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안녕, -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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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상대와 익숙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미리 짜맞춘 연극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장구칠 호흡과 웃을 타이밍이 정해져 있는 대화에서 말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말을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_조련사와 돌고래는 친할까요.
_친하겠지.
_말이 통하지 않는데 친할까요.
_말로 사귀지 않으니 친하겠지.
_그저 먹이를 따르는 것 아닐까요. 먹이를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까요.
조련사들을 돌고래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분주했다.
_굶어죽지 않기 위해 떠난다고 해도 그전의 일들이 전부 거짓이 되는 건 아니겠지.
_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될걸요.
_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될 거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겠지.
_그럴까요.
쇼가 끝나자마자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건물 밖은 비가 그치고 해가 나서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20-21쪽

가위바위보.
나는 가위를 냈다. 그도 가위를 냈다.
_비겼네.
그는 싱긋 웃었다.
_에이 싱거워.
_싱겁다, 싱거워.
_어떤 소원 생각했어요?
_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
손목이 화끈거렸다. 드라큘라의 손이 매웠다.
_네 소원은?
_같은 거.
우리는 비긴 김에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37쪽

관을 만들고 싶어졌다. 누구를 위한 건지는 모르지만 좋은 관을 만들고 싶었다. 쓸모가 없다고 해도 할 수 없다.-66쪽

_왜 말하지 않았지.
드라큘라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나와 있고 싶어서 머무른 게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던 중이었다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두번째였다. 동물원에서도 그랬다. 그가 하지 않았던 말 한마디가 우리가 나눴던 모든 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나.
민구를 내내 원망했다. 내가 했던 말들은 그냥 말이었다.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흘려보냈던 무의미한 소리들이었다. 그때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다. 나는 민구 곁에 있고 싶었다. 민구도 그랬다. 말보다 더 분명한 것들이 있었다. 마주 보며 웃는 순간들은 진짜였다. 그런 순간들을 내가 내뱉은 허황된 말들을 이유로 깨뜨리려는 민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민구를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98쪽

그를 보자마자 나갔어야 했다. 나는 미적거리다가 그만 시비를 걸고 말았다. 누가 더 비겁한지, 비겁했었는지에 대해서. 누가 더 비참한지, 비참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미라가 뒷마당 벤치에서 일어나자 드라큘라는 황급히 방에서 나갔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초라했다. 드라큘라는 도망쳤다. 나도 그랬다. 속이 텅 비었다.-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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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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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 인생 꼬는 건 결국 자기다.
몇 년 전, 인생이 꼬이고 꼬이고 또 꼬였다.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길을 걷다가도 발을 탕탕 구르고 미친 여자처럼 먹을 것을 쌓아두고 폭식했다.

그러다 알았다. 결국 내가 그렇게 만든 거구나. 내 인생 꼰 건 나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시밭길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옆에 멀쩡한 길을 놔두고 그곳으로 들어선 건 나다. 누가 등도 떠밀지 않았다. 바짝 마른 짚더미를 안고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들어간 것도 나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서 가버릴 수 있었는데.

 

그래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어떤 길이 꽃길인지 이제 알고 있으니, 예쁜 길로만 조심조심 다니겠다.

 

요새 생각하는 건 좀 다르다.
그때로 돌아가도 결국 난 같은 선택을 하겠구나. 그게 나니까.
몇 번을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자기 인생 꼬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싶다.
결국 그 사람은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 것이다.

 

제 발로 거지 같은 길로 들어서는 주인공 린을 보면서 이상하게 괴로웠던 이유도 동질감 때문이었을 거다. 린도 인생의 매 단계마다 처음에는 평탄하고 예뻐 보이는 길로 잘 걸어가려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다운 것을 선택하고 만다. 그렇게 생겨먹은 나도, 이런 문장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끝까지 소리 내지 않고, 끝의 끝까지 견디고 참아내고, 그러다가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알고는 있어도 개선할 수가 없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 있다. (66)

 

나는 앞으로 점점 더 가망이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는 계속 가망이 없는 것만 쫓아갈 것이다. 가망이 없다. 그건 어리석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은 분명 아름답다. (154)

 

나는 내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쑤셔넣는다. 손톱을 세우고 살을 할퀸다. 손톱을 박아넣고, 지방을 파헤치고,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양 빙글빙글 상처를 헤집는다. 아무것도 안 나와. 알고 있어. (265)


글쎄, 그후로 지금까지는 삶이 크게 출렁일 만한 큰 위기가 없어서 비교적 평탄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또 그런 미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어느 길로 들어설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때마다 <오토픽션>을 읽고 동질감을, 슬픔을, 아픔을,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끼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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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치는 고양이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1년 2월
품절


학교, 히읗과 기역이 들어가는 단어, 학교. 당연히 나는 학교가 싫었고, 기역과 시옷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교실이 무서웠다. 수업 중간에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교문 앞에서 등을 돌리기도 했다. 바깥으로는 볼품없고 안으로는 한없이 절망적인 날들이 흘러갔다. -16쪽

“묵을 것이 읎냐? 그라믄 바풍초똥팔삼 순으로다가 내놓으믄 된다.” 쥐고 있는 화투 패와 바닥에 깔린 화투 패를 연신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마치 내가 뒤고 있는 화투 패들을 투시하고 있는 듯했다. 먹을 게 없어 내놓을 것이 마땅치 아니할 때에는 비풍초똥팔삼과 같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을 던지는 것도 일종의 대책이 되며,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심오한 비유를, 그때 나는 조금 알게 되었다.-22쪽

쥐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토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토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덩클거리는 쥐 고기가, 나중에는 누리끼리한 위액까지 쏟아져 나왔음에도 가슴뼈 아래 오목한 곳이 답답하고 아팠다.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어 남아 있는 쥐 고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쥐의 꼬리를 물고 가슴속 울혈이, 또 하나의 꼬리를 잡고 화병(火病)이, 슬픔이, 분노가, 및이, 국민교육헌장이, 순국선열이, 호국 영령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32쪽

쥐를 먹은 고양이답게, 5학년 열두 살 계집애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발톱은 세울 줄 알게 되었다. 말수는 없어도 더듬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도 목숨을 이어 한 세기를 꽉 채우고 황천길에 오르셨다. 군용 담요를 깔고 화투 놀음을 하던 쪽마루는 어린 내 마음에 그들먹하게 차오르던 치욕과 부끄러움과 쓸쓸함과 분노의 쳇바퀴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주었던 진정한 법당 마루였던 셈이다.-32쪽

삶의 밑바닥까지 가본 내가 관계의 환상을 가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소. 환상이 없으므로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잘 속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지금까지 지내왔소. 껄끄럽고, 눅눅하고,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바닥에 뒹구는 자가 모두 참혹한 것만은 아닐 거요. 진창에 구를 때의 이중적인 감정, 뜻밖에 그 바닥에서조차 자신을 끌어올리는, 저열하기조차 한 어떤 힘을 느끼는 것이오. 하지만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오. 견고한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에 의해 생성되는 불안. 그것은 환상 없는 사람만이 치러야 할 대가 지불인 것이오.-99쪽

인간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악마나 짐승밖에 없다고 한 사람은 니체였다지요, 아마. 이상하게도 내면의 악마나 짐승을 보는 때, 그 추함을 보고 진저리를 치는 때, 오직 그때만이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스스로가 얼마나 섬뜩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오.
그러한 경험, 참담함, 그런 것마저, 그 참담함에 대한 기억마저 스러지는 때, 아주 절망스러운 위기감이 드오. 뭐랄까. 스스로가 마모되어 가는 것 같은 위기감이라고나 할까. 그 날카롭게 쑤셔대던 감정들이 어느 사이에 스러져 아주 건조하고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을 뭍들고 있던 과거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은 잠시뿐이고, 다시 모든 게 아주 막막해지오. 어쩌면 그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오. 자신의 내면에서 추한 수성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그 참혹함 속에서, 그 자기 모멸감 속에서, 아주 엉뚱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 맹렬한 적개심, 우월감, 자기 확인,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유치한 현시욕, 그러면서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감정들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다시 자기 모멸감에 빠져드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소.-110-111쪽

욕망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핵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명도.-137쪽

남자는 약하다. 그리고 지금 어느 때보다 더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라고 린은 생각했다. 약해질수록 더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남자들을 린은 숱하게 봐왔다. 남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린이 보기에 남자는 더 강해지기보다는 미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허술한 남자의 눈빛은 상대의 인정을 갈망하며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파멸로 가는 지점에서 자기를 버려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남자는 사실 버림을 받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158쪽

린이 보기에 남자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다. 남자는 아버지 없이 살기로 결심하며 처절하게 투쟁하며 자기를 세우려고 했지만, 아버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자기를 규명하지 못했다. 린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는 아버지를 버리면서, 매순간 아버지를 취하고 있었다. 린이 그랬듯이 남자는 아버지를 매순간 죽이면서, 수시로 복원했다. 린처럼 남자는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고, 아버지 없이 죽지 못했다. 린처럼 남자에게 아버지는 마약이자 구원이고, 하나님이자 악마이며, 현실이자 망상이며, 중독과 갈망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실존의 구멍을 메우고 있는 아버지.-161쪽

린은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껐다. 마치 캄캄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켰던 촐불을 나온 뒤에는 훅, 불어 꺼버리듯. 세상과의 마찰과 접속을 끝내고, 린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165쪽

그 시절, 나는 병에 도취되어 있었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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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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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자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도시에선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하여 몇 백 개의 소년 단체를 만들었다고 하나, 두자에게 어린이라는 말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외래어와 같았다. 두자는 단 한 번도 어린이인 적이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땅히 일을 하여 살림을 불리고 한 살 어린 남동생을 보살펴야만 하는 어른이자 일꾼이었다.-17쪽

큰언니는 시집가기 전날 밤 걸레를 입에 물고 ‘엄마’란 말을 안으로 삼키며 꺽꺽 울었다. 두자는 언니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영영 떠난다는 게 너무 슬프고 무서워 같이 울었다. 언니가 엄마를 부르듯 저도 엄마를 불러보고 싶었지만 두자 입에선 언니 울지 마, 언니 가지 마, 나도 데려가 언니, 소리만 줄줄 새어나왔다.-20쪽

할머니는 장수가 태어났을 때처럼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집안에 학자가 났다고 자랑을 해댔다. 두자는 장수가 흙바닥에 써놓은 글자에 걸레 빤 물을 뿌렸다가 할머니에게 나가 죽으란 욕을 일주일 내내 들었다.-24쪽

서쪽 하늘 언저리에 깊게 여윈 달이 박혀 있었다. 영영 겨울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아직 따뜻한 손을 수줍게 흔들면서 두자는 생각했다. 늘 가을이면 좋겠다. 계속. 계속. 매일. 매일. 아무도 떠나지 못하게 시간이 그만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27쪽

근데.
두자가 머릿수건을 고쳐 쓰며 물었다.
엄마는 이름이 뭐요?
새엄마는 오래전에 죽은 조상 이름 떠올리듯 기억의 사다리를 느릿느릿, 한참이나 올라갔다. 새엄마가 제 이름을 쫓아 입술만 달싹이는 걸 보고 두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두잔디. 장두자. -32-33쪽

새엄마는 괴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괭이를 휘두르는 동시에,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지독한 저주를 폭포처럼 게워냈다. 아버지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새엄마의 얼굴과 그 뒤로 타오르는 그을음이 두자의 온몸과 정신을 짓눌렀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새엄마의 모습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피가 거꾸로 치솟듯 흥분되었다. 두자는 떨리는 손으로 벌어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웃고 싶었다. 바닥에 너부러져 꿈쩍도 못하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41쪽

……그럼 엄마는 좋소?
뭔 말이고.
서방 있고 자식 있고 남자 아는 엄마는 좋으나 이 말이오.
어데 좋아 사나.
새엄마가 두자의 말을 딱 자르며 대답했다.
그럼 여로 시집오기 전이 좋았소?
야야, 니는.
새엄마의 눈도 산 너머 노을로 향했다.
니는 지금이 좋은갑제.
술 취한 아버지가 사립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새엄마가 거세게 맷돌을 돌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는 단 한 번도 좋아 산 적이 읎다.-44-45쪽

니 아부지가 그랬는디.
새엄마가 목을 쭉 뽑으며 말했다.
니가 니 엄마를 젤 마이 닮았다 그랬다. 니 언니들보다 니가. 내사 보질 못해 모르겠다만. 니는 그거 알았나? 알고 살았나?
두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도 엄마 얼굴은 모르니깐요.
새엄마가 낮게 혀를 찼다.
내는 엄마를 내 엄마라 생각하고 살았니더. 우리가 닮은 구석은 하나 없다케도.-48쪽

안 가고 뭐하노. 어여 가라.
새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깊고 시꺼먼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것만 같은데, 한 번 떨어진 발은 제 뜻과 상관없이 한 걸음, 두 걸음, 저절로 움직여 남자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살면서 새엄마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같이 밥하고 나물 캐고 바느질하고 밭 일구면서, 별 의미 없는 대화라도, 두자와 새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 사소한 말들의 무게가 두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았다.
두자야.
새엄마가 낮은 소리로 두자를 불렀다. 또박또박, 두자라고 불렀다. 뒤를 돌아봤다.
잘 가래이. 가서 새 인생 살래이.
새엄마가 두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는 엄마를 못 볼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에게 무슨 말이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비죽비죽, 지저분한 울음만 새어나왔다. -49-50쪽

아무도 자기의 생존을 기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두자는 더 비참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고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눈물이 났다. -86쪽

만석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아이가 수없이 내뱉던 옹알이. 숨소리. 그 아이의 침과 똥과 오줌. 죽은 자식을 생각할 때마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그 아이를 밤낮 끼고 살았다. 제 배를 빌려 나온 시어머니 아들 같았다. 시어머니처럼 유난스레 만석이를 예뻐하고 아끼진 못했지만, 마음만은 시어머니보다 더 애틋하고 뜨거웠다. 사랑을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아 다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안아준 게 전부였지만, 바로 그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다. 우리 만석이는 그걸 알까. 알고나 갔을까.-87쪽

두자는 울다 한숨 쉬다 훌쩍이길 반복하며 분녀를 따라 걸었다. 문득 제 인생이 간장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여겨졌다. 좁은 세상에 갇혀 그 바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짜고 어둡고 독한 맛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살아야만 하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감히 어떤 다짐을 내세울 수도 없는 존재.-100쪽

뿌연 먼지 너머로 손을 흔드는 그녀가 얼핏얼핏, 오랫동안 보였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창락골에 이르러서야, 사장 아내가 들어준 작은 보따리 속에 신문지로 겹겹이 싸인 꾸러미가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보따리를 풀고 얌전하게 포개어진 신문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냈다. 하얀 설탕 두 봉지가 들어 있었다. -113쪽

살아 있는 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원치 않는 상태.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겠지. 눈뜨면 일할 것이고 배고프면 먹겠지. 숨소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허기가 두자를 계속 살게 했다.-117-118쪽

자들, 누구 씨여?
(……)
꽃씨요.
두자가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대꾸했다.
들에서 젤로 예쁜 꽃만 따다가 씨 털어 먹고 맹근 애들이요.-125쪽

쌍둥이는 서로의 입게 음식 넣어주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음식은 금방 바닥났다. 두자는 아이들의 놀이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말린 옥수수 두어 개를 급히 쪘다. 쌍둥이는 뜨거운 옥수수를 호호 불며 낱알을 하나씩 떼어 서로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놀이에 끼고 싶어 두자도 입을 벌렸다. 두 아이가 동시에 낱알을 두자의 입에 넣었다. 입을 벌린 모습이 꼭 웃는 모습 같았다.-129쪽

귀뚜라미가 울었다. 검게 탄 팔에 소름이 와륵 돋았다. 두자는 몸을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탁하고 더러운 연못에서 벗어나 깨끗한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찬란한 햇살에 몸과 맘을 모두 말리고, 맑고 밝은 오솔길 따라 휘적휘적 끝없이, 걸어가고 싶었다.-132쪽

분녀의 편지엔 우는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었다. 쌍둥이가 두자 눈치를 보다가 따라 울었다. 둘 중 하나가 말했다. 엄마 울지 마. 엄마 잘못했어. 엄마 울지 마. 한 명이 그 말을 하자 다른 아이도 따라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말을 하고, 돌보지 않아도 자꾸만 자라는 그 아이들이 무섭고 버거워 두자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137쪽

다음 생에는 진짜 꽃으로 나라. 아무도 못 꺾고 못 밟게 깊고 깊은 산속 꽃으로 나라.
성냥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니들 옆 떡갈나무로 날 것잉께. 커다란 나무로 나서…….
건초에 불을 붙였다. 가볍게 일렁이던 불꽃이 단숨에 마른 것들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나갔다.-140쪽

길이 나는 대로 걸었다. 걷지 않고 머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간 굶어 죽을 게 뻔하니까. 가난을 피해 달리고 달렸지만, 결국엔 가난이 만든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50-151쪽

너 그거 기억해. 남자들은, 특히 내 마음에 쏙 드는 남자들은, 처음엔 언제나 멋지고 다정한 법이야. 기억해. 처음이야. 처음에만 그런 거야. 봉선은 진지한 필체로 그렇게 썼다. 진지한 필체란, 볼펜을 아주 꼭꼭 눌러쓰는 것이다. 기억해라는 문장은 다른 문장보다 진하고 깊숙했다. 기억하나마나, 자기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처음에라도 멋지고 다정한 남자를 만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여겼으므로, 수선은 봉선의 편지를 볼 때마다 한 번씩 웃고 말았다. 그렇게도 수선을 웃게 하려고 봉선은 볼펜을 꾹꾹 눌러 남자 얘기를 쓰는 건지도 몰랐다. 자기 연애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선을 웃게 하려고.-209쪽

시간도 잠시 졸다 깨는 고요한 오후, 수선은 작은방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 있기를 즐겼다. 서서히 기우는 햇살이 서쪽 창으로 노랗게 비껴드는 방이었다. 가끔 윗집에 사는 아이가 우당탕탕 뛰어노는 소리도 들렸다. 장사치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들렸다.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소리였다. 그 방에서 봉선의 편지를 읽거나 두서없는 생각을 마구잡이로 하다가 선잠에 빠져들곤 했다. 꽃씨처럼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꿨다.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딸도 아니고 수선이란 이름도 없이, 몸속엔 심장이나 내장이나 똥 대신 고운 봄바람만 가득 차서, 가고자 하는 곳도 가야만 하는 곳 없이, 되는 대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꿈. 선잠에서 깨면 천장과 벽면의 모서리에 눈이 갔다. 서서히 자라나는 가느다란 균열과 누런 자국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시금, 여기가 어디더라. 나는 누구더라. 지금이 언제더라. 거짓말처럼 까맣게 지워진 지난날의 광야를 길 잃은 여자처럼 헤매고 다녔다. -230-231쪽

엄마, 비 왔어?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 왔어?
엄마는 대답 없이 내 손을 바짝 끌어당긴다. 물웅덩이에 한쪽 발이 빠져서 흰 샌들이 더러워진다. 발가락 사이사이 잔모래가 끼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난다. 나는 물웅덩이 밟고 다니는 걸 아주 좋아했지만 엄마는 절대 못 그러게 했다. 나는 실수인 척 물웅덩이를 자꾸 밟는다. 엄마가 신경질을 낸다. 똑바로 보고 걸으라고 한다. 엄만 알았을까? 내가 일부러 물웅덩이에 빠져놓곤 실수인 척 연기한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256-257쪽

마루에 앉아 무청을 손질하다 깜빡 조는 할머니.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도 사춘기 소녀처럼 요란하게 웃어대는 엄마들. 미안해, 동하야. 미안해.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는다. 파란 김. 열무김치. 참나물. 시래기된장국. 빨갛게 무친 도라지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들빼기김치. 시원한 물 한 대접을 들이켜자, 몸 곳곳에 숨어 있던 수많은 새싹이 기지개를 켠다.-306-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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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인형과 교수대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2
앨런 브래들리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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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나온, 그야말로 달콤한 소설 <파이바닥의 달콤함>을 기억한다.

미스터리 문학에 대한 내 편견을 와장창 깨준 복덩이 되시겠다. 무서운 것 / 징그러운 것이라면 질색팔색을 하는 터라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추리 소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단 말씀.

 

그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주인공 플라비아 들루스일 거다. '셜록 홈스의 추리 능력, 퀴리 부인의 화학적 재능, 지킬 박사의 열정'을 가졌다는 말이 딱 맞는 열한 살 화학 덕후 소녀가 얼마나 깜찍하고 앙큼한지, 뒤로 갈수록 추리도 추리지만 이 아이가 또 어떤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지가 기대되더라. 아직 결혼도 안 한 처자 입에서 "아이고 내 새끼 어화둥둥 어화둥둥" 소리까지 오호호.


해서 두번째 책을 기다리며 전편의 감흥이 줄어들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기우로 판명되었다 하하하.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진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달까.

 

물론 <파이바닥의 달콤함>도 완전히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플라비아 들루스라는 아이도 대놓고 귀여운 짓을 해서 귀여운 게 아니라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함과 미친 독설 때문에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거고, 귀족 가문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 + 들루스 집안의 어려운 경제 형편 +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플라비아의 고독감이 작품에 무게감을 주면서 균형을 맞췄었다. 뭐랄까, 한없이 가벼워지지 않도록 딱 중심을 잡아주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 & 소설 속 사건 자체가 '죄 없는 아이의 죽음'과 얽혀 있는데다, 플라비아도 그 피해자 아이가 자기 또래인지라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는지 마냥 미쳐 날뛰지는(?) 못한 것 같다. 폭력배 애인을 둔 미모의 여성(나름 주요 등장인물)에게도 마구마구 연민의 감정을 느껴서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고...

그래도 역시! 플라비아의 귀여운 면모를 빠뜨리면 서운하니 가장 많이 파닥대면서 읽었던 부분을.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장면은 모든 문학작품을 통틀어 가장 섬세하고 흥미진진했다. 특히 음독한 에마가 “전기 충격을 받은 시체처럼 몸을 일으켰다”는 부분은 아무리 음미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땐 가엾은 보바리 부인의 자살에 몹시 흥분한 나머지 그녀의 불륜 관계에서 세밀한 부분들을 거의 다 놓쳤던 것 같다. 기억나는 거라곤 좀개구리밥과 폴짝폴짝 뛰는 개구리들이 가득한 백합 연못 옆에서 에마 보바리가 로돌프랑 단둘이 있었던 장면뿐이다. 플로베르는 그녀가 눈물 젖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한참 동안 바들바들 떨다가 “그에게 자신을 내주었다”고 적었다.

대체 뭔 소리람. 도거에게 물어봐야겠다.

 

“도거.” 내가 말했다. 그는 자루가 긴 괭이를 들고 텃밭에서 잡초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보바리 부인』 읽어봤어?”

“음,” 도거는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몹시 불행한 사람이 자살하는 이야기였죠.”

“파란 항아리의 비소로 말이야!” 나는 솟구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바꿔가며 깨금발로 뛰면서 외쳤다. “에마 보바리는 여러 차례 불행한 불륜 관계를 맺고서 결국 그걸 삼켰잖아. 그녀는 로돌프란 남자와 불륜 관계였어. 그러고 나서 레옹이란 남자하고도 그랬지. 물론 동시에 그런 건 아니었지만.”

“물론이죠.” 도거가 말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불륜이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나는 뭣도 모르는 티가 나지 않길 바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플로베르가 말이야, 보바리 부인이 로돌프에게 자신을 내주었다고 한 건 무슨 뜻이었을까?”

“그건요,” 도거가 말했다. “그들이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아주 많이 친한 친구요.”

“아!” 내가 말했다. “짐작한 대로군.”

 

아아아ㅠㅠㅠㅠ

전쟁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묘하게 사랑스러운 집사 도거와 플라비아의 조합은 언제나 훌륭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정말 좋았다. 정말. 정말.

 

아무튼 이 시리즈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이 섞인 요리를 앞에 놓고 '과연 저게...' 하고 반신반의하다가
살짝 먹어봤더니 예상 외로 엄청 조화롭고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게 되는, 그런 느낌!

 

세번째 권이 벌써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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