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인생이 길어서가 아니라 그들 내면 깊숙이에서 발산된 공간을 넘어서는섬광‘과 ‘시간을 벗어나는 울림 때문일 것이다.(도진순, 3)

예술은 사물이나 인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그 특징의 하나가 클로즈업하는 것입니다. 야생화 한 송이를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 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됩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훌륭한 회화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액자에 넣어 사람들에게 들어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술 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담론, 252

미(美)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앎 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때문입니다. 마치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겨울 추위를 정직하게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한매(寒梅),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황국(黃菊)을 기리는 문화 가 바로 비극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담론,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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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 세월 동안을 시종 자신의 상처 하나 다스리기데 급급하였다면, 그것은 과거 쪽에 너무 많은 것을 할애함으로써 야기된 거대한 상실임이 분명합니다. 세월은 다만 물처럼 애증을 붉게 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동산의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 것 또한 세월의 소이(所以)입니다.
감옥에서 15년 세월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만 급급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면서, 내부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다산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생활과자신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부러웠던 것은, 다산이 생사별리(生死別離)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飛躍)이었다. [사색18, 318] 그 비약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쌓아 가는 덧셈의 누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징역살이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또 징역살이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가 얻을수 없었던 나 자신의 ‘변혁’ 그 실체이었습니다.(사색18,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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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 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 되고 거두어 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 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고성(古城)밑에서 띄우는 글, 사색18, 68)

무기징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들어서는 막막함에 좌절했습니다. 동굴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동굴의 바닥은 어떤지, 그리고 동굴에는 어떤 유령들이 살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우선 이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겠다는 체념이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일체의 망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마치 시체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마음 편했습니다. 시골의 폐가가 소멸해 가는 풍경이 떠올랐습니다.[담론,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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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삶의 비극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신경증적으로과잉보호하듯, 원래는 우리 삶에 보탬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폐해를 입힐 때가 많다. 11탈레브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모두 눈여겨보라는 듯, 책 서두에
시적인 이미지를 하나 실어놓았다. 그 이미지에는 훅 불어오는 바람은 촛불을 꺼뜨리기도 하지만, 불꽃을 더욱 세차게 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는 말이 달려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촛불처럼 되지 말아야 하고, 아울러 우리 아이들도 촛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탈레브의 조언이다. "여러분은 불이 되고 싶은 것이며, 따라서 어서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바라고 있다.12이 단단함의 개념만 머리에 확실히 잡혀도 부모의 과잉보호가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 곧장 드러난다. 리스크와 스트레스 요인들이 삶의 자연스럽고 피치 못할 일부라면,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이 그런 경험 속에서 더욱 성장하고 배워나갈 수 있게 아이들 본연의 능력을 키워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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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변치 않는근본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그래서 하나의 고전을 성전으로 만드는 대신 지적 네크로필리아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양질의 자극을 찾아서 오늘도 역사의 바다로뛰어든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의 근본 문제는 일거에 대답할 수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혈압이나 피부 트러블처럼 평생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인생의 동반자이다. 어제 맛있는케이크를 먹음으로써 인생의 허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았어도, 오늘 다시 배가 고파지면 그 문제는 아직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삶의 여러 국면에서 침묵이 늘 배려의 소산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열네 살』에서 중년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가족을 홀연히 떠나버린다.
남겨진 열네 살 소년은 그로 인해 그 자신 아버지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도대체 치유할 길이 없는, 어떤 상처를입게 된다.

"고전의 지혜가 우리가 현대에 당면한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않는다고? 그렇다면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 문명의 병폐를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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