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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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고 울었다. 울음이 터져 나와 이를 악물 수도 없어서 입술을 앙다물고 울고 또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뒤로 그날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별것 없었다. 내가 대견해서 그렇게 울었다. 가게 팔고 반년도 안 돼 관광차 몰고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 원 없이 춤추고 놀게 해준 내 자신이 너무 멋져서 그렇게도 울었다. (31)

신념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들이 뇌과확 앞에서는 모두 소설이었다.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도 한 높은 베타파가 습관화되어 내 삶을 끌어왔던 것이고, 그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나만의 매력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냥 울화병 환자였다. (47)

아버지를 용서하기가 힘들어요.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워요. 그날 밤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고 무서워서 울지도 못한 큰아들이 지금 울고 있어요.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술 먹고 저희들을 다 망치셨어요. 동생들도 제대로 못 살잖아요. 아버지가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바보 천치 농판 등신이에요. (62)

자기 능력의 70퍼센트를 쓰며 사는 사람이 제일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머지 30퍼센트의 여유 공간에서 인간다운 면모가 나온다고 한다. (81)

최전방 공격수로 나가서 럭비 하듯 공을 찬다. 우리 팀 공격수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상대 수비수의 시야를 가리거나 진로를 막는 전술이다. 상대편 수비가 나보다 훨씬 빨라서 큰 효과는 없다. 최소한 상대 수비수 한 명은 달고 다녀야 팀 전력에 도움이 될 텐데 씨방새들이 아무도 나를 마크해주지 않는다. (104)

제법 깝치고 추월해가는 직행버스를 따라잡을 때는 그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시내에서 쌓인 울분을 외곽에서 맘껏 푼다. 승객들의 반응도 의외로 좋다.
"아따 기사님, 운전이 성깔 있네!" (132)

두 가지 경우다.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다니는 학생하고 다 알면서도 들고 다니는 학생이다. 알고도 들고 다니는 학생은 전주 시내버스 기사들이 너무 미워서 일부러 일반 카드를 들고 다니는 나름 정의로운 그룹이다. 전주에는 현재 일부 젊은이와 시내버스 기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기사 아저씨가 모르는 줄 아나 본데 다 알고 있다. 빨랑 카드 바꿔라! (145)

현재의 친절기사 선정 방식은 비록 좋은 의도로 하고 있다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를 들쑥날쑥한 인간의 품성에 기대어 해결해보려는 것은 너무 궁색하다. (160)

하마터면 또 울 뻔했지 뭐야. 미사곡이 길게 흘러나오는데 이 친구 기도 소리가 딱 얹히니까 절묘한 거야. 뭔가 막힌 것을 도려내는 것 같기도 하고, 텅 빈 것을 꽉 채워주는 것 같기도 하고, 면도칼에 베었는데 아프지 않고 오히려 시원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 (191)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뭣이 그렇게 급했던지 한참을 말을 더듬다가 "거시기 가요?" 그러시기에 (거시기는 보나 마나 중앙시장일 테니까) "예, 거시기 가요!"라고 큰 소리로 익살스럽게 답을 해서 버스가 뒤집어진 적이 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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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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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내게 한때는 땀과 벌레의 계절이었고, 한때는 불면과 실연의 계절이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땡초의 계절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계절을, 그 여름의 열기를,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땡초를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매운 음식에 대한 나의 광적인 애호에 대해 나는 이보다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112)

비싼 백명란은 한 쌍씩 랩으로 곱게 싸서 유리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먹고 싶을 때 바로 꺼내 사각사각 썰어 다진 파와 참기름을 뿌려 구운 김에 싼 밥 위에 얹어 먹는다. 이때 밥은 아무리 여름이어도 따뜻해야 좋다. 따뜻한 밥 위에 셔벗처럼 섞이는 언 명란 맛이 기가 막히다. 저렴한 파지명란은 깨진 명란을 말하는데, 기왕 깨진 것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진 파에 매운 고추를 왕창 다져 넣고 야무지게 섞어놓는다. 찬 물에 밥 말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조금씩 떼어 먹어도 좋고 달걀찜이나 달걀말이 할 때 한 숟갈씩 넣어도 좋다. 주로 파지명란은 반찬으로 먹고 백명란은 안주로 먹는다. 안주는 소중하니까. (116-117)

한 식구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식구만 그런 게 아니다. 친구, 선후배, 동료, 친척, 등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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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교열 중 - <뉴요커> 교열자 콤마퀸의 고백
메리 노리스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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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전인적全人的이라서 좋다. 문법, 구두법, 어법, 외국어와 문학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갖가지 경험도 소용된다. 여행, 원예, 운송, 노래, 배관 수리, 가톨릭, 미국 중서부, 모차렐라, 뉴욕 지하철, 뉴저지 등등. 동시에 나의 경험은 더욱 풍부해진다. 산문의 여신들이 서열대로 줄을 서면 나는 저 뒤로 가야 한다. 그래도 내가 터득한 것을 전하고 싶다. (22)

나는 일하는 동안 글 전체에 대해 간간이 맞춤법 검사 기능을 실행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러면서 오자를 잡아낸다. 하지만 이런 기능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아서, 발음은 같은데 철자와 의미가 다른 단어, 즉 동음이의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교열자를 대신할 수 없다. (31)

우리 교열자들은 한 편의 글을 마치 미사일의 경로를 변경시키듯 자신의 방식으로 흘러가게 만들려고 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교열자에 대한 이미지는 엄격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는 사람, 남들의 오류를 지적하길 즐기는 심술쟁이, 출판업에 들여놓고 주목받길 원하는 보잘것없는 사람, 또는 더 심하게 말하면 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쓰라린 좌절을 겪고 i의 점과 t의 교차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작가들의 경력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이었던 것 같다. (51)

하지만 좋은 작가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 그들의 글을 떠안고 만지작거리면서 좀 이색적인 표현을 평범하게 바꾼다거나 콤마를 없앤다거나 작가로 고의로 모호하게 적은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정말로 위대한 작가들은 편집 과정을 즐긴다. 그들은 제안을 받으면 숙고하고, 충분히 근거 있는 이유로 그것을 수락하거나 거절한다.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52)

루는 거의 모든 면에서 엘리너와 반대였다. 그녀는 스스로 말했듯 글이 ‘무표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엘리너는 문장을 자신의 논리에 부합시키려 했고, 루는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64)

여태껏 내가 전혀 보지 못했고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단어들을 자주 만났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단어는 아니었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나는 회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있어서 심지어 내가 본 적이 없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66)

이와 달리 매우 세련된 산문을 구사하는 작가를 만나면 내가 그 글을 읽으면서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존 업다이크, 폴린 케일, 마크 싱어, 이언 프레이저! 어찌 보면 이런 글이 가장 어려웠다. 읽으면서 내가 만족감에 도취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글은 교열자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원고에서 내가 끼어들 기회를 찾기 위해 계속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다 뭔가를 놓친다면 그것을 변명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67)

산문의 마법사가 쓴 소설 네 편이 실린 680쪽 분량의 책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수만 문장 중 하나에서 흠을 찾아내는 것이 심술궂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한다. (72)

나는 이 문장을 개선할 방법을 모르겠다. 만약 이 문제를 작가에게 얘기하면 그는 고쳐 쓰거나, 잘못된 점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방안이 생긴다. 그냥 두면 된다. (73)

화자의 딸 릴리Lilly의 이름 철자에 대해 질의하고 싶진 않았다. 나라면 l을 한 번만 썼겠지만, 그녀는 내 딸이 아니다. 조지 손더스에 의해 말하는 화자의 딸이다. (75)

사실 나는 교열자로서 보수주의자의 편이다. 나의 임무는 손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작가와 독자로서 나의 입장은 여러 가지다. 자연스럽게 들리는 다른 복수 대명사를 찾는 너스바움과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싱어를 나는 존경한다. (92)

I는 me의 공식 버전이 아니다. me가 왠지 더 친근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사람은 이런 친밀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I, he, she, we, they는 각각의 목적격 단어보다 더 딱딱한 어감이 있다. me, him, her, us, them이 더 부드럽고 유순하다. 그래서 더 손쉽게 쓰인다.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떠안는 담대한 주어와 달리, 거기에 따라붙는 목적어가 되는 것이라 그럴 듯싶다. (114)

당시에 나는 사전이 보배로운 물건이지만 특히 복합어에 관한 한 내가 사전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던 중이었다. 하이픈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그 시기에 깨달았다. (152)

연속 콤마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매번 곰곰이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을 딱 정하고 하이픈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편이 더 편하다. 좀 번거로우면 어떤가? 그게 우리가 월급 받고 하는 일이다. 하기야 매번 곰곰이 생각하면 또 어떤가? (153)

언젠가 나는 엘리너 굴드에게 McDonald‘s의 복수 소유격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주 현명하게, 그런 것엔 신경 쓰지 말라고 내게 조언했다. "사람이 멈출 줄도 알아야지"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McDonald‘ses‘에서 멈췄다. (188)

그때는 아침나절에 한 사람이 뾰족하게 깎인 나무 연필을 쟁반에 수북이 담아서 돌아다녔다. 몽당연필이 아닌, 길찍길찍한 좋은 것들이었다. 사환이 연필 쟁반을 들고 있으면 우리는 한 움큼씩 집었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나는 당시에도, 그 사환과 연필 쟁반이 언젠가 상아부리 딱따구리처럼 멸종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217)

진중한 어조의 편지글을 읽으니 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딕슨 타이콘데로가에 대한 나의 입장은 콤마와 하이픈 때문에 내게 항의의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입장과 같았을까? 이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일단 ‘할 일 없는 사람이네‘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앞으로 그들의 말에 더 공감하려고 노력해야겠다. (230)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나처럼 연필 애호가라 할지라도 고개를 절절 흔든다. 그들도 몰래 한번 해보고 싶을 듯한데. 나는 완벽하게 뽑아낸 나선형 연필밥을 선반 위에 올려둔다. 그것은 한동안 그대로 있다. 청소부 아줌마가 긴가민가하다가 버릴 때까지. (239)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나의 작업을 기쁘게 만드는 글을 쓰는 모든 <뉴요커> 작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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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외국어 - 모든 나라에는 철수와 영희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 12
조지영 지음 / 위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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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는 가장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언어다. 옛날 같으면 그냥 ‘재미없음‘으로 분류되었을 특징들이건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느꼈던 단정함, 정갈함 같은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 주제에 너무 관광지 같지 않았던 그 분위기가 좋아서, 듣다 보면 은근히 매력 있는 그 발음이—폭스바겐 광고의 그 ‘das Auto‘ 같은—좋아서 독학을 시도했다. (44)

재미없는 재미를 아는 사람들의 언어를 본격적으로 좀 알아볼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지나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독일어는 프랑스어만큼이나 쓸 일이 없었다. 과연 라이벌들답다. 업무적으로 외국어를 쓸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긴요하게 쓰이는 말들은 굳이 알 필요도 알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독일어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쓸모없는 진중함, 효용을 바라보지 않는 진실함 같은 것, 1+1=2처럼 딱 떨어지는 에누리 없는 말들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51)

당대를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이 막상 합스부르크의 황혼기를 실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전히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중심에 빈이 있고, 세계의 교양과 예술과 지성의 모든 유행을 선도한다는 자존심이 얼마나 각별했을 것인가. 그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영광의 시절 자체와 결별해야 예술이, 정신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낸 어떤 정신적, 예술적 공감대라는 것이, 그야말로 영롱한 시대정신이 그렇게 극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어쩐지 뭉클했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격동하여 피어오르던 뜨거운 가능성들이 그로부터 불과 20년도 안 되어서 깡그리 무너진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유럽의 역사,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곧 합스부르크, 그리고 빈의 몰락이었다. (68)

이 박물관에는 심지어 영어로 된 설명도 없다. 그저 독일어가 빼곡하게 쓰여 있다. 독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역사라는 뜻이겠다. 혹시나 독일 사람들이 이 불행한 역사를 모르게 될까봐 큰 염려를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어리석고 나쁜 짓을 해왔다고, 밝은 빛의 햇살 아래에서도, 태연히 고백한다. 다시는 이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한다. 지금 베를린은 새벽 서너 시에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유럽 최고의 클럽 도시이기도 하지만, 참혹한 ‘어제의 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70-71)

독일어는 예외가 많지 않다고 한다. 대신 규칙이 너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무리해서라도 많은 규칙 속에, 가능한 한 모호함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언어다. 단어들, 문장들 속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겠다는 결기가, 언어에서도 전해지는 것 같다. (72)

하지만 그 10여 년 동안의 일본 드라마와 기무라 타쿠야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드물게 비극으로 끝나는 작품도 있었고, 무표정하게 사람을 희생시키는 냉혈한 배역도 있었지만, 팬들은 기무라 타쿠야를 백 퍼센트 응원하고 싶어 했다. 좋은 직업인, 동료이자 좋은 선후배, 좋은 상사이면서 또 좋은 연인이며 좋은 남편이었던, 매 순간 극도로 최선을 다하는 ‘잇쇼켄메이(一生懸命)‘의 현현 같았던 기무라 타쿠야를 TV에서 보는 것은, 지지 않을 싸움을 기대하는, 불가능한 꿈 같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105)

체념이라는 정당화, 순응이라는 편리함, 대의 혹은 대세라는 이데올로기에 일본 사람들이 쉽게 투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오래된 확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그래서 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유일한 단독자 같은 사람이 결국 세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마는 이야기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 같다. 세상에 개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선언, 하나하나의 개인이 우주이며 알파고 오메가라는 다짐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돌파력을 응원한다. (122)

하지만 아무튼, 계속 쓰고, 계속 뛰며, 계속 싸워나가는 그 ‘계속해보겠습니다‘ 정신을 사랑한다. 체념하지 말고, 순응하지 말고, 투항하지 말고,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라도 나를 방치하지 말라는, 어찌 보면 잔소리 같은 메시지가 아직은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언제 적‘ 하루키는 ‘그래도‘ 하루키가 된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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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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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고 묵직한 응어리에 울컥 목이 메었다. "왜 저 남자야?"
"정말로 좋은 남자한테는 내가 좋은 짝이 될 수 없고 대럴은 정말로 나쁜 남자가 아니니까."
난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18-19)

한번은 남자 친구에게 이런 걱정거리들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말했다. "자기 완전히 미쳤구나." 직장에서 새로 사귄 친구에게 똑같은 말을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마친 게 아니야. 여자일 뿐이야." (65)

내가 말한다. "내가 별로 착한 여자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는 내 뺨에 키스를 한다. "그건 진실이 아니야." 또 말한다. "나한테 뭐든 진실을 말해줘." 나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어밀리아의 생각에 매달리는지, 사실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그 애뿐이라는 얘기, 지금쯤 걸음마를 배우고 첫 번째 단어를 말하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고 그에게 털어놓는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토록 나를 좋아해주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 차가운 손가락을 자신의 따뜻한 입술에 갖다 댄다. 그가 그토록 휑하던 텅 빈 공간들을 채운다. (149)

돌 던지는 사람의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은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사라지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아이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의 몇 시간은 신성한 시간이다. 그녀는 이 순간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그녀는 삶이 너무나 투명해서 뭔가 사적인 것, 뭔가 소중한 것에 한없이 굶주려 있다. 이 순간들을 빚어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고 결코 말하지 않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비밀을 만든다. (179)

아내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로지 피로감만 배어 있었고, 파커는 그게 아내의 분노보다 더 무서웠다. (319)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실감이 나니까 무서워졌어. (348-349)

‘사슴 고기‘라는 뜻의 ‘vension‘은 라틴어 ‘venari‘가 어원이야. 사냥한다는 뜻이지. 나는 그게 잔인하다고 생각해. 어떤 존재에 그가 반드시 맞고야 말 종말을 따서 이름을 지어주다니.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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