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 다이닝 바통 2
최은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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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요리라는 행위는 ‘계속 살아가겠다‘라는 나 자신과의 약속일 때가 많다.
바쁘고 지쳤지만 굳이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주방에 설 때. 재료를 손질하고, 냄비와 프라이팬에 쓸어 넣고, 불을 켜고, 중간중간 레시피를 확인하고, 시간을 재가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때.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마음과 시간을 들여 그 일련의 과정을 해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주저앉아버리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죽음에 맞서고 있다고 느낀다. 온갖 맥 빠지는 일들, 좌절, 실패, 낮아진 자존감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일을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6. 윤이형, 기획의 말)

수영아.
난 그날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그 일을 겪은 많은 동료들이 우리를 떠났고, 떠나고 있어. 네가 나보고 그냥 떠나버리라고 말했을 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해?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
아니야,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돼. 떠나도 돼. 피해도 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폭언을 듣고 조롱을 당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아도 돼. 너에게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 투쟁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몸은 고되고 피곤할지 몰라도 정신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나는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아. (29, 최은영, <선택>)

승혜는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이 음식을 만들었다. 그건 혼자서, 혹은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은 아닌 듯했다. 최소한 세 사람용이었다. 그래야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쓸쓸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만 만들어 먹는 음식 같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두 사람만의 골방에 너무 오래 머물러 변색되지 건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이리 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 가져달라고 자랑스레 선언할 수 있는 사람들만. 그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지도 못할 만큼 너무 당연하게 그럴 수 있는 사람들만. (72-73, 운이형, <승혜와 미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승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감미롭게 허공을 울렸는지를 기억했다. 미오 때문에 전 연인을 떠나면서,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날 이후 왜곡된 소문이 퍼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을 잃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더 이상 정직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몹시 편리하게 책임을 방기해버리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었다. 그러나 승혜에게는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 이전에,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하는 칼질 같은 말이기도 했다. (74, 윤이형, <승혜와 미오>)

‘나는 상처가 났어, 너한테 그걸 보여주고 싶어, 그런데 낫기는 싫어, 다만 네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랄 뿐이야‘ (79, 윤이형, <승혜와 미오>)

다 사장, 이 노란 등 밑에서 이릏게 커피 맹그는 게 바다에서도 보이는디 그게 글케 따땃하게 보일 수가 없었으. 물질 허다 보믄 여기 불빛이 꼭 오징어 배 같아 보이는디 사람들이 막 오징어 떼만치로 몰려오고 가는 게 보일 정도였으. 내가 눈은 좋아서 누가 오가는지도 다 봤당께는. 아덜 감옥소 간 뒤로 이 존 눈으로 눈치만 보고 살았어야. 긍께 자꾸자꾸 눈이 더 조아져부렀어. 여그 다 사장을 내가 많이 훔쳐봤당께. (122, 이은선, <커피 다비드>)

고마웠소. 노란 불빛만으로도 내 마음 다잡고 물질하러 들어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오. 사람이 홀로 고독허믄 이런 불로도 마음을 뎁히고 그러고 사는 거시제라. 내 그리 살았소. 꼭 우리 아덜 같어서 볼 때마다 맘이 그렇게나 조트라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소. 거시기 전복 이빨은 꼭 짤라내야 해. 안 그럼 속 긁어. 안다고라? 오메, 똑똑한 그. (122, 이은선, <커피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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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고 다녀와 - 켄 로치에게 활자에 잠긴 시
김현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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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부모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 다 큰 자식이 낼모레면 마흔.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고, 번듯한 집도, 근사한 차도 없으니. 허나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단 한 번도 직접 말한 적이 없지만.
엄마의 삶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 삶도요. (16)

집단 퇴사 후 동료들은 ‘그땐 그랬지‘라는 시간이 아니라 모두 현재를 살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모두 일하며 산다. 많은 이에게 노동은 향수가 될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사측의 부당 해고 통지에 대항해 울먹이며 "이곳이 제 삶의 터"라고 말하던 동료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장난스럽게 그 울먹임을 놀리곤 하지만, 아직도 그때 동료에게서 들었던 그 육성이 나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26-27)

나는 사랑이 끝끝내 이기는 영화에 더는 끌리지 않는다. 지금은 사랑이 끝끝내 이긴다고 해주는 영화에 더 혹한다. 비록 지더라도. 비록 지고 있는 동안에 중단될지라도. 마찬가지로 나는 선의가 이기는 영화보다는 선의가 이긴다고 해주는 영화가 더 좋다. (35)

우리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언제나 생활이 앞장선다. 문학-하는 자라고 해서 뭐 특별히 다른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다른 생활을 해야만 문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의 됨됨이란 생활 속에서 성장하거나 퇴화한다는 것. (45)

언제나 독서하는 생활에 관해 쓰고 싶다.
시집 몇 권 읽는 일조차 쉽지 않은 때다. 그러나 여전히 쓰는 사람이 있고, 그러니 계속해서 읽는 사람이 필요하다. 읽는 사람만이 결국 문학의 증인이 될 수 있다. 모든 문학은 각자의 생활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남녀노소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생활의 신파 속에 함몰되어서는 안 될 인간의 성장에 관하여. 인간의 성장 속에 함구되어서는 안 될 생활의 퇴화에 관하여. 우리가 다시 발견해야 할 것과 우리가 새로이 발명해야 할 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하면서. 문학은 결국 읽은 사람에게만 물음을 남긴다. 문학은 생활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은 그 패배에서 승리를 맛본다. (48-49)

연대란 나만큼 너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못하는 만큼 내가 한다는 것이리라. (80-81)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 망가져갈 것이다. 부모들은 대개 자식과 상관없는 삶을 전혀 예상하지 않지만, 자식들은 종종 부모와 상관없는 삶을 예상하기도 한다. 이 두 삶의 틈새가 클수록 부모들은 위협감을 느끼지만, 자식들은 안전해질 수 있다. (98)

나도 잘 배워서 일하고 싶었고 배우지 않은 걸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사무원이 되고 싶었다. 직장동료의 힘이란 역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마음먹게 해준다는 것. 수습사원이란 사무를 배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곁에 있는 동료를 배우는 사람이다. 이제는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출퇴근을 글로 배운 시절에도 역시나 가장 동료의 출퇴근을 걱정했었던 것 같다. 하루쯤 동료를 대신해 야간을 해줄 수도 있으리라 마음먹기도 하는. 수습의 기간이란 역시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나보다 먼저 수습사원이었을 이들에게 고마워할 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초보 사무원 딱지를 떼게 되는 건 아닐까. (106)

아마 하루 두 끼를 먹지 못했더라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두 번 밥상머리에 앉지 않았다면 나는 연대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한 번 잠을 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예술에 침을 뱉었을 것이다.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시는 무슨,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시 한 편으로 단돈 3만원을 버는 사람으로서 자랑스럽다. 글로 전세금을 모아보겠다는 사람을 존중하고 싶다. (108-109)

사과는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하고 나서 되어야 하는 거다. 사과하면 장땡이냐는 말은 사과를 받는 사람의 소갈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나 사과하는 사람의 소갈머리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115)

그때 친하게 어울려 지내던 다른 친구들과는 모두 소원해졌다. 내 탓이다. 우정은 늘 단단한 것이라고 믿었다. 누군가와 관계 맺으려는 이기적인 열망이 때로는 다른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는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어렸다고 밖에. 아쉬운 일이다. 지금까지 그 친구들과 어울렸다면 나는 한결 더 풍요롭고 어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145)

가끔은 누나들이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하루를 지냈으면 하고 바랐다. 세상을 구하려고도 하지 말고, 미래를 짊어지고 갈 사람들을 키우지도 말고, 어떨 때 어떤 마음을 써야 하는지 동생들에게 알려주려 하지도 말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난분분히 꽃잎은 흩날리고 고양이와 옥상과 잠뿐인 평온함 속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어 인생이라는 회전목마를 타고 즐거워하길. 때론 기쁜 우수에 젖으면서. (156)

아마도 나는 이번 생에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부모가 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지 않다. 부모가 되지 못하는 삶은 다만, 자식이 없는 삶에 지나지 않으며 그건 자식 때문에 기쁘거나 슬플 일이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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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1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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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_제럴드 하워드,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1)

데이비드 리비트는 소설 <두루미의 잃어버린 언어>에서 이상적인 편집자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하고 수도실의 수도승처럼 좁은 방에 온종일 앉아 마치 참회하는 자와 같이 엄격하게 글을 읽어내려가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_제럴드 그로스,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39)

"사실, 편집자로서 진짜 걱정은 이거예요. 제 욕망이 편협해요. 욕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전 직장인이고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어야 하는데, 제가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닌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한마디로 욕망이 대중적이지 않은 거죠. 작년에 <출판천재 간키 하루오>라는 책을 읽었어요. 자서전인데, 간키 하루오가 베스트셀러를 많이 낸 편집자 출신 출판사 대표예요. 자기가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서 ‘나는 욕망이 다른 사람과 같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내 콤플렉스를 보완하고 싶은 욕구를 담아 책을 만들면 다들 산다‘라고 그래요. 이걸 읽고 나니까, 아! 내가 이게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제 욕망은 귀촌 같은 것에 닿아 있고(그는 출판사 입사 전 1년 동안 귀촌 실험을 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라왔고, 남자고, 이성애자고, 크게 소외받을 일 없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데다 부모님은 제 야망을 키우기보다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잘 만족하는 삶의 미덕을 늘 설파하셨죠. 필연적으로 욕구 자체가 잘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140)

"이윤 추구가 1번이에요. (웃음) 다른 사람들 욕망에 충실한 자기계발서 같은 책도 내보고, 또 제가 가진 가치나 정서와 묘한 어긋남이 있는 저자라도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저자라면 같이 책을 내보고 싶어요. 큰돈을 벌어들일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기보다는 손해 안 보는 책, 회사에 적절한 이윤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고요. 책이 팔려야 저 스스로도 일을 제대로 잘해낸 것 같은 생각에 뿌듯하고, 또 회사에서 직원들이 제대로 급여받고, 복지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 대표나 관리자들 말투와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회사 분위기까지 서늘해지고, 노동은 더 고되어지고. 원하는 책, 정말 만들고 싶은 책을 낼 기회도 축소되니까 이윤 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143)

"이런 요구가 나오는 건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워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확실한 생각이 없다면 알아서 해주세요, 하면 좋겠어요. 뭘 원하는지 분명하지도 않고 디자이너를 믿지도 않고. 그럴 땐 뿌연 과녁을 맞히는 느낌이 들어요. 가끔 ‘사장님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해요. 그러면 인터넷 서점에서 그 출판사가 낸 책을 훑어보면서 감을 잡조. 가장 어려운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게 느껴지는 경우예요. 상대를 믿고 가느냐, 상대를 평가하는 자리에 본인은 세워놓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져요. 그리고 시안을 보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게 좋아요. 재시안이야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편집자가 책에 대한 콘셉트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어 있을 때는 디자이너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174-175)

"제작 기한 맞추는 일은 인간관계가 좌지우지해요. 인쇄소, 제본소와의 관계가 중요하죠. 종이부터 확보하고 인쇄소에서 수정을 얼만큼 빨리 해주느냐가 관건이에요. 일정이 급해서 친분으로 먼저 요청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제작자는 편집자나 디자이너와 달리 이직이 드물어요. 보통의 제작자들이 한 회사에서 5년, 길게는 20년, 30년도 일해요. 새로운 걸 개발하는 부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걸 잘 활용하는 부서라 그런 거 같아요." (196)

"유럽은 농도계가 있어서 측정한 농도가 허용 범위 안이면 잘 나온 인쇄물로 판단해요. 국내에는 농도계로 재서 이 색깔은 몇 프로, 이 정도면 오케이 하는 스탠더드가 없어요. 디자이너든 편집자든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하죠. 진한 색을 좋아하는 분은 진했으면 하고, 흐린 색을 좋아하는 분은 흐리면 잘 나왔다고 하고. 주관적인 부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똑같은 기계에 똑같은 인쇄를 해도, 잘한다 못한다 다르게 생각하죠. 그 부분이 아쉬워서, 코리아 스탠더드 색깔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더라고요. 인쇄소나 제본소에서 일하는 기장님들도 교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2교대로 일하는 이분들이 교육받으러 나가면 기계가 멈춰요. 교육은 힘들겠구나 생각하죠." (202)

그가 제일 일하기 힘든 편집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마케팅 방향과 아이디어가 편집자와의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검토서, 콘셉트 회의 자료, 보도자료 등 텍스트 자료는 많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대화 끝에 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집자가 말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가끔 책 출간과 동시에 탈진되는 편집자들이 있다. 책이 사고 없이 잘 출간되는 게 중요하니까 전력을 다 쏟고 방전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마케팅은 출간 이후부터 시작된다. 편집자와 함께 만들어야 할 콘텐츠가 줄줄이 남아 있다. "100퍼센트 힘을 다 쓰지 말고 마케팅팀과 함께할 10퍼센트는 남겨주길 부탁합니다." (233)

박태근은 출판예비학교 1기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냐 취업이냐의 기로에서 일을 택했다. 그가 볼 때 회사는 하나같이 뭘 파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걸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책이었다. 구매 경험도, 사용 경험도 가장 많았다. (248)

출판사는 그날 귀한 발걸음을 하고 갔고 그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만났지만 그중에 20종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알아서 개척해야 할 책이다. (262)

일을 하다 보면 본인이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책이 출판사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럴 때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편하게 내려두고, 그 책이 나와야 될 이유나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책이 나온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편하고 후련하겠지만 그 책은 쉽게 말하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책이다. (265)

"1인출판사나 출판계 종사자를 다루는 방식이, 뭔가 전체 세계에서 특이한 지형에 있는 사람들, 약간의 독립군, 불리한 위세에서 돌파해내는 무엇처럼 묘사되는 거, 저는 별로거든요. 서점에 가면 제 책이 문학동네 책이랑 똑같이 경쟁을 하잖아요. 불리할 것도 없고 유리할 것도 없죠. 그런데 불리함을 기본 설정값으로 해봐야 정신 건강에 도움이 안 돼요. 저는 큰 데만큼은 잘 못 팝니다만 하실래요? 그래요. 웬만한 사람들은 출판 업계가 불황인 거 다 아니까. 나의 책을 딛고 가라, 얘기하는 거죠." (328-329)

가끔 저자들이 본인의 책이 코난북스에 어울리는가 묻기도 하는데 그런 반응을 보일 때 이렇게 응수한다. "당신 책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당신이 시그니처다." "당신의 책이 코난북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이 될 것이다." "코난북스에서 드디어 탈피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331)

1인출판사라고 해서 억울함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말자. 업계에서 특별히 선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악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다. 지업사가 나한테만 나쁜 종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가 나한테만 나쁜 표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서점도 마찬가지다. 1인출판사라도 책이 좋으면 올려주고 아니면 말고다. 코난북스는 규모에 비해서 온라인 서점 노출이나 언론 기사를 잘 받는 편이었는데, 이를 경험하면서 ‘출판계는 놀라울 정도로 악의도 선의도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39)

"이젠 하루에 책이 50부 나가면 내일은 안 나가겠네 해요. 일부러 감정을 잠재웠어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침착한 상태. 혼자 일하다 보면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는데 직작 생활 할 때 내부 정치나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거 때문에 힘들었어요. 지금은 가끔 업계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요즘은 뭐가 잘 나가?‘ ‘부자 됐겠다!‘ 순수하게 일 얘기만 하거든요. 일에 가까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340)

"좀 위악적으로 말해서 저는 1인출판사인지 모르는 출판사가 좋은 출판사라고 얘기해요. 특히 제가 만드는 교양, 사회과학 인문서 분야에서는 더 그렇죠. 돌베개 책보다 예쁘게 잘 만들면 되는 거예요. 작년에 1인출판사 선배를 만나서, 잘되시죠? 그랬더니 잘 안 돼, 근데 남들이 잘된다고 그래,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남들이 볼 때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처음에 이 인터뷰 못 하겠다고 한 게, 남루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독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냥 잘 만드는 출판사에서 만든 책으로 평바다는 거지, 1인출판사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응원해지 위해서 책을 산다는 건 별로예요. 1인출판사를 스스로 마이너리티화하고 싶지 않아요. 각자 자영업자로서, 생계 면에서, 경영 부분에서 본받을 만한 게 있는지, 공감할 만한 게 있는지, 저를 포함해서 1인출판사가 그걸 잘 보여주면 좋겠어요."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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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일러스트를 보고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먼저 모모의 생김새가 상상과 달라서. <자기 앞의 생>을 맨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어릴 때였고,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프랑스 사람=흰 피부+금발이었으니까. 심지어 아랍인인 모모가 백인들에게 차별받는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수시로 나오는데도 무지했던 청소년은 다른 모습의 프랑스 사람을 상상하지 못했고, 그 첫 감각이 아주 오래오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 . . 게다가 이 작가가 포착한 모모의 모습은 귀엽게 웃고 있는 순간(으레 아이 캐릭터에 기대하게 되는)이라고는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거나, 일부러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화가 나서 눈썹을 한껏 올리고 있는 모습들.


두번째로 놀란 건 로자 아줌마가 예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도 어리석고 어린 자의 편견 때문인데, 여러 매체를 통해 보아오던 주인공, 특히 착한 사람은 너무도 그린 듯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 심지어 병에 걸려 죽어갈 때조차 예뻐! 하지만 이 작가는 로자 아줌마를 미화하지 않았고, 어린 모모도 우리도 가장 직시하기 힘든 모습까지 에두르지 않고 표현한다. 거기 새삼 놀라는 내가 아주아주아주 부끄러워질 만큼.


이 책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하밀 할아버지, 롤라 아줌마, 은다 씨, 왈룸바 씨까지 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아름답게'만 그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들에게 등을 돌린 세상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소외시키는 일일 테니까. 그럼에도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건, 그림에 담긴 작가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는 아주 차가운 세상이지만 노란빛의 수채화로 채운 배경이 꼭 이들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같았다.


다들 모모를, 로자 아줌마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을지. 나의 모모는 이렇지 않았지만, 이게 진짜 모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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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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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19)

여성 문제 전문가, 아니 ‘문제 여성‘ 진단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 땅의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조선 시대에 비하면 여자들 사는 게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인간(남자)의 삶이 중세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더는 투쟁하거나 진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다.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2010년대 여성의 지위는 2010년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되며,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되지 않고 노동 계급 남성과 비교된다. (65)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 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현재 나의 감정, 고통, 기쁨, 슬픔, 지식, 업적…… 이 모든 것들은 곧 과거의 것이 된다. 그리고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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