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 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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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삶이란 변화입니다. 좋은 것이 곧 변화이듯, 나쁜것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무언가로 받아들이려는 이의 태도는 지극히 옳은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잊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만약 그가 다만 한순간이나마 그 곁을, 그 자리를, 그 분위기를, 그것이 일어났던 세계를 온전히 지켰다면, 만약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온전히 그의안에서, 그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그에게는 더는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어떤 중요한것이, 다음의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사물들을 존재로 충만한 상태로 끌어올려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만약 사물들이 우리의 정신을 느낀다면, 그것들은 스스로를 추스를 것이고, 더는 뒤로 물러난 채 있지 않게 될 것이며, 그들이 품고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새로운 것들 안에는 이제 오래된 것 전체가 온전히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달라졌을 뿐인 채로, 그러나 많은 것들이 풍요로워진 상태로말입니다.

다소 과장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새롭게 발전시키며, 우리의 존재를 스치는 모든 영향들의 교차점을 지나며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초심을 일깨우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입니다. 이러한 일깨움을 위해서 커다란 외적인 변화가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언제나 새롭고 또 끝없는 것이 되고자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세계는 곧 창조의 그날과 같아지고, 무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려움과 함께해야만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자 우리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삶속으로 충분히 들어섬으로써, 삶이 짐이 되어 우리 어깨 위에 놓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는 알수 없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가요??
소녀 시절에는 정말로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가요? 그것들이 마치 검고 무거운 머리카락 다발처럼 늘어져서, 당신의 고개를 키다란 슬픔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일이 정말로 없었던가요? 당신이 어른이 된 지금이라고 해서, 이런 것들이 모두 달라졌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어른이 되자마자 삶이 별안간 쉬워졌다고, 명랑하고 경쾌해졌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다만 그들이 삶을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삶을 실제의 현실 안에서 짊어지기를,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느끼며 그것을 채워 가기를 그만두었기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려움을 사랑하는 일이며, 어려움 그 자체와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비로소 친절한 힘들이, 친절한 손들이, 우리를 위해 활동할 수 있게 되며, 그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기쁨을, 행운을, 꿈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우리의 눈앞에 떠오르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귀중한 미소는오직 어려움이 자아내는 어둠 속에서만 그 진실한 의미를 얻게 될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미소는 비로소 깊고도 꿈결 같은 빛을 자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은 한순간에 번지며, 우리 주위에가득한 보물들과 기적들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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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결 얻고 상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사람이므로 일생 동안 수많은 실수를 거치며,
‘성공과 실태, 성취와 좌절을 오갔다.
결국 그들은 모두 좋은 글을 남겼다. 앞으로 걸어갔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글과 말의 힘을믿었다. 불행이나 불운이 반드시 살아서 글을쓰겠다는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했다."

볼프는 신화의 가치를 긍정했다. "신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학에서 문제 삼고있는 그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강요합니다. .…우리는 왜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계속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가?"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해 낸 볼프는 희생양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 의문을 던졌다

이 몸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코린토스의 희생양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묻고 또 물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은 경전(經典)과도 같았다. "네 자매는 고난에 맞서 싸웠고, 서로와 어머니를 사랑했고, 전쟁보다 나은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나는 매년 그 책을 다시 읽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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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 주는 일이 때로는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콜레트도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고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은퇴 후 오드리 헵번은 아프리카에서 구호 활동을 하며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의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전했다. 콜레트의 어깨에 기댄 채 함께 대본을읽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천진스럽고 아름답다. 죽음을예감하며 글쓰기에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던 70대 후반의콜레트와,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받은 유년의 상처를극복하지 못한 채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던 20대 초반의 오드리 헵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을만들 수 있는지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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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그는 『페스트』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리유의 입을 통해 페스트와 전쟁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리석은 짓이니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듯이 페스트같은 재앙이 일어나면 그런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것이 아니므로 비현실적이거나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오만하고 습관적이어서 여전히 모든 것이 전처럼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재앙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한다.

진실이 아니라 사랑이 부조리에서 구원해준다고 믿는다. 그 사랑은 동지애와 우정 같은 좀더 넓은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그는말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사치가 있을 뿐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사치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긴장된 얼굴들, 위협받은 동지애, 인간들 상호 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유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카뮈 자신이 밝힌대로 이방인이 ‘부정‘에 대한 소설이라면 『페스트」는 ‘긍정‘에 대한 소설임을 알고 있다. 카뮈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몸으로 겪으면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깊은 비관적 인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고통을 이겨 낼 수 없고, 고통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어떤 구원의 약속도 얻을 수 없으며, 전쟁이 끝난다 해도 폐허의 비참 속에 버려진채 또 닥쳐올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밀어닥친 도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다. 행복을 향한 욕구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게 되며, 행복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곧 고통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카뮈의 소설 속 분신들은 신뢰와 우정,헌신과 희생을 통해 끝끝내 반항하며 삶의 희망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지킨다. 카뮈 자신의 말대로 우리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요컨대 인간은 매 순간 죽음에 면역되지 않고 죽음의 실상을 의식하며깨어 있어야만 죽음(타나토스)에 대비되는 삶(에로스)을 가장 열렬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에 면역되면 삶의 매 순간에도 또한 무감각해지게 될 터다. 죽음과 고통의 타나토스, 행복과 희망의 에로스, 중요한 것은 부정을 긍정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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