸손과 비굴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결핍‘이다. 이제 막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성인이 우월감을 느끼진 않는다. 혹은 현대 음악가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어떤 위협을 느꼈을 때, 안정적이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자기만의 보호본능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특정한 분야에서 유일무이하고변화무쌍하게 자기 가능성과 재능을 발휘한다. 그 분야는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재능이 표출되는 방식도 장소와 타이밍에의해 달라지고 세월을 따라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기에,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우월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 모순이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그러나 물고기를 나무에 오르는 능력으로판단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멍청하다고 믿으며 살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자-

음악을 무대에 올리기 전 나는 어떻게 하면 음악을 지극히 전문적이고도 즉각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청중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오로지 내 음악에만 빠져서 혼자만 즐기다 오는공연은 전혀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관객의 시선과 관점으로 바라볼수록 아이디어와추구하는 바가 더욱 선명해진다. 고유의 음악 그대로를 연주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확고하고 완성도가 높으면, 아무리어려운 클래식 음악일지라도 그 감동이 청중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만약 당신이 어떠한 것을 여섯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 그것을 이해하고있지 못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자-

청중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어림짐작하며 눈높이에 맞추려할 필요가 없다. 대중을 상대하는 예술인으로서 그 대중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허상의 수준에 맞추려고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의 수준을 일부러 내려버린다면, 스스로와 청중은 그 자리에만 머물게 된다.
청중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예술인이 제시하는 높이만큼 따라오기 나름이다. 단 조건이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세계가 또렷하고도 분명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설득력과 전달력이 생긴다.

나라는 사람이, 혹은 나의 예술이 어떻게 평가되는지는 그다지중요하지 않다. 내게 붙는 타이틀이나 수식어에 큰 의미를 두지않는다. 그것은 포장지일 뿐이지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예술인이 사회에서 활동하려면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포장에 너무 과한 비중을 두는 순간예술과는 멀어지고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는 위험한 함정으로빠질 수 있다. 아울러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만드는 부류의 마케팅과 미디어에 너무 집착하면서 끌어들인 부귀영화는 예술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의무 앞에서 나태하고 안주하게 만든다. 예술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능이 있다고 안주하지 말자. 재능은 소유물이 아니다. 하늘에 잠시 빌린 것뿐이다.

마케팅이나 수식어, 타이틀의 중요성을 인지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단지 활용할 도구로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좇으면 좋을수록 더 도망가고, 실체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타이틀은 결과적으로 붙는 장식일 뿐이지 원인도 아니고 목표도 될 수 없다. 타이틀을얻게끔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예술, 알맹이다.
그 예술이 탄탄할수록 빛이 나기 마련이고, 빛날수록 타이틀이 저절로 붙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하는 타이틀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알맹이 없는 번지르르하기만 한 껍질을 바라보는 공허한 일이다.

나의 커리어가 타인에게 의존되는 순간 사회성 스킬을 발휘하며 인맥 관리를 해야 하는데, 이는 예술적 재능과는 또 다른영역의 스킬이다. 소속사 안에서의 ‘정치질‘, 공연을 기획하는기관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치질‘을 뚫어야 한다. 즉 기획자,
매니저, 소속사, 각종 단체의 관계자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사교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만의 우주에 몰입해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인이 사회생활까지 동시에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함께 아시아 투어를 했던 로저 노링턴 경은 내게 "체면은 음악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 적 있다. 어떻게 하면 한 예술인으로서 그 신선함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도항상 모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위험에 맞설 용기를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예술인으로서 안전보다는 리스크를, 편안함보다 신선한 영감을 추구할 수있을까.

우리는 흔히 밥값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존재한다는이유 하나만으로 지구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를 누릴 자격이있다고 당당하게 선포한다.
무한함과 영원, 그리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그 권리를 나와다른 이에게 당당하게 허락하겠다.

부모님이 나에게 하셨던 "인간이 돼서 인간 도리를 먼저 하고피아노를 해라"라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피아노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긍정의 빛‘은 사회적 성공이나유명세, 혹은 그 어떠한 부귀영화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하다.
존경받고 존중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떳떳하고도 빛나는과정이 존재해야만 한다. 묵묵히 충실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믿음직스럽게 살면 된다. 그것이 바로 빛나는 과정이다. 성공은 자연스레 오는 결과일 뿐이라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2012년, 영국 로열 앨버트 홀에서 6000명의 청중 앞에서 연주하기 전에 대기하고 있던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청중이 한 명뿐이더라도 수천 명이 있는 듯이 연주하고, 수천명이 있더라도 한 명 앞에서 연주하듯 편안하게 하여라."
몇 년 후, 두 시간이 넘는 바흐의 <평균율> 1권 전곡의 대장정을 고작 대여섯 명 앞에서 펼친 나의 공연을 경청하신 엄마는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현정아.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었구나.
이렇게 소수의 관객 앞에서 넌 마치 6000명이 보고 있는 것과같이 온 영혼을 다해 연주했어."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칭찬 중가장 내 마음을 울린 한마디다.

"모든 인생 다 바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고, 피아노에 모든 꿈과 미래가 달려 있고, 피아노가 인생에 거의 전부인 나한테 만약 사고로 손을 다쳐 더 이상 피아노를 못 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모든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것처럼 사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자존재 전체가 환희에 휩싸이는 인생.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바라볼 때 시작된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진부해진다.

예술에는 어떤 특정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최상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술인의 수만큼 정답이 존재한다. 감정 팔레트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며 ‘이것‘이라고 가슴을 관통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독불장군 같은 뻔뻔함을 정말 동경하고 또 동경한다. 나에게 등대같이 예술의 여정을 밝혀주고 있는 반 고흐의 고백이다.
"이 세상은 나한테 거의 중요하지 않아. 내가 세상에 빚진 것이 있다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30년 동안 이렇게 세상에서 유유자적했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기 위해서는감사하는 마음으로 데생이나 그림 몇 점 정도는 남겨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것이야. 하지만 이 그림들은 이런저런 시류에맞추며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진실한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야."

프랑스어나 영어로 똑같이 ‘perfection‘이라고 쓰는데,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라틴어의 perficio페르피키오까지 올라간다.
perficio ficio는 무엇을 ‘하다‘라는 뜻이고, per는 ‘끝까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perfection은 ‘끝까지 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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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중에 낭독된 독서는 모세가 그곳에서 죽었다라고 맺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왜요?"라고묻지 않았다. "하느님, 모세를 그렇게 고생시키고 왜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신 것인지 말해 주세요"라고도 하지 않았다. 예순이다 되어서 이곳에 왔기에, 떠나오기 전 내가 ‘나는 틀릴 수 있습니다‘라는 걸 아프게 깨닫고 떠나왔기에 얻은 축복이었다. 이보다한 환갑 선물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예순이라는 나이가 실감되었다. 이순(順)이라고 하지 않던가, 귀가 순해진다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행복은 존재한단다.
불을 켜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지.
영화 <해리포터> 중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뭐라고 대답하실까 많이 궁금했다. 나의빈약한 상상력은 성모님께서는 워낙 겸손하시니까 "무슨 소리니,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란다"라든가, 아니면 단순하게 "고맙다", 뭐 이러고 넘어가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으응,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비논리적인 이 구절 하나로 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을 믿어버렸다. 이 단순한 말은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 지어내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말이 아닌가

"전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지요. 큰딸인 나는 학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제가새로 소개받은 어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지요. 거기 사장님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서울 시내에 나가 구경을 시켜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그리고 뜻밖에도 저를 서점에 데려가 책을 사주셨어요. 저에게는 서울이란 온통 고생과 긴창뿐인 도시였는데 아주 뜻밖의 일이었지요. 집에 갈 때가 다 되어서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조심스레 여쭈었어요. ‘제게 왜 이런 걸......‘ 하고요. 사장님께서 웃으시며 제게 자신의 지갑을 열어 돈을 보여주며 대답하셨어요."누군가 너에게 이런 걸 해주라고 이 돈을 주셨단다. 그러니 아무염려 말아라‘

‘그런 좋은 분이 계시다니 믿을 수 없네요‘
저는 그냥 웃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말씀이 이어졌죠.
‘그 사람이 궁금하니? 만일 그렇다면 그게 어디든 네가 가는 길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보거라. 거기 그분이 계시단다.‘

"미안해요. 아시다시피 내가 아들 잃고 요새 정신이 없어 실수를했네요. 누구라도 젊은 아들을 잃고 나면...
나는 그 유명한 분을 안다. 좋은 분이었다. 겸손한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던 그분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당돌한 젊은수녀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왜 자매님 아들은 죽으면 안 되는 거죠?"
다음 날 그분은 수녀원을 나왔다. 괘씸해서가 아니었다. 모욕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깨닫고 치유되어서였다. 그 모진 한마디가 그분이스스로 둘러친 유폐의 벽을 깨부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말했다.
"그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대개 이런 것이 우리의소원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이 없어지고 나면 인간의 손과 발이 뭉개지고 코가 뭉개지며 종국에는 눈도 먼다. 조금도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닫다가 손을 찧어도, 발 위로 무거운 돌이 떨어져도 피하지 않는다.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왜 멀게 되냐면, 눈을 계속 뜨고 있어도 아프지 않기 때문에 깜박이지 않게 되고 깜박이지 않으니까 심한 안구건조증이 오고, 그리하여 각막이 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몇 초마다 작은 소리를 내는 장치를 주어 그때마다 눈을 깜빡이게 하면실명이 방지된다고 했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참으로 중대하고 두려운 일이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은 그의 책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고통이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짧고 멋진 정의를 내렸다. 나는 결혼이 줄 수 없는 것을 결혼에서 바랐고, 사람이 줄 수 없는 사랑을 사람에게 원했던 것 같다. 나중에 신을 다시찾게 되었을 때 내가 원했던 그 사랑의 원형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알고 깜짝 놀랐다. 그걸 인간에게 바랐었다. 우상숭배를 하려 했던것이다.

두 번째로 고통이 주는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야트막한 정상까지 가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거나 책을 하나쓰려고 자리에 앉거나 하면, 말할 것도 없이 고통이 다가온다. 내 한계는 너무도 분명해서 "오늘은 이 밭의 잡초를 다 뽑아야겠다. 뭐,한나절이면 되겠네" 하거나 "이번 달 말까지 원고를 끝낼 수 있을 것같아요" 하는 망상이 깨지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내가고작 이만큼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싶다. 여기서 그 고통을 자기비하로 떨어지지 않게 잘 관리하면, 그것은 곧바로 고통의 세 번째이점인 성숙으로 연결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박탈과 고통의 삶을 살기로결심해서는 안 됩니다.
탄탄하고 오래 지속되는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의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가려고, 종종 우리 자신을 가두는고리를 깨뜨릴 때, 인생은 흥미진진해집니다.
-엠마뉘엘 수녀, 『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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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잠결에 뒤척이는 것, 걷는 것, 눕는 것, 양말 신는것, 의자에 앉는 것, 운전 중에 핸들을 살짝 트는 것조차 그동안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 몸의 잔근육, 온몸의 연결상태를 고통이 비춰준다. 어찌 보면 참으로 복된 고통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치 전과 23범이라도 된 듯이 내가고통의 수갑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찬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동의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오늘 내내 생각했는데, 야뽁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축복해 달라고 떼쓰던 야곱이 나였다. 아마도 곧 나도 환도뼈를 다치고 커다란 축복을 얻겠지.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
이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내게 남았다. 내게 있어서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 혹은 결핍 대신.

원래 저런다, 혹은 원래 그랬다. 참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이 한 문장으로 얼마나 많은 불의와 학대와아픔을 지나쳐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혹은 죽지도 못할 만큼절망에 빠뜨리는 것인지.

그렇구나. 그래서 가끔 하느님이 답답했구나. 전지전능하다면서저 나쁜 놈들에게 벼락도 내리지 않기에 나는 무력한 신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삼갈 일이 많다는 거구나. 아기를 재운 엄마가 아무리 나쁜 놈이 와도 큰 소리로 싸우기를주저하듯이, 함부로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못하는 거구나. 그래서악은 일견 시원해 보이고 사이다 같고 힘이 세 보이는 거였다. 거칠게 없지 않나. 누가 다치든 상처 입든 상관이 없을 테니.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삼가야 할 일이 많고 헤아려줄 일이 많고 그래서 많이 약해 보이는 것이었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동백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는 동백이와 함께 꼬박 하룻밤을 앓았다.

아잔 자야사로 스님은 유창한 태국어로 차분하게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된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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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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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백자기가 상의 언덕에서 노닐다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는데, 그 나무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대를 매어놓아도 그 나무의 그늘은 수레들 모두를 가릴 만했으니까.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이것은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니었던거구나!"
「인간세」

"모든 X의 본질은 Y다"라는•주장과 믿음에 전제되어 있는 ‘모든‘이라는 발상과 ‘본질‘이라는개념, 바로 이것이 장자가 의심하는 표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장자는 우리가 가진 통념을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요? 모든 날개의 본질은 날게 하는 데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이 펭귄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볼까요. 분명 그 사람의 눈에는 펭귄이 날개를제대로 쓰지 못하는 열등한 새로 보일 겁니다. 한마디로 펭귄을우스꽝스럽게 본다는 겁니다. 펭귄은 우스꽝스럽거나 열등한새가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것이 먹이를 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안 되는 남극 대륙에서 날개로 헤엄치는 펭귄은 가장 멋지게 살아가는 조류니까요. 결국 장자의 삐딱한 사유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각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조류를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여 그들에게 가치의 우열을 부가하지 않을 테니까요.
기러기나 독수리는 멋진 새이고 타조나 펭귄은 우스꽝스러운새라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타조만큼 기러기도, 기러기만큼 타조도, 펭귄만큼 독수리도, 독수리만큼 펭귄도 모두당한 삶의 주체니까요.

목재와 인재의 공통성을 생사 여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동성과 부자유에서 찾아야 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만이 그 타인에게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강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예는 현재의임금노동자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나 돈을 주는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다릅니다. 강제로 잡혀 와 주인이 원하는 재능을 강제로 익히는 노예화의 과정은 주인 후보자들이 원하는 재능을 자발적으로 익혀 스스로 자신을 파는 과정과는 구별되니까요. 그렇다고 임금노동자가 노예보다 더 낫지 않냐고 속단하지 마세요. 타율적 복종이든 자율적 복종이든 복종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

양주가 송나라로 갈 때 어느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객사주인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름답고 한명은 못생겼다. 그런데 못생긴 부인은 귀한 대접을 받고, 아름다운 부인은 홀대를 받았다.
양주가 그 이유를 묻자 객사의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
양주는 말했다. "제자들은 명심하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는가!"
「산목」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기보다 남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해서 행동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의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모습과상상한 모습 사이의 괴리도 서글픈 일이지만, 남의 시선과 평판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하니 인간의 삶은 경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니테‘의 의미이고, 이 말이 ‘허영‘이라고번역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끄는 찬양, 즉 ‘영광‘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가장 지혜롭다는 철학자들도 허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 혹은 신에 대해 논쟁할 때조차도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진리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찬양자"를 갖는 데 있으니까요.똑똑하다는 혹은 심오하다는 찬양을 듣고 싶었다는 이야기죠.심지어 철학 책을 읽은 독자들마저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남들의 찬양을 들으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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