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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의 읽기 거울 너머 3
임소라 지음 / 하우위아(HOW WE ARE)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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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집단과의 원활한 소통과 생산적인 활동으로 사춘기의 이상한 에너지를 순화시키지 못하고 이후에 맺은 모든 관계는 엄마와 나 사이처럼 이어졌다. 몹시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다가 받은 만큼 더 받기를 원하다가 모자라면 증오했다. 그렇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일을 동시에 하느라 나도 그들도 지쳤다. 그 짓을 덜하게 된 건 누군가를 곁에 두려고 하지 않고 혼자가 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정확하게는 혼자 했던 여행 이후였다. 나는 그때서야 관계 중엔 나와 맺는 관계도 있다는 것을, 모든 관계가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사람을 잃고 난 뒤였다. (80)

이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안다. 왜냐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없는 것들,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이 막히고 마는 질문이 있다는 걸 안다. 대답하지 못한 채 지나간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아진 후에야 알게 되었다.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할 때마다 아, 내가 생각보다 더 멍청하구나, 하고 자책했는데 어떤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답이 생겼다 사라지기도 하고, 또 어떤 질문은 그 질문을 되묻는 게 가장 명확한 대답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안다. 나는 행동도 생각도 느린 사람이라 아주 느리게 답하고 더 느리게 되묻는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들 가운데 언제나 내가 있다는 게 좀 슬프지만 다행이기도 하다. (278)

내 인생이 소설에 나오는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 같은 멋진 미래가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뒤에는 내가 이해 못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정하지 못해서 배를 곯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278, <벨자> 107을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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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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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 (47)

가사이 씨와 유키코는 조용히 혼자 충족되어 있는 듯한 점이 어딘가 닮았다. (134)

신경이 구석구석 미친다는 것과 신경질적인 것이 어떻게 다른가, 선생님이 덧붙인 선에 그 대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146)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180)

눈앞의 과제를 하나하나 현실적으로 조립해나가는 가사이 씨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쓸데없이 각을 세우지 않고, 밀면 들어가고,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탄력성이 있었다. 때문에 상대방도 가까이 다가온다. (229)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아서 말이야. 불만이 있는 건 아니야. 이렇게 있기 좋은 설계사무소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선생님 밑에서 십 년 더 있다가는 여기에서 나갈 수 없게 될 거야." (238)

"본인이 삼가서 잠자코 있는 것하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한테는 똑같아요." (267)

조용하게 틀어박혀서 쉬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큰 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이 밝고 넓으며 공적인 공간으로 하지 않은 것도 선생님이 만드시는 주택답다. 열린 곳은 마음껏 열고, 닫을 곳은 닫는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고. (271)

이무것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많은 시간과 엄청나게 많은 재력으로 사람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박물학과 생물학이 발달했다고 대학 강의에서 들은 것이 생각난다. 사람을 고용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꽃을 키우는 것도 후지사와 씨 혼자만의 안에서 완결되는 생물학일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후지사와 씨는 사람과 떨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강인함을 어떻게 익혔을까. (275)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286)

"불합리한 것이나 억지 등 여러 가지 일에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할 때가 있지. 그것이 건축가의 일이야."
엔진 소리만이 차 안에 울리고 있었다.
"우치다 군은 셔터를 내려버리니까 말이야.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무감각하게 해놓고 불합리하거나 억지를 잠자코 받아들이려는 성향이 있어. 자기가 다치지 않고, 잘 흘려보내기 위한 방위책일지도 몰라. 그러나 그래서는 오히려 상처를 입는 결과가 되거든."
선생님은 나한테가 아니라 이 자리에 없는 우치다 씨한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하고 싶지 않은지, 점차 모르게 돼. 알겠나."
"네."
"말도 안 되는 것에 밀릴 때도 있겠지. 상대방이 있는 일이니까. 다만 마지막에는 밀린다 해도 자기 생각은 말로 최선을 다해 전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건축이 아무 데에도 없게 돼. 자기 생각을 자기 자신조차 더듬어갈 수 없게 된다고." (352-353)

"정말 죽기 살기로 억지 부리는 사람은 얼마 없어. 대단한 탁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남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세상이 이런 것이니까,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야. 그런 사람들은 이쪽이 각오만 섰으면 밀어붙일 수가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자기 아집을 관통시키려는 사람도 있어. 그런 때 건축가로서의 신념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는 평상시 어떻게 해왔느냐의 연장선상에 있어. 여차하면 저력을 발휘할 생각으로 있어도 평상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으면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354)

앞에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요소를 자기 자신을 위한 확장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몸에 익혔으면 좋겠다. 나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이기를 바라고 있다. (393)

이렇게 정밀하고 견고한 모형은 전에도 후에도 본 일이 없다. 우치다 씨하고 나와 유키코가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이 모형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팔과 손목, 손바닥과 손가락의 연계가 이상적으로 안정되고(어떠한 세밀한 작업에서도 손가락은 1밀리미터도 떨지 않았다), 시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0.1밀리미터의 틈새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본인들은 그 사실에 아무런 자각이 없던, 틀림없는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선생님의 머릿속에만 있는 이상적인 손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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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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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107)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132-133)

처음 며칠 동안은 집이 텅 빈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익숙해져서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든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는 이디스를 생각할 때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조용한 후회가 느껴졌다. (156)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160)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지만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든 상대에 대해서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균형이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168-169)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것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251)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251-252)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 것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350-351)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353)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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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전공에 대해 고백해야 하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굳이 ‘고백’이라는 거창한 말이 동원될 만큼 어떤 결의 같은 것이 필요한 나는, 무늬만 사학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아마 역사학 수업에서 파란만장하고 깊은 서사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웬걸, 그 세계로 진입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재미없는 이론, 숙지해두어야 할 여러 사실(史實), 수치와 통계. 사람의 흔적 없이 어딘가 무채색의 과학에 가까워 보였던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대학시절 내내 교양만 열심히 쌓았다.


그래서 『거인들의 몰락』으로 시작되는 이 시리즈를 맡게 되었을 때는 지레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본격 역사소설이라니, 재미없으면 어쩌지. 그리고 그 우려는…… 몇 페이지 읽기도 전에 불식되었다. 이거 정말 진진한 드라마잖아!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폭력적인 세기’를 그리며 켄 폴릿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하나하나의 인간에 집중한다. 앞선 두 권에서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얽히고설킨 다섯 가족은 이제 세번째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고, 공민권운동,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을 목격하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캐릭터는 이상적인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꿈과 사랑을 위해 고뇌하고 때로는 좌절을 맛보며, 단순한 역사의 전달자가 아닌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 시종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이야기는 20세기의 가장 상징적인 순간인 베를린장벽 붕괴를 조명하며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훗날 이번 세기의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손꼽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 연설로 끝을 맺는다. 이름만 사학과 학생이었던 2008년 당시 영상을 찾아보면서 ‘와, 멋있다’ 하는 막연한 감상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나도, 미국의 인종평등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한 주인공이 TV 중계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는 별수없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의 묵직한 감동은 아마 온몸으로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그들과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쌓인 결과일 테다. 그리고 이 3대에 걸친 가족들의 이야기가 내게 그랬듯, 이 장대한 서사시는 누구에게나 역사란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거라는, 온기가 도는 인간들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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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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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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