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품절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11쪽

다만 우리는 애초에 우리 앞으로 결정지어진 것들이 아닌, 우리의 것들을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19쪽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 데 갇혀 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인생―과 시간 자체―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상황을 막론하고 이미 시작돼버렸음을, 그래서 얼마간 득을 봤고, 또 얼마간 손해를 감수했음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다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다른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21쪽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23쪽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불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이나,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31쪽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34쪽

우리는 에이드리언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그의 인증을 받고 싶었다. 그의 환심을 사려 했고, 괜찮은 얘깃거리가 있으면 그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았다. 각자가 그와 가장 친하다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에이드리언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여전히 우리 셋이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그가 우리에게 기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그저 우리가 그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였을까? -38쪽

나는 한순간도 그녀가 책들을 다 읽진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소장가치가 있는 책일까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과 성격의 유기적인 연장선인 듯 여겨졌다. 반면에 나의 책들은 나와는 기능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내가 장차 본받으려는 특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46쪽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나는 대부분을 착각했다. 예를 들어, 무슨 근거로 베로니카가 처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에게 물어본 적도, 그녀가 내게 이야기해준 적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녀가 나랑 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존재한단 말인가.-49쪽

우리의 티타임은 끝이 났다. 나는 남은 케이크 두 조각을 싸서 비스킷 깡통에 넣었다. 베로니카는 내 입가에, 그다음엔 중앙에, 마지막으로 왼쪽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우리 관계의 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랬던 것처럼 만들어버리기 위해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그래서 비난을 면해보려는 걸까.-65쪽

나 혼자 강둑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이 내게 가져다준 느낌을 나는 지금도 적절히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내가 그것들을 직접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토네이도 같지도, 지진 같지도 않았다. 자연이 난폭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본문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67쪽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쪽

나는 아무것도 기대할 입장이 못 됐다. 전 여자친구를 칭찬하는 말 같은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상황을 막론하고 내가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그래서 묘한 거짓말을 한 나를 마거릿이 용서해주길 바랐다. 그녀는 그렇게 해주었다.-123쪽

어느새 나는 내 인생과 에이드리언의 인생을 비교하고 있었다.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에 대해, 자살을 감행한 정신적, 육체적 용기에 대해.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한 것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아는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153쪽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162쪽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165쪽

나는 에이드리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명철한 시각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호강에 받들려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사춘기를 허우적대며 우리의 타성적 불만이 인간 조건에 대한 본원적 반응이라 믿는 동안, 에이드리언은 이미 거기에서 벗어나 멀리, 넓게 앞을 조망하고 있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도―애써 살아봤자 보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마저도,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남들리 명징하게 받아들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저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173쪽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몇 년 전 영국의 자동차 운전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설문에 참여한 운전자 구십오 퍼센트가 스스로 '평균 수준보다 양호한' 운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마음은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쳐 울려퍼졌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174쪽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179쪽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187쪽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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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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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코즈는 힘을 합쳐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써나가는 관계였다.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더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녀를 이끌어주었던 음악과,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친구들로 이루어진 인맥과, 커다란 신문지에 휘갈겨 써서 당시 살던 아파트 벽에 붙여놓았던 일련의 목표들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18쪽

코즈는 몇 번이나 배관공을 사샤의 아버지와 관련지으려 했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사라져버린 아버지였다. 사샤는 그런 논리에 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기억 안 나는데요.”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건 코즈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 그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구원의 이야기를, 새 출발과 두번째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코즈가 말한 방향으로 가면 얻을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20쪽

알렉스와 함께 서 있던 순간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은 코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물건들에서 취했던 자존감을, 그것들을 훔쳤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에 오히려 고조되던 애정을. 그녀는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물이 여기 있는 것이었다. 그녀 삶의 원초적이고 뒤틀린 핵심.-31쪽

정적이 흘렀고, 그동안 사샤는 뒤에 있는 코즈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를 기쁘게 해줄 만한 대답이 간절했다. 가령 그게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모든 게 전과 다르게 느껴져요, 라든가 리지한테 전화를 했고 마침내 화해했어요, 라든가 다시 하프를 연습해봤어요, 라든가 하다못해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구원, 변모―맙소사, 그녀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인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35쪽

멘토로 삼았던 루 클라인이 기억났다. LA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였다. 집 안에는 폭포가 있었고, 루가 늘 대동하고 다니는 어여쁜 여자들이 있었고, 앞마당에 그가 수집하는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 베니는 자신의 우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당신, 맛이 갔군. 향수에 잠기면 끝장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루는 뇌졸중이 온 후 전신 마비로 고생하다가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64쪽

“말도 안 돼요, 베니. 우린 서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잖아요.” -66쪽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연다, 나한테 얘기했었어야지.
무슨 얘기? 조슬린이 묻는데, 정작 나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90쪽

이제 그는 소리내어 웃는다, 진짜 웃는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루와 내가 친구임을 깨닫는다. 비록 내가 그를 미워할지라도. 사실 그가 밉다.-94쪽

얼마간 그녀는 아무 낙이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울어대는 딸들에게 시달리면서 그녀는 이 아프리카 여행이 아직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고 자유롭고 걸림돌이 없었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며 간절히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의미 없이, 부질없이 앨버트를 그리면서 때만 되면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3호실로 찾아갔을 때 그가 반농담조로 제안한 대로 함께 도망쳤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념에 잠길 것이다. 물론, 훗날 그녀는 ‘앨버트’가 자신의 철없음과 참담한 선택에 대한 회한이 투영된 초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29쪽

끝났어. 모든 게 지나가버렸어, 나만 빼놓고. 그 시절 나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걸 잊은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재미있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걸까?-135쪽

그리고 롤프의 작은 침실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줄무늬 그림자 사이로 슬며시 비쳐들어온 햇빛 아래서 나는 처음인 양 굴었다. 롤프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내가 여전히 평범할 수 있다고 느꼈다.-139쪽

그들은 젊었고 운이 좋았고 강했다―그들이 걱정할 게 뭐가 있었겠는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201쪽

가슴을 치는 후회가 너무도 커서 처음엔 도무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샤에게 매달렸더라면 너는 그때 바로 정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신이 네게 던져준 단 한 번의 기회를 포기했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다. -287쪽

“누구나 살아남는 건 아냐. 하지만 우린 살아남았어. 그렇지?”
“그래.”
그녀는 네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네 몸 구석구석이 그녀와 맞닿았다. 그녀가 드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많은 밤에 그랬던 것처럼. 사샤의 강인함이 네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그녀를 안으려고 했지만, 손이 박제된 동물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은 이제 두 번 다시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이야,” 사샤가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약속하는 거지, 보비?”-294쪽

테드는 멀찍이서 그 모든 것이 차츰 사샤 본인의 속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을 경악하며 비켜봐왔다. 테드는 미시건 호에 있는 베스와 앤디 부부의 집에서 보냈던 여름엔 사샤가 사랑스럽고, 심지어 요염하기까지 한 꼬마였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후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에 가끔 보면 조카는 죽상을 한 아이가 되어 있었고, 테드는 행여 자기 자식들이 스스로를 제물로 던지는 조카에게 물들까봐 같이 못 놀게 했다. 사샤와는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애는 가망이 없었다. -311쪽

그는 조카의 어린 자식들이 사방에 던져놓은 잡동사니를 헤치며 거실로 들어가, 유리 미닫이문을 통해 서부의 태양이 발하는 광휘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잠시 나폴리를 떠올릴 것이다. 사샤의 작은 방에 앉아 있던 때를. 마침내 해가 창문 한가운데까지 기울어 그녀가 매달아둔 철사 원형 고리에 담기는 것을 본 순간 불현듯 맛보았던 놀라움과 기쁨을.
지금 그는 조카딸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타오르는 듯했다.
“봤죠?” 사샤가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 거예요.”-340쪽

알렉스는 상상했다. 그녀의 아파트로 걸어들어가 발견하는,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젊은 시절의 그 자신, 무궁한 계획과 드높은 기준을 품었고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의 자신을. 그 환상이 그에게 위태롭게 내달리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버저를 눌렀다. 몇 초가 지나자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상실감을 느꼈다. 한바탕 정신없던 무언극이 허물어지더니 사라져버렸다.-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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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품절


기억력이 희미해져가는 인간은 얼마나 순수하고 맑아지는 것인가.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곰곰 그런 생각이 든다. 멋을 부리거나 뻣대는 것, 욕망과 원망에서 해방된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한없이 상냥하다. "많이 힘드시죠?"라고 주위 사람들이 동정을 표하지만, 어머니랑 살면서 내가 얻게 된 마음의 평온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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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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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그자 앞에서 떠오르는 나쁜 기억들에 매번 패배당해,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치 기억에 두들겨맞아 녹초가 된 것처럼 지치곤 했다. 나쁜 기억은 쉽게 일어나 쉽게 삶을 침범했고, 며칠 동안 썩은 내를 풍기나 가라앉았다. 몇 달 동안 그러했다. 그자는 삶에서 불필요한 기억들은 편리하게 도려내 오래전 삶을 회복한 듯했다. 그자의 아들, 기환은 대학생이었다. 올봄이 되어서야 그자를 바라보는 일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것이 그자의 가정불화―사고를 치고 온 아들을 두들겨패는 그자를 몇 번 본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치졸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은 그 이후였다.-29쪽

시선은 결국 원했던 것이 고발이 아니라 바다였음을 인정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그자를 고발하지 않고 바다에 갈 수 없었다. 삼 년 전 박선명을 다시 발견한 뒤, 한창 그자를 추적할 때는 그 일을 일컬어 시간을 매듭짓는 일이라 불렀다. 봄볕 아래에서 그자를 만났을 때, 그자는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자는 그 시간―창호가 죽은 뒤 새로이 탄생한 그 시간에서 벗어나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자를 그 시간 속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리고 매듭짓고 싶었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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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차가운 손>은 온몸으로 쓴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조각을 시작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손에서 시작하여 다른 부위, 곧 전신으로 확장되는―을 석고로 떠내는 라이프캐스팅을 하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화자는, 그리고 작가는 성실하게 몸을 움직이고 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양감과 질감, 촉감을 추적한다. 육감적肉感的이라는 말은 이런 작품을 가리키기 위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점이 이 작품을 <가면의 고백>이나 <인간 실격>, 혹은 <새의 선물>보다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진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와 <그대의 차가운 손>은 짝패와 같은 작품이다. 모두 미술을 하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이 등장하며,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제시되고 남겨진 이가 지난 시간을 추적하며 그것을 풀어나가는 설정, 조용하고 은밀한 속삭임이 내장까지 토해낼 듯한 절규로 확장되는 전개 등 유사한 부분이 많게 느껴진다. 세부적인 부분을 생각할수록 더 그렇다. 작품 속의 미술가들은 한 작품에서는 먹墨, 다른 하나는 석고라는, 흑백의 명도만 남은 소재들로 작업을 한다. 그리고 둘의 작업 모두 '물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화선지에 가볍게 스미는 먹조차, 그의 소설 안에서는 물 분자가 시간을 들여 힘껏 밀어내야 할, 양감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8년이라는 시간차 만큼의 차이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기교를 줄이고 문법에 충실하게, 그러니까 내면에 불덩이를 숨긴 모범생이 성실하게 쓴 작품이라면, <바람이 분다, 가라>는 그가 조금 더 날렵하게, 세련되고 치밀한 방식을 터득한 이후에 썼다는 느낌이 든다. 작업이 끝나면 땀과 석고로 엉망이 되는 장운형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먹을 밀어내는 물 분자의 기척을 조용히 느끼는 삼촌으로. 무엇보다 두 작품 모두 표지가, 아주, 좋다. 표지까지가 소설의 내용과 함께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이십대 전반에 나를 지배했던 이가 신경숙이었다면, 후반은 아마도, 한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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