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책 만드는 법 - 원고가 작품이 될 때까지, 작가의 곁에서 독자의 눈으로 땅콩문고
강윤정 지음 / 유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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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분야의 독자가 아니었던 나의 취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책이 어떤 책인지, 누가 왜 사서 읽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판단을 하는 사람,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편집자였습니다.- P12

처음엔 이 과정의 지난함에 쉽게 지쳤다. 넘어야 할 산으로만 보였다. 내 생각엔 내 생각이 맞으니까. 그러나 공동의 목표는 이 원고가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이 사랑받는 책이 되는 것. 이제는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명분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도 배우고, 상대에게 설득당하면서도 배운다고 생각한다. 그편이 정신건강에 좋고 일을 유연하게 해 나가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성향이 각각 다른 작가와 매번 새로이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니까. 잊지 말자. 작가는 내 뜻을 관철시켜야 하는 상대가 아니다. 편집자는 작가의 러닝 메이트다.- P38

교정교열 한 내용을 작가가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우선 내 앞에 교정지가 있다면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P42

설령 작가가 언짢아할지라도 내 작업물이 ‘틀린’ 것은 아니니 위축되거나 잘못했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국내문학의 교정교열 내용의 최종 판단은 대개 작가가 한다. 원고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저작권자인 작가에게 있다. 그러니 교정교열을 보며 마음에 걸리거나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과감하게 표시하여 작가가 고민해볼 여지를 많이 남기는 게 좋다.- P44

요컨대 독자는 책의 내용을 모른 채 책을 집어 구매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제목은 책의 만듦새에 참 중요하겠다. 내용보다 먼저 읽는 글이 바로 제목이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과하게 얘기하자면 ‘내용보다’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편집자에게는. 좋은 원고를 쓰는 것이 저자의 몫이라면 그것을 독자가 집어 들고 싶은 책으로 만드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니까. - P68

어떤 경우에는 내가 디자이너의 스타일에 맞추고, 또 어떤 경우에는 디자이너가 내 스타일에 맞춰준다. 내가 그리는 책의 꼴이 명쾌할 때는 디자이너가 나에게 맞춰 줬으면 싶고,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는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줬으면 싶다. 물론 매번 뜻대로 되진 않는다.- P81

이럴 땐 서점에 간다. 표지 시안을 들고 책이 놓일 매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고 매대 전체를 눈에 담아 본다. 시안 한 장을 들고 볼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여러 시안을 올려 놓고 매대 전체를 사진 찍는다.- P91

단순히 내 눈엔 그게 더 예뻐 보인다 같은 말로는 좁힐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이 책이 궁극적으로 놓일 공간에서 찾아보는 것. 꼭 한번 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P93

일단은 눈에 보여야 산다. 제일 먼저 띠지를 버리는 독자도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 띠지의 역할은 충분하다. 띠지를 둘러 표지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완성도’란 무엇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보자.- P94

그러므로 이 책의 표지 문안 가운데 편집자인 내가 쓴 카피는 딱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표지 문안인데 어떻게든 카피를 만들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 카피를 모두 걷어 내 보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든다면. 본문에서 고른 문장 역시 편집자의 선택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문학작품은 그 작가의 문장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잊지 말고, 그것을 잘 고르고 배열하는 데 더 집중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P115

아무리 근사한 책이라도 독자가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이럴 때 편집자가 하기 쉬운 선택은 다음과 같다. 마케팅을 아쉬워하고, 회사의 규모와 그에 따른 홍보비 책정을 아쉬워하고, 독자의 눈이 어둡다고 아쉬워하고, 출판 시장이 영세하다고 아쉬워하는 것. 그러나 아쉬움과 원망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또한 여러분도 나도 알고 있다.- P134

기획 단계에서 편집자는 아이템 하나를 쥐고 분야, 저자군, 예상 독자, 시장을 다방면으로 분석한다. 어떤 책은 머릿속으로 굴렸을 땐 그럴듯해 보였으나 ☞그 책을 쓰기에 적합한 저자가 없거나 ☞읽을 사람이 적거나 ☞시장에서 유사 도서의 판매가 예상보다 안 되었던 것으로 판명 나 일찌감치 버려진다. ☞잘 쓸 만한 저자가 있고 그 저자가 섭외 가능하며 ☞예상한 기간 내에 집필이 가능한 책, ☞독자에게 유익하며 ☞가능한 한 많은 독자의 관심이 가닿을 만하나 책, ☞그러면서도 내가 속한 출판사의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책이라는 다섯 가지 울타리를 크게 쳐 둔 뒤, 그 안에서 ‘누가/왜 지금/다른 책이 아닌 바로 이 책을 읽을까’에 대해 답을 적어 나간다. 그 답이 가장 객관적이고 분명한 기획이 좋은 기획, 책이 될 만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P152

내가 맡은 책이 내 취향과 안 맞는 책이라는 건 전혀 문제도 되지 않고 문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원하는 책만 할 수 없고 그건 연차가 낮을 때에 더욱 그렇죠. 어떤 원고를 맡았건, 그 원고에 오류가 없도록 다듬고 좋은 점을 발견해 그것이 묻히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하는 것만 고민해도 벅찹니다. 물론 그 책을 만드는 동안 덜 즐거울 순 있습니다.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취미가 아니고 일이니까요.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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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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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목은 진작 실천해야 했던 것들이라서, 어떤 대목은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 좀 아팠다. 업계 동료들에게만 표출할 수 있는 불만(?) 같은 것을 활자로 보고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고백한다...

타이완의 작가 탕누어는 출판사 편집자들을 굉장히 신기한 존재로 묘사한 적이 있다. 편집자들은 2000권밖에 안 팔리는 책들을 줄줄이 생산해내는데, 여기엔 "어떤 가치에 대한 신념이 확실히 존재하고 그 가치가 그들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2000부가 요즘에는 1000부로 줄었으니, 고쳐 말하면 편집자들은 ‘1000권밖에 안 팔리는 책을 줄줄이 생산해내는’ 기이한 존재다. 그것을 두고 ‘고귀하다’고 평가해주면 요즘은 반은 칭찬으로, 반은 비웃는 소리로 들린다. 부는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요구되는 세속의 진리인데, 부는커녕 자기 밥벌이도 못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적이게도 편집자는 출판의 지속성을 위해 종종 좋은 책들이 무덤 속으로 향하도록 방치한다. - P29

지성, 전문성, 근면성, 인내심을 갖춘 팩트체커들은 실제로 만나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이해심이 많아 놀라움을 자아낸다. 왜 그럴까. 타인의 오류를 지적할 때면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부드러워야 하며, 또 인간이라면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오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류를 인정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 일을 배우고 있다.- P102

당시에는 독자를 저자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놓고, 이제 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게 떳떳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나도 이런 치부를 드러내고 싶진 않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란 대개 이런 식으로 쓰이며, 책의 단점은 발설되지 않은 채 편집자의 마음속에만 남는다.
이것이 왜 안 좋은가. 독자를 약간 속인 것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 편집자는 이런 마케팅 공식을 따라야 하며, 저자보다 앞에서 자기 목소리와 평가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편집자 개인을 위해서는 그리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책 홍보 글을 쓰면서 자기 생각을 그에 따라 조정해가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P143

편집자는 속으로 말한다. ‘우리는 수공업자가 아니며, 예술가도 아니다. 소싯적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수많은 인문/사회과학서를 섭렵하며 코즈모폴리턴으로서의 비평적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기획한 진지한 책들은 판매가 잘 되지 않아 현실 감각 없는 무능한 편집자가 될 뻔했고 그 기분은 비참했다.’- P153

책의 계약 기간(유효기간)은 5년밖에 안 되고 요즘 신간들은 6개월(심지어 한 달) 안에 승부를 봐야 하므로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는 편집자의 계산은 나름 현명하다. 5년 뒤를 생각하라고? 그건 우리가 잘해낼 수 없는 일이다. 미래의 출판 방향이 어떨 것 같냐고? 독자를 잘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까. 다만 오늘의 성공 없이는 내일도 없다. 그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이유다.- P153

편집자는 칼 같은 판매자의 마음을 견지하기도 하지만, 일할 때도 머릿속은 독자라는 자아와 분리되어야 함을 잊은 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향해 내달린다. 시장에서의 퇴출을 목격하고도, 연민/정의/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마케터의 마인드는 한쪽으로 미뤄두게 된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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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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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목들에서는 마음이 아주 많이 동요되었고, 아직도 그런 이야기에 크게 흔들린다는 것에 아늑하고도 가벼운 낭패감이 들었다. 가벼운 낭패감인 이유는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몇 부분에서는 발표한 해를 보고, 그러니까 캐럴라인 냅이 그 글을 썼을 때 몇 살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안도하기도 했는데, 아직 나는 그 나이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문제를 극복하지 않아도 될 몇 년의 유예시간을 받은 것 같아서다.

내가 고립되고자 하는 충동에 본격적으로 굴복하기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 술을 끊은 뒤였다. 이전까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술로 무디게 누그려뜨려왔던 감정들이--두려움, 오래된 상처와 실망, 너무 오래되거나 갓 생겨난 터라 그 근원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던 슬픔--그때 온 기세로 돌아와 들이닥쳤다. 그러니 내가 고분고분 웅크리기 시작한 것은, 고립의 목소리가 너무나 유혹적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 충동에 탐닉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 아니면 자기 파괴적인 일인지 헷갈린다.- P24

내 시간을 내 맘대로 보내고, 생활 규칙을 알아서 정하고, 내 취향을 맘껏 탐닉할 자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하고도 소통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 성취감.- P43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가더나, 외식을 한다거나--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P48

나는 나이가 들수록 우정에 좀 더 냉정해졌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친구 관계를 좀 더 쉽게 끊게 되었고, 좋은 우정과 그저 그런 우정을, 기능하는 우정과 망가진 우정을 좀 더 빨리 구별하게 되었다.- P69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 P94

내가 그런 언쟁에 대해서 놀라는 점은, 가벼운 짜증이나 약간의 의견 차이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파국적 결과가 올 수 있다는 듯이 그런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자들의 관계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자친구들 사이의 친밀감과 따스함과 애정은 최초의 중요한 유대감이었던 어머니와의 유대감에 필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능가할 수도 있는 듯싶다. 우정에는 우리가 어머니와 나눴던 친밀감보다 더 평등하고 어쩌면 더 풍성할지도 모르는 친밀감을 안겨줄 가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멋진 친구가 나타난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슈퍼맘이라고 적힌 스위치가 탁 켜지고, 우리가 한때 가졌다가 잃었거나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한 갈망이 불붙는다. 그것은 완전한 신뢰와 솔직함, 흔들리지 않는 충실함과 애정, 감정적 동조라는 환상이다.- P100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 내게 벌어진 일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세부적으로 적어서 활자로 고정해두는 행위가 내게는 늘 유용했다. 그것은 꽃을 책에 끼워서 압화로 간직하는 일, 혹은 추억의 기념품을 특별한 상자에 보관하는 일과도 좀 비슷하다. 일단 세부를 보존해두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덜고서 다른 일로 삶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 P141

이제 나는 어머니가 외부적인 문제들로 투덜거렸던 것은 자신에게 더 깊은 불안을 안기는 문제을--자신의 건강을, 변함없는 슬픔을, 두려움과 회한을--투덜거리기에는, 특히 딸에게 투덜거리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서였음을 안다. 어느 정도는 나도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그 밑에 깔린 불안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 반응으로 불쑥 짜증과 죄책감을 느끼곤 했던 것은, 아마 어머니의 괴로움을 직면한 나 지신이 무능하고 혼란스럽게 여겨져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불안에 괜히 내가 불편한 것,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지만 방법을 모르는 데 대한 답답함, 어머니의 불안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저절로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아마도 유아적인) 마음.- P148

나는 젊었고, 외로웠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텐데, 화나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를 굶겼다.- P158

이것은 내 행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결코 충분히 갖지 못할까 봐 겁먹었다는 사실, 음식은 그 사실을 끔찍하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을 통제하는 것은 그런 갈등을 표현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화나 있었다. (...) 하지만 그 화를 표현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대신 그것을 몸에 걸치기로 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지 보여?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불행한지 보여? 나는 사람들이 겁났고, 실망할 것이 겁났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는 식욕뿐 아니라 감정적 욕구와 성욕까지 모든 욕구가 겁났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의지로 없애버리기로 다짐했다. 욕구가 없다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일도 없으니까. - P166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절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 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혹은 왜 그 일이 가능해지는지,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가장 아픈 모서리들이 깎여나가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내가 얼마나 멀리 나아왔는지를 떠올렸다.- P192

술을 끊는 일은 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 보며 서 있게 된다. 저 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P199

회복의 기쁨 중 하나는 내가 술을 끊으면 닫힐 거라고 생각했던 문들이 사실은 술을 끊음으로써 열린다는 것을 느려도 착실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P222

마취제 없는 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 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반복하여 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다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한다. - P224

한편으로 나는 이런 질서에서 좀 더 문제적인 충동이 가하는 부담을 느끼는데,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이 점이다. 이런 행동에는 큰 두려움이 담겨 있고, 심한 경직성이 담겨 있고, 외적인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내면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 담겨 있다.- P266

정리벽이 있어도 보통 혼자 사는 한은 괜찮다. 자신의 사적인 경계선 안에서 그 충동을 탐닉하여, 맘껏 줄 세우고 박박 닦고 하는 동안에는.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생활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할 때, 그래서 인간관계라는 요소가 방정식에 첨가될 때다. 그리고 이 인간관계란 알다시피 무척 지저분할 수 있다. 누가 내 집에서 공간을 어지럽히면, 나는 마치 그 공간이 내 내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양 심하게 위협당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내 조리대를 어지럽히면, 그는 내 삶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누가 내 부엌을 헝클어뜨리면, 그는 내 감정을 헝클어뜨리는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비합리적이란 건 안다. 그리고 나도 애쓴다.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남을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쓴다.- P268

춥고 어두운 밤, 무거운 담요와 코트, 햇빛이 아니라 난로 불빛이 주는 안전한 기분이 감싸이고 싶은 갈망을 아직도 느낀다. 이것은 은신을 바라는 마음이다. 여름은 왠지 너무 노출되는 것 같다는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슬픔의 저류는 차가운 날씨에 더 잘 녹아든다. 그런 날씨여야 슬픔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바깥세상으로부터도 숨기기가 더 쉽다.- P294

이제 나와 운동의 관계는 더 풍성하고, 더 복잡하고, 덜 자기파괴적이다. 예전에는 방정식이 단순했고, 관계가 일차원적이었다. 운동은 내게 칼로리를 소비하는 일일 뿐이었다. 따라서 무조건 많이 할수록 더 좋았고, 몸이 아픈 건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나는 조깅이 싫었다. 지루했고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괴로움이야말로 핵심이라고 여겼고, 괴로움을(육체적 외로움과 정신적 괴로움 둘 다를) 견뎌야만 나 자신에게 다른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떻게 해서든 자격을 따내지 않고서는 내가 먹을 자격이(혹은 쉴 자격이, 혹은 자신을 괜찮은 인간으로 여길 자격이) 없다고, 어떤 것이든 즐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 P310

밥은 만약 자신이 형제에게 직설적으로 화낸다면 관계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혼자 속으로만 걱정하지만, 밥이 지금까지 지켜온 침묵도 비록 조용한 방식일지언정 덜 파괴적이진 않은 방식으로 이미 관계를 좀먹었다.-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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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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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깨어나는 시대에 산다는 건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동시에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 죽은 자들 혹은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 이미 수백만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몽유병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이 깨어남은 처음으로 집단적인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즉, 이제 눈을 뜨는 게 더는 외로운 일이 아니다.- P26

문학을 급진적으로 비평하고자 하는 충동에 빠진 페미니스트는 무엇보다 이 일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자신을 어떻게 상상해왔는가, 우리의 언어는 우리를 어떻게 해방했고 또 어떻게 가두어왔는가, ‘이름 짓기‘라는 행위 자체가 지금껏 어떤 방식으로 남성의 특권이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름 짓고, 그리하여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실마리로 삼을 것이다. 모든 새로운 혁명마다 낡은 정치 질서가 다시 살아남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성정체성의 개념 변화가 필수이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하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이제 막 움트는 의식을 위한 언어와 이미지를 찾고자 노력하지만, 과거에서 우리를 도와줄 것은 거의 없다.- P26

몇 년 만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을 다시 읽다가 그 산문의 어조에 어떤 안간힘과 수고로움, 집요한 조심스러움이 깃들어 있는 걸 깨닫고 굉장히 놀랐다. 그 어조가 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에게서, 또 다른 여성들에게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어조였다. 남자들이 가득한 방에서 자신의 위상이 말로 공격당하고 있는데, 자신의 분노가 만져질 듯 생생한데도, 절대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기꺼이 침착하고 초연하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여성의 어조였다.- P29

셋째가 태어났을 무렵 나는 스스로를 실패한 여성이자 실패한 시인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제3의 명제를 찾아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운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에 떠밀려 들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일이었다. 한때 자기 의지와 에너지를 거의 황홀경의 상태로 경험했던 여자, 도시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거나, 한밤중에 기차를 타거나, 교실에서 타자기로 글을 쓰던 여자를 까맣게 잊고 표류한다는 생각이 정말 무서웠다.- P37

그 시절 나는 늘 사랑의 실패자로서 갈등을 느꼈다. 한때는 내가 섹슈얼리티와 일과 자녀 양육이 공존하는, 다시 말해 대다수 남성에게나 가능한 완전한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의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늘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해도 충분하지 않은 단 한 가지를 원했다. 바로 생각할 시간, 글을 쓸 시간이었다. - P39

나로선 ‘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전적이지 않은 책을 쓰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놓고 몇 달 동안 내 삶의 고통스럽고 문제 많았던 영역에 뛰어드는 것을 미루거나, 준비 과정으로 역사 연구와 분석에만 몰두하며 보냈지만, 결국 이 책은 내 삶의 바로 그 영역에서 나왔다. 나는 점점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꺼이 공유해야만 여성들이 진실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작가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거짓되고 작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통렬히 인식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이야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죽은 이들을 포함해—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P133

사랑과 미움의 파도에 휩쓸린다. 심지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질투한다. 아이가 자라기를 희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아이의 존재에 낱낱이 매여 있으면서 책임감에서 벗어나길 갈망한다.- P138

이제 스물한 살이 된 큰아들이 앞 문단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늘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매 순간 상대방을 사랑하는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다. 나는 아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여성들은—무엇보다 어머니들은—그런 식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여겨졌다고.- P139

"내가 무슨 부탁을 해도 남편은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언제나 내 편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 내가 느끼는 우울과 울컥 터지는 분노, 덫에 걸린 느낌을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짐으로 여겼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는데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P145

물론 셋째의 탄생을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영장이 아니라 ‘죽음에 대항할 또다른 무기‘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정신적 여유와 함께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물리적인 여유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 내가 내 삶을 위해 아이들의 삶을 통해서, 아이들의 삶에 맞서, 아이들의 삶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내게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낳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다소 암울하고 불투명한 방식이지만 그 과정에 임신과 출산까지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P148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한때 엄마였던 우리가 영원히 엄마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아이를 놔주는‘ 과정은—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지만—가부장제 문화를 거스르는 반역 행위다. 그러나 아이를 놔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겐 다시 돌아갈 자신이 필요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가부장제와 심리학이 결탁해 여성성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린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와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체와 신체의 변화뿐 아니라 성격의 변화도 느낀다. 종종 자기절제와 자신을 불로 지지는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했다‘라고 여겨지는 자질들을, 즉 인내심과 자기희생과 한 인간을 사회화하기 위해 사소하고 틀에 박힌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의지 등을 습득한다. 또한, 놀랍게도 우리가 알았던 그 어느 감정보다 더 강렬하고 격한 사랑과 폭력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낀다.- P159

이 책 전체에 이어질 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국, 내가 열중한 것은 한 여성 개인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여성과 함께 마음과 몸의 분리를 치유하겠다는 결심,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서서히 나는 ‘나의‘ 모성 경험에 모순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많은 여성의 경험과 다르고, 나의 경험이 유일하지 않으며, 내 경험이 유일하다는 환상을 걷어낼 때야 비로소 여성으로서 진정한 삶을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P164

어머니에 관해 쓰기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쓰든 그것은 내가 말하는 나의 이야기고 내가 바라본 나의 과거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내 풍경이든 어머니의 풍경이든, 오래된 분노의 조각들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것이다.- P169

나의 일부분은 어머니와 너무도 닮았다. 아직도 어머니를 향한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음을 알고 있다. 철없는 행동을 했다고 네 살에 벽장에 갇혔을 때의 분노(아버지의 지시였지만 실행은 어머니가 했다), 얼굴에 틱이 올 때까지 너무 오래 피아노를 연습해야 했던 여섯 살 아이의 분노(역시 아버지가 고집해서 피아노를 쳤지만 시킨 사람은 어머니였다)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 어머니가 된 나는 아이의 얼굴에 나타난 틱 증상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날카로운 죄의식과 고통의 칼날이었음을 안다.)- P173

그리고 어머니 안에도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음을 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향해 압도적이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있다. 내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었을 때의 조건, 불가능한 기대치, 임신한 여성을 향한 아버지의 혐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향한 아버지의 혐오를 생각해보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어머니를 위한 비애와 분노로 바뀌고, 다시 어머니를 향한 분노로, 즉 오래되었으나 정화되지 않는 아이의 분노로 바뀐다. - P174

나는 더 이상 어머니와 치유를 위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환상, 그 대화 속에서 서로 상처를 전부 드러내며 모녀 사이에 공유한 고통을 초월해 마침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런 환상은 치유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환상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지금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인정할 수 있다.- P174

시인 린 수케닉이 만든 ‘모성공포증‘이라는 용어는 어머니나 모성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수많은 딸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타협과 자기혐오를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웠으며, 여성 존재에 대한 제약과 비하를 강제적으로 전수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 힘이 어머니에게서 출발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 그러나 모성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어머니를 미워하는 곳에는 어머니를 향해 깊이 끌리는 힘도 있을 것이다. 방심하는 순간 완전히 어머니와 똑같아질 수 있다. 청소년이 된 딸은 어머니와 전쟁을 벌이며 살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옷과 향수를 빌릴 수도 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와 방식과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P190

많은 딸이 너무도 쉽게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건 뭐든지‘ 받아들이며 살았다고 어머니에게 분노를 느낀다. 어머니의 희생은 어머니 자신에게도 치욕이었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지켜보는 딸까지도 훼손한다.- P203

생존을 위해 온종일 힘겹게 일하다가 하루 끝에 어머니로서 에너지는 바닥이 난 상태로 무감각하고 지친 모습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사회제도나 모성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모진 목소리, 멍한 눈동자, 자신을 안아주지 않는 어머니,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딸이 자기 자신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애정과 지지를 보내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고 느끼는 가정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보충한 게 아니라 대신해 양육하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부재한 이유가 무엇이든 어머니를 희생시킨 대가로 틀림없이 사랑받는다는 게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그는 남성으로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대신한다면 어머니를 두 번 잃는 셈이다.- P205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는 그저 어린이 책이나 영화, TV, 교실에서 보여주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이미지와 싸우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희생자 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207

과거 세대가 아무리 나쁘게 행동했더라도 당신들 세대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말로 졸업식 축사를 끝내는 건 너무도 진부한 일입니다. 그보다는 1979년 졸업생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선배 자매들의 가치를 지켜주십시오. 역사에서 배워주십시오. 여성 조상들에게서 영감을 구하십시오. 이 역사가 여러분에게 가르칠 게 빈약하다면, 역사를 잘 모르겠다면, 여러분이 지닌 교육적 특권을 이용해 배우십시오. 특권을 지닌 일부 여성들이 어떻게 더 큰 해방에 타협해왔는지, 또 어떤 여성들은 해방을 심화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특권을 위협에 빠트렸는지 배우십시오.- P232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속한 가족과 사회가 심각하게 정보를 숨기고 빼앗아가는 바람에 이 일이 내게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나 혼자 이해하려고 애써야 했다는 사실에 뒤늦은 분노를 느낀다. 나는 한 번도 저항을 배운 적이 없고, 오직 못 본 척하는 법만 배웠다는 사실이, 반유대주의 자체를 표현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P296

살다 보면 그 순간 곧바로 배신임을 알게 되는 배신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 일도 그랬다. 그 일 말고도 너무 반복적이고 일상적이어서 어떤 기억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오직 비참함과 점점 무뎌지는 자기혐오의 찌꺼기만 쌓이는 배신도 있었다. 이런 배신은 말이 아니라 침묵의 형태를 띨 때가 많았다. 반여성적인 농담이나 인종차별적 농담, 반유대주의 농담을 하며 다들 웃는 앞에서 침묵하기. 침묵하고 나서 망각하기.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 그 용기와 웅변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한 사람이 억압자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못 들은 척하기. 저 사람이 정말로 그럴 의도는 없었어. 진짜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그러나 배신은 주전자 속의 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채로 쌓이고 쌓여간다.- P300

그러나 우리는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 우리를 연결해주길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정당해질 때까지 발언을 미룰 수가 없다. 순도 100퍼센트는 없으며 우리 생애에 이 과정의 끝도 없다.
- P316

그러므로 이 글에도 결론이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1982년 우경화된 미국에서 나도 노란별을 달겠다고 말하는 방식만으로는 안 된다. 책임과 책임 범위의 확대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남은 생애 동안, 다음 반세기 동안, 내 정체성의 모든 면이 전부 개입되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정체성들 말이다. 특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 남성 폭력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세 아들을 둔 여성.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여성. 피 흘리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춘 여성, 아름다운 언어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억압자의 언어가 때로는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을 아는 시인. 저항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는 여성.- P317

1956년부터 내가 쓴 시마다 연도를 써넣기 시작했다. 시를 캡슐로 감싼 하나의 사건,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기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이 변화 중이고 내 작품이 변화 중임을 알았기에 독자에게도 내 존재 의식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하나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는 완곡한 정치적 주장으로, 시 텍스트가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과 분리된 채 읽혀야 한다는 지배적인 비평의 생각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시를 역사를 벗어난 곳이 아니라 역사적인 연속체 안에 위치시킨 일종의 선언이었다. - P347

그러나 우리는 오직 여성 공동체 안에서만 살면서 글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인종차별이 모든 형태의 물리적, 제도적, 정신적 포격을 당연하게 여기고 일곱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국가에서, 정치문화운동을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다. 미국의 예술은 캡슐에 싸인 하나의 상품으로,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인공물로, ‘예술 행정가‘라는 특별한 직원을 요구하는, MFA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정확한 이유를 몰라도 ‘가져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 시인, 작가로서 나는 이러한 위치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나라의 피와 빵에 관한 현실과 함께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P351

나는 토종 파시스트 성향과 자유 시장주의 실천이 동맹을 맺고, 언어 안에서 의미라는 알맹이를 빼버리려고 노력해온 나라의 작가다. 나는 내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낼 수 없도록 차단당함과 동시에 내가 가장 들어야만 하는 목소리들을 듣지 못하게 차단당하는, 이중의 차단을 종종 느껴왔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언어를 옹호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의 글이 읽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필요한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내게는 내 작품을 비옥하게 만들고 영속시켜준 거의 모든 게 위험에 처했다는 느낌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글로 써야 하는 소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의미로 ‘나의 시대에서 비롯된‘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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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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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나의 어린 환자들이 압도적인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모습들을 목격했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모습에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이자 의사로서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P20

이를 알아내려면 엄청난 노력을 쏟아야 했다. 내 인생의 몇 달이 섬광처러머 지나갔다. 오로지 펍메드PubMed와 그래놀라 바와 눈의 피로만으로 채워진 시간들이었다.- P47

우리 대부분은 과거에 일어났던 슬프고 마음 아픈 일들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트라우마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죄인이든 성자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끈질기게 이어지는 생물학적 결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우리와 우편번호가 다른 지역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한 것이다.- P95

유전자와 환경이 서로 무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특정한 유전자 암호들이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들과 건강을 결정하며, 우리가 하는 경험들은 성격이나 가치관처럼 더 바꾸기 쉬운 것들을 형성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유전자와 환경을 각자 별개의 모퉁이에 밀어넣은 결과, 본성과 양육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오랜 논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지만, 과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논쟁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음을 꽤 확정적으로 말한다. 사실 우리는 환경과 유전자 암호 모두가 생명활동과 행동 모두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생각해보면, 본성 대 양육 논쟁이 명백한 승자 없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것도 놀랍지 않다.- P165

내가 억척스러운 과학자보다 더 좋아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억척스러운 여성 과학자다.- P172

지난 몇 달간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적절치 않은 상황에서도 수차례 여러 사람들에게 꿋꿋이 이 이야기를 해온 덕에 내 주장은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로 다듬어져 있었다.- P183

병워협의회에서 마저리를 만난 그날 이후로, 나는 강연이나 발표를 마치고 나면 테이블 위를 치우거나 음향 장비를 정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반드시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전문가들이 내 발표에 얼마나 호응했는지와는 별개로, 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P191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과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여러 영향을 해결하기 위한 임상 프로토콜이 아직 우리에게 없다면, 이제는 그걸 만들어야 할 때였다.- P191

임상의로 수년간 일한 뒤 리버먼 박사는 아이들이 자기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지어내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며, 명확한 설명이 없을 때는 스스로 설명을 만들어낸다. 아동기의 발달단계에 걸맞은 자기중심주의와 트라우마가 만날 때 어린아이들은 종종 자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빠진다. - P196

다학제 순회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이 관행이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에너지들을 여러 곳에 분산하거나 혼자 여러 역할을 수행할 필요 없이 내 소임을 더 잘해낼 수 있게 되었다. 진료를 하다가 환자들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어려운 상황들이 아이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문제를 누군가에게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거나 심리치료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 윌리엄스와 클라크 박사에게 일을 넘기고 내가 진료실에서 하는 일과 그들의 일이 서로 잘 어우러지게 하면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진료에 집중할 수 있어서 환자들에게 더 나은 의사가 되었고, 아이들의 다른 필요들은 그 문제의 전문가들이 맡아서 처리했다.- P265

그러나 내 소임을 잘해내려면 그 모든 것을 다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날 오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열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ACE 검사를 받으려면 이후의 일은 우리 팀에게 믿고 맡겨야 했다. 비식별 선별검사를 통해 나는 라일라가 잘 자라지 못하는 것이 유독성 스트레스 때문이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라일라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도록 하는 것뿐이었고, 그것도 매일 밤 자정까지 진료소에 남아 있지 않으면서도 다른 모든 아이에게도 믿음직하게 그 일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빠르고 쉽게 처리해야 했다.- P282

"너 괜찮아?" 오빠가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전혀 안 괜찮았다. 내겐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이게 내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일을 해오며 수없이 목격한바, 내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이 결코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우리 가족이 이 일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두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첫째는 아이들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가 든든한 지원과 보살핌을 얻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크나큰 차이를 만들었다.-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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