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2017년은 책을 참 잘 읽었다. 2010년 들어 처음이라 할 수 있는데, 권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책들을 골라 침대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 정말 아늑했던 기억. 야 이거 정말 쌈박하네 싶은 책도 있고, 멋있는 이야기도, 귀여운 목소리도 있고, 왜 이렇게 인기일까 갸웃거리게 되는 책도, 기대를 실망시킨 책도 당연히 있었다. 그렇다면 <기이한 자매들>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이야기였다고 하면 정확할까.


주인공 세 자매는 모두 서른 안팎이다. 이대로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할 때 온다는 그 서른. 성인이 되어 제각기 성격대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래서 지금 각자 안고 있는 고민도 다르지만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과거는 무수한 실패로 점철되었고, 미래는 빈약한 가능성뿐이라는 것. 이런 게 인생이라고 체념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첫째 로즈의 낙관적인 애인의 말, 그러니까 사람이란 변할 수 있다는 말을 누구보다 믿고 싶지만 결코 믿지 못하는 세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는 어느 상담실에서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던 내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요, 저는 변하지 못할 거예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과연 그때와 같은 인간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코어에 있는 무언가는 결코 변하지 않겠지만 어떤 부분은 나도 모르는 사이 변해 있었고, 또 노력으로 바뀐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 자매 역시 그렇다. 드라마틱한 변화의 가능성을 섣불리 긍정하지도 않지만, '이대로 살다 죽자 난 별수 없어 엉엉'하고 구렁텅이로 빠져버리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딱 한 걸음 내딛어본다. 그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이고 고민하는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아는 나이가 되었기에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와닿았을 것이다.


가족드라마인 만큼 당연히 자매간의 애증이나 부모님과의 관계도 생생히 그려져 있는데, 매일매일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하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인용하는 버릇 탓에 딸들이(그리고 나도) 답답해 죽으려 하는 아버지가 둘째 빈과 처음으로 솔직히 이야기하며 온전히 자기 말로만 마음을 전할 때, 그때는 정말 별수 없이 울어버렸고, 많은 이야기에서 엄마 이야기는 곧잘 눈물 버튼이 되지만 아버지 이야기에 그렇게 울어버린 것은 처음이었고, 아마 이후에도 이 책을 펼 때마다 같은 대목에서 난 또 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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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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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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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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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집에 갔을 때 돌리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상상해보라. 소란스럽고 캐묻고 다니기 좋아하는 열한 살 소년. 돌리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휙 도망갔고, 도저히 나를 피할 수가 없다면 수줍은 많은 아가씨 양치식물 꽃잎처럼 몸을 푹 웅크렸다. 돌리는 거기 있는 게 미묘한 우연인 양, 방 안의 물건이나 구석의 그림자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신발을 신고 치맛자락이 발목까지 닿는 수수한 처녀 같은 드레스를 입었다. 베레나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돌리는 나처럼 베레나에게 입양된 아이 같아 보였다. 베레나 행성의 중력에 이끌리듯이 우리는 각각 이 집의 외계에서 빙빙 돌았다. (13)

베레나는 여러 사람과 외교적이고도 정치적인 관계를 유지하긴 했으나 절친한 친구는 없었다. 남자들은 베레나를 두려워했고, 베레나 본인은 여자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모디 로라 머피라고 하는 금발의 명랑한 아가씨가 베레나와 무척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모디는 여기 우체국에서 잠깐 일하다가 결국에는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주류 외판원과 결혼했다. 베레나는 이를 몹시 못마땅해하며 이 남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래서 베레나가 결혼 선물로 신혼부부를 그랜드캐니언에 보내주었을 땐 다들 놀랐다. 모디와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베레나에게 코닥 필름으로 찍은 사진 몇 장만 보내올 뿐이었다. 이 사진은 기쁨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했다. 베레나는 장부를 펴 보지 않는 밤이면 이 사진들을 책상 위에 펴두고 이마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앉아 있곤 했다. 사진을 치워버린 후에도 불도 끈 채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어디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양 아픔에 겨운 쉰 울음소리가 들렸다. (15)

라일리가 몸을 돌려 내 발에 오줌을 누자 나는 당연히 모욕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 장난도 모르냐? 그가 말하면서 한 팔로 나를 어깨동무했다.
그런 사건들에 날짜를 매길 수 있다면, 라일리 헨더슨과 내가 친구가 된 건 그 순간이라고 하겠다. 그 순간, 적어도 그의 마음 속에서 나에 대해 애정 어린 감정이 시작되고 그 덕에 내 감정이 한층 더 깊어진 순간이었다. (86)

라일리는 장미 건포도 술을 따서 토파즈 색 술을 잔 네 개에 따랐다. 잠시 후, 그는 다섯 번째 잔에도 술을 채웠다. 캐서린 몫이었다. (104)

일단 변하면 제자리로 도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세상은 우리를 알았다. 우리는 절대로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추운 나무를 향해 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자제심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비를 맞아 썩은 누더기처럼 갈가리 찢겨졌다. 집을 떠난 이후로 항상 이렇게 울고 싶었다. 카운티 부인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자기가 무슨 언짢은 말이라도 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부엌에서 지저분해진 앞치마로 내 얼굴을 닦아주자 밀가루와 눈물이 풀처럼 엉겨 붙어 내 얼굴은 도리어 엉망이 되었고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111-112)

"용서해요. 나 역시 동생이 필요해요." 그래서 판사는 돌리에게 닿을 수 없었다. 두 팔로도, 마음으로도. 베레나의 주장은 너무나 결정적이었다.
한밤에 가까운 어디쯤에서 비가 느슨해지다 멈췄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나무를 짜고 비틀었다. 무도회에 지각한 손님들처럼 하나둘 나타난 별들이 하늘을 뚫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퀼트 이불은 썩도록, 숟가락은 녹슬도록 놔두었다. 나무 오두막과 숲을 겨울에 맡겨두고 우리는 떠났다. (163)

"봄이 되면." 베레나는 돌리에게 약속했다. "같이 여행하자. 그랜드캐니언에 가서 모디 로라를 찾아갈 수 있을지 몰라. 아니면 플로리다로 가든가. 언니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잖아." 하지만 돌리가 원하는 것은 자기가 있고 싶은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여행하고 싶은 소원은 없었다. "난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 더 귀한 광경들을 보고 내가 이제껏 알았던 것들이 부끄러워지는 게 싫어." (166)

과거와 미래는 나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한쪽 고리가 다음 고리를 포함하기 때문에 앞으로 올 주제를 미리 예언한다는 말을 읽을 적이 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삶은 닫힌 원의 연속처럼 보였다. 자유롭게 나선형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고리들. 하나의 원에서 다른 원으로 가려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도약해야 했다. 내 기운을 빼앗은 것은 그사이의 휴지였다. 어디로 뛸지 알기 전의 기다림. 돌리가 죽은 후에 나는 한참 동안 그저 대롱대롱 있을 뿐이었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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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 소수자를 위한 일상생활의 정치학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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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에 ‘유대인’이 있다면, 남한 사회에는 ‘전라도인’이 있다.(82)

흔히 영호남 갈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지역 감정 혹은 지역 갈등이라는 말은 지역 간의 권력관계를 정확히 담지 못한다. 지역감정이나 갈등은 대등한 권력관계에서 벌어진다.(83)

전라도의 야권 지지율 90퍼센트는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새누리당 계열의 역대 정당들이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이들의 후신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결과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아무도 나치와 유대인의 ‘갈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박해였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84)

남편의 동생인 시동생은 ‘서방님’이나 ‘도련님’ 또는 ‘아가씨’지만 아내의 동생을 부를 때는 ‘님’이 필요 없다. ‘처제’나 ‘처남’으로 부른다. 여성들은 남편의 가족에게 옛날 하인들이 쓰던 호칭을 사용한다. 이는 성차별이지 예법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세대, 성, 계층 간의 강고한 위계가 종종 예의로 포장된다.(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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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뜨거운 승리
폴 존슨 지음, 원은주 옮김 / 주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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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아저씨, 아저씨의 성공 비결은 뭔가요?
에너지 보존이지. 앉을 수 있을 때 절대 서지 않고, 누울 수 있을 때 절대 앉지 않는 거란다.(40)

처칠은 정치 인생에서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사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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