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기만으로 가득하다. 기만은 유전자에서 세포, 개체, 집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일어난다. 기만은 생명의 모든 관계에도침투해 있다. 기생생물과 숙주, 포식자와 먹이, 식물과 동물, 암컷과 수컷, 이웃과 이웃, 부모와 자식, 심지어 한 생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도어뜨린다. 지능은 이처럼 ‘웅장한 공진화 경쟁‘으로 인해 향상되었다.
기만이 작동한다. 트리버스는 "기만은 생명의 아주 심오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속고 속이는 이 기만의 게임은 ‘공共진화‘를 낳았다. 기만 전술이등장하면 곧바로 기만 차단 전술이 나왔다. 남의 둥지에 알을 몰래 넣어 키우는 새(뻐꾸기)와, 둥지 내의 탁란托卵을 가려내 제거하려는 새(찌르레기) 간의 끝없는 경쟁이 그 예다. 둥지 안에 낯선 알이 보이면 그걸알아내 내버리는 능력이 선택되고, 이에 맞서 뻐꾸기는 자기 알을 찌르레기 알과 비슷하게 만든다(의태應), 그러면 찌르레기는 둥지 안의자기 알 개수를 세는 능력을 키우고 원래보다 많으면 둥지 아래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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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적이고 대면하기 힘든 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외로움입니다. 혼자 있게 되는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려고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또 때때로 이런 상태를 떠올리지 않게끔 하는 교묘한 방법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화는 고통을 피하는 데는 가장 세련되었습니다. 그고통에는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고통도포함됩니다. 우리는 시신들이 마치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장사지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마치 있지도 않는 것처럼 묻어버립니다. 이런 무감각 상태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주의를 끌 만한 대상이나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안절부절못합니다. 끝내야 할 프로젝트나 함께 놀러갈 친구, 읽을 책,
텔레비전이나 레코드가 없이 철저히 혼자만 남았을 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즉, 기본적인 인간의 홀로됨을 매우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고 또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느낄까 봐 두려워서 무엇인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거나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게임을 계속할 것입니다. 존 레넌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고통을 느껴라."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이런 생활이 이끄는 피상적인 삶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이렇게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삶이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을 멈추었을 때 대화는 단순한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것이라고는 신문에서 읽거나 이웃에게 들은 소식들뿐이다. 대개 우리와 우리의 동료의 차이점은 그는 신문을 보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반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내면의 삶이 실패한 것에 비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필사적으로 우체통으로 달려간다.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엄청난 편지 왕래에 자부심을 느끼며 편지를 한아름 안고우체통에서 돌아오는 불쌍한 사람은 그만큼 오랫동안 내면의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는 서로 숨기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하며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표현하고 전해야 한다는 그릇된 형태의 솔직함이있습니다. 이 솔직함은 매우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설사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관계를 시들게 하고 피상적이고공허한 관계로 만들어버리거나 많은 경우 아주 따분한 관계로 만들어버립니다. 서로간에 아무런 경계선을 두지 않음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가깝기는 하지만 무미건조한 관계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내면의 성소를 위험스레 내비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교제를 갖기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이기도 합니다. 침묵 끝에 나오지 않은 말은 그 힘을 잃어버리듯이 마음을 닫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여는 것 또한 그 의미를잃어버립니다.

친구 하나가 언젠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는 것을 배우는 것과 철야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새벽을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인간이 된다는 의미일걸세."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고 은근히 바라면서 사람이나 책, 사건, 경험, 프로젝트와 계획에 끊임없이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마취시키는수많은 종류의 수단들을 계속 사용해봅니다. 또 내면의 감수성을민감하게 만들기보다는 기분을 더 좋게 해주는 ‘심리적 마비 상태를 계속 찾아갑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는 점을 스스로에게 일깨울 수는 있으며 또 막다른 길을 병적으로선호하고 있음을 이따금씩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번만이라도 우리가 자신의 혹독한 스승에게 순종하여 우리의 불안한 마음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다음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즉, 슬픔 가운데 기쁨이 있으며, 두려움 가운데 평안이 있고, 탐욕 가운데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며, 또한 참으로 진저리나는 외로움 가운데서 고요한 고독의 시작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네는 자네의 시가 훌륭한 것인지를 묻고 있네. 자네는 내게묻고 있네. 자네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례 물어보았었네. 그 시들을 잡지사에도 보내보았네. 자네 시를 다른 시와 비교도 하고 어떤 편집자들이 자네가 수고하여 지은 시를거절할 때는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네. 그런데 나는 그렇게하지 말기를 바라네. 자네는 외부를 바라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네. 아무도 자네에게 조언을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없네. 아무도 말일세. 길은 오직 하나밖에없다.. 자네 자신을 깊이 살펴보게나.
자네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이유를 탐구하게. 자네 마음 가장깊은 자리에 그것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면 자네는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자신을 시험해보게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해보게, 한밤중 가장고요한 시간에 일어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게나. ‘내가반드시 시를 써야만 하는가‘ 라고 말일세. 자신을 깊이 파고들어가 깊은 대답을 얻어내게나. 그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만약이런 진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강하고 단순하며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이라면 그 필연적인 요구에 따라 살아가게나. 자네의 가장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도 반드시 이런 강한 추진력의표시요, 그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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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현존은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서, 서로 동참하는 관계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마음은 본디 보고 맛보고 사랑하기보다판단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벌거벗은 지금에 현존하거나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은 일거리를 원하고 사물을 가공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게임을 멈추는 열쇠는 아주 간단하다. 침묵 또는 그냥 가만히 있음이다. 토머스 키팅 신부가 지혜롭게 보았듯이, 침묵만이 하느님의 첫째가는 언어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서투른 번역"일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실질적 차원에서 침묵과 ‘하느님’은 동시적으로, 차라리 동일한 것으로 경험될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더 깊은 침묵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지난 5백 년 동안 말로써 말이 많았던 종교는 이 비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고, 결국 침묵 자체를 겁내게 된 것 같다. 그래서는 말할 것도, 증명할 것도, 생각할 것도, 방어할 것도 없는 광야40일 속으로 예수를 따라서 들어갈 수 없다.

‘마음의 평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 없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참 평안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이 참 평안을 누린다면 당신은 마음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어느 쪽 말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지 말고,
그냥 정직하게 당신 자신을 관찰하라. 그때 당신은 알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 일것이다.

마르타는 모든 일을 아주 잘했고 제대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여기에 있지를 못했다. ‘현존을 못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자신의 억울한 느낌에, 어쩌면 자신의 순교자 콤플렉스에, 남에게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욕구에 깨어있지 못했다.
일종의 선하지 못한 선행이다!

자기에게 깨어있지 않으면 손님에게 깨어있을 수 없고, 하느님께도 깨어있을 수 없다. 현존이란 현재에 존재함이다. 다시 말해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현존하느냐가 곧 모든일을 어떻게 하느냐다. 예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마르타에게도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적 차원에서 어떠하냐를 반영하기때문이다. 일상에 신적 차원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마르타가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이었다.

"사랑과 아픔만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과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
마르타가 더 훌륭한 마르타가 되는 것으로는그 자리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겪는마르타의 분주함, 좌절, 서툰 짓,
헛된 시도들이 마침내 마리아로 바뀔 실마리가 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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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숙의 잣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 나아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을 가중시키기그런 남편보다 백배는 더 성숙하다고 할 수부로 결정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성숙해지고, 겉만 어른이던 사람도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의 과정을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작아지는것을, 혹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이 돌아간다는 감정적 천동설에서 벗어나 자기만큼이나 타인도 고통에 아파한다는 감정적 지동설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인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성숙한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일체개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 일체의 것들에게 잔인하게 굴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려는 마음을 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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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는 여러모로 싯다르타의 통찰을 따르고 있다. 타타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결국 무언가를 파괴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의 말대로 ‘폭력의 종류‘ 혹은 ‘폭력의 정도‘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달리말하면,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 중에서최소의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 중 최소의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메를로-퐁티의 윤리다. 최대의 폭력과 최소의 폭력 중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다.
이제야 새벽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법고 소리와 정갈한 공양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싯다르타 이래 부처가 되고자 했던 모든 스님들은 최소 폭력을 선택해야 한다는 고뇌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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