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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ㅣ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라는 것은 알겠지만 아직 그게 괜찮지는 않다. 아직? 좀더 기다리면 괜찮아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 P19
나의 부모는 불운하고 서글픈 데다가 늘 누군가를 향한 격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의 골이 깊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나는 성장기 내내,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부모 중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그들 각자가 스스로를 연민하는 강도로 그들을 연민하느라고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그들의 기분에 따라 절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내 감정이라고 여겼다. - P51
그렇게 열렬히 부모를 바라보느라고 나는 어린 동생들을 살피지 못했다. 시간을 돌려 바꿔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일단 그 시기로 돌아가 동생들을 돌보고 싶다. 나도 어렸으니까, 그 돌봄은 내 몫도 내 책임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질 않고 그게 사실도 아닐 것이다. 나는 동생들이 겪은 시간에 책임을 느낀다. 지금의 동생들이라기보다는 당시 내 어린 동생들에게. - P52
놀랍고 상심했지만 이제 그런 말은 예전만큼 나를 흔들지 못한다. 괜찮지는 않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진폭이랄지 파형이랄지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나쁜 말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를 향해 당신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이를 거절하고, 멀어지라고, 어떤 형태로든 그를 돌볼 수는 있겠지만 그의 비참을 자기 안으로 떠안지 말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 가물치를 물에 돌려두었다고 썼다. 해당화를 심고 작약을 두고 보았다고 썼다. 그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닐까, 너무 이른 이야기는 아닐까, 누군가를 너무 상처 입히는 이야기는 아닐까 망설이다가. - P162
고사리를 캐내 찌고 말리는 과정의 수고를 이야기하며 한가닥도 흘리거나 낭비되지 않도록 고사리를 잘 불려 볶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 P163
자기 자신에 대한 은밀한 혐오와 수치심, 그것을 그 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파란색 흉으로 내 얼굴은 완전해졌다, 완전히 흠난 것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 P173
그 시절 내게 가장 경이로운 타인은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 삶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고 죽을 때까지 그걸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며 자란 데엔 몇가지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떳떳하지 못하거나 징그럽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거울과 내 얼굴을 피해 다닌 이유는 한가지였다. 나는 나를 떳떳하지 못하다고, 징그럽다고 여겼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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