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1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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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_제럴드 하워드,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1)

데이비드 리비트는 소설 <두루미의 잃어버린 언어>에서 이상적인 편집자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하고 수도실의 수도승처럼 좁은 방에 온종일 앉아 마치 참회하는 자와 같이 엄격하게 글을 읽어내려가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_제럴드 그로스,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39)

"사실, 편집자로서 진짜 걱정은 이거예요. 제 욕망이 편협해요. 욕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전 직장인이고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어야 하는데, 제가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닌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한마디로 욕망이 대중적이지 않은 거죠. 작년에 <출판천재 간키 하루오>라는 책을 읽었어요. 자서전인데, 간키 하루오가 베스트셀러를 많이 낸 편집자 출신 출판사 대표예요. 자기가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서 ‘나는 욕망이 다른 사람과 같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내 콤플렉스를 보완하고 싶은 욕구를 담아 책을 만들면 다들 산다‘라고 그래요. 이걸 읽고 나니까, 아! 내가 이게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제 욕망은 귀촌 같은 것에 닿아 있고(그는 출판사 입사 전 1년 동안 귀촌 실험을 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라왔고, 남자고, 이성애자고, 크게 소외받을 일 없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데다 부모님은 제 야망을 키우기보다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잘 만족하는 삶의 미덕을 늘 설파하셨죠. 필연적으로 욕구 자체가 잘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140)

"이윤 추구가 1번이에요. (웃음) 다른 사람들 욕망에 충실한 자기계발서 같은 책도 내보고, 또 제가 가진 가치나 정서와 묘한 어긋남이 있는 저자라도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저자라면 같이 책을 내보고 싶어요. 큰돈을 벌어들일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기보다는 손해 안 보는 책, 회사에 적절한 이윤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고요. 책이 팔려야 저 스스로도 일을 제대로 잘해낸 것 같은 생각에 뿌듯하고, 또 회사에서 직원들이 제대로 급여받고, 복지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 대표나 관리자들 말투와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회사 분위기까지 서늘해지고, 노동은 더 고되어지고. 원하는 책, 정말 만들고 싶은 책을 낼 기회도 축소되니까 이윤 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143)

"이런 요구가 나오는 건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워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확실한 생각이 없다면 알아서 해주세요, 하면 좋겠어요. 뭘 원하는지 분명하지도 않고 디자이너를 믿지도 않고. 그럴 땐 뿌연 과녁을 맞히는 느낌이 들어요. 가끔 ‘사장님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해요. 그러면 인터넷 서점에서 그 출판사가 낸 책을 훑어보면서 감을 잡조. 가장 어려운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게 느껴지는 경우예요. 상대를 믿고 가느냐, 상대를 평가하는 자리에 본인은 세워놓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져요. 그리고 시안을 보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게 좋아요. 재시안이야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편집자가 책에 대한 콘셉트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어 있을 때는 디자이너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174-175)

"제작 기한 맞추는 일은 인간관계가 좌지우지해요. 인쇄소, 제본소와의 관계가 중요하죠. 종이부터 확보하고 인쇄소에서 수정을 얼만큼 빨리 해주느냐가 관건이에요. 일정이 급해서 친분으로 먼저 요청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제작자는 편집자나 디자이너와 달리 이직이 드물어요. 보통의 제작자들이 한 회사에서 5년, 길게는 20년, 30년도 일해요. 새로운 걸 개발하는 부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걸 잘 활용하는 부서라 그런 거 같아요." (196)

"유럽은 농도계가 있어서 측정한 농도가 허용 범위 안이면 잘 나온 인쇄물로 판단해요. 국내에는 농도계로 재서 이 색깔은 몇 프로, 이 정도면 오케이 하는 스탠더드가 없어요. 디자이너든 편집자든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하죠. 진한 색을 좋아하는 분은 진했으면 하고, 흐린 색을 좋아하는 분은 흐리면 잘 나왔다고 하고. 주관적인 부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똑같은 기계에 똑같은 인쇄를 해도, 잘한다 못한다 다르게 생각하죠. 그 부분이 아쉬워서, 코리아 스탠더드 색깔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더라고요. 인쇄소나 제본소에서 일하는 기장님들도 교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2교대로 일하는 이분들이 교육받으러 나가면 기계가 멈춰요. 교육은 힘들겠구나 생각하죠." (202)

그가 제일 일하기 힘든 편집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마케팅 방향과 아이디어가 편집자와의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검토서, 콘셉트 회의 자료, 보도자료 등 텍스트 자료는 많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대화 끝에 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집자가 말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가끔 책 출간과 동시에 탈진되는 편집자들이 있다. 책이 사고 없이 잘 출간되는 게 중요하니까 전력을 다 쏟고 방전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마케팅은 출간 이후부터 시작된다. 편집자와 함께 만들어야 할 콘텐츠가 줄줄이 남아 있다. "100퍼센트 힘을 다 쓰지 말고 마케팅팀과 함께할 10퍼센트는 남겨주길 부탁합니다." (233)

박태근은 출판예비학교 1기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냐 취업이냐의 기로에서 일을 택했다. 그가 볼 때 회사는 하나같이 뭘 파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걸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책이었다. 구매 경험도, 사용 경험도 가장 많았다. (248)

출판사는 그날 귀한 발걸음을 하고 갔고 그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만났지만 그중에 20종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알아서 개척해야 할 책이다. (262)

일을 하다 보면 본인이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책이 출판사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럴 때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편하게 내려두고, 그 책이 나와야 될 이유나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책이 나온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편하고 후련하겠지만 그 책은 쉽게 말하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책이다. (265)

"1인출판사나 출판계 종사자를 다루는 방식이, 뭔가 전체 세계에서 특이한 지형에 있는 사람들, 약간의 독립군, 불리한 위세에서 돌파해내는 무엇처럼 묘사되는 거, 저는 별로거든요. 서점에 가면 제 책이 문학동네 책이랑 똑같이 경쟁을 하잖아요. 불리할 것도 없고 유리할 것도 없죠. 그런데 불리함을 기본 설정값으로 해봐야 정신 건강에 도움이 안 돼요. 저는 큰 데만큼은 잘 못 팝니다만 하실래요? 그래요. 웬만한 사람들은 출판 업계가 불황인 거 다 아니까. 나의 책을 딛고 가라, 얘기하는 거죠." (328-329)

가끔 저자들이 본인의 책이 코난북스에 어울리는가 묻기도 하는데 그런 반응을 보일 때 이렇게 응수한다. "당신 책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당신이 시그니처다." "당신의 책이 코난북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이 될 것이다." "코난북스에서 드디어 탈피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331)

1인출판사라고 해서 억울함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말자. 업계에서 특별히 선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악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다. 지업사가 나한테만 나쁜 종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가 나한테만 나쁜 표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서점도 마찬가지다. 1인출판사라도 책이 좋으면 올려주고 아니면 말고다. 코난북스는 규모에 비해서 온라인 서점 노출이나 언론 기사를 잘 받는 편이었는데, 이를 경험하면서 ‘출판계는 놀라울 정도로 악의도 선의도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39)

"이젠 하루에 책이 50부 나가면 내일은 안 나가겠네 해요. 일부러 감정을 잠재웠어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침착한 상태. 혼자 일하다 보면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는데 직작 생활 할 때 내부 정치나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거 때문에 힘들었어요. 지금은 가끔 업계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요즘은 뭐가 잘 나가?‘ ‘부자 됐겠다!‘ 순수하게 일 얘기만 하거든요. 일에 가까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340)

"좀 위악적으로 말해서 저는 1인출판사인지 모르는 출판사가 좋은 출판사라고 얘기해요. 특히 제가 만드는 교양, 사회과학 인문서 분야에서는 더 그렇죠. 돌베개 책보다 예쁘게 잘 만들면 되는 거예요. 작년에 1인출판사 선배를 만나서, 잘되시죠? 그랬더니 잘 안 돼, 근데 남들이 잘된다고 그래,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남들이 볼 때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처음에 이 인터뷰 못 하겠다고 한 게, 남루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독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냥 잘 만드는 출판사에서 만든 책으로 평바다는 거지, 1인출판사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응원해지 위해서 책을 산다는 건 별로예요. 1인출판사를 스스로 마이너리티화하고 싶지 않아요. 각자 자영업자로서, 생계 면에서, 경영 부분에서 본받을 만한 게 있는지, 공감할 만한 게 있는지, 저를 포함해서 1인출판사가 그걸 잘 보여주면 좋겠어요."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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