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3 세트 - 전6권 (문고판)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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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북보다 보기 편한 문고본 좋아요! 이번 여름 문고본으로 마구 읽어제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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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모험>은 발터 뫼어스의 작품 중에서도 좀 튀는 경우다. 먼저, 차모니아의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서로 꽤나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작가의 여타 작품들에 비교적 익숙지 않은 독자도 접근이 용이하달까. 이미 여럿 소개된 작품 중 무엇부터 시작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입문서 삼아 발터 뫼어스의 세계를 맛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이 유독 튀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작가 스스로 일러스트를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차모니아 월드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내며 표지부터 책 속 구석구석까지, 어떻게 보면 귀엽고 어떻게 보면 징그럽고... 어쨌든 일반인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모든 삽회를 몸소 그려온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림 없이 텍스트뿐이냐. 결코 아니지. 이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귀스타브 도레이다. 현재 독일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작가가 전설적인 선배의 삽화들로 이야기를 엮어내 경의를 표한 것이다. 한 편의 오마주이기도 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당연히 '귀스타브 도레'.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데생 이외에 다른 공부는 나 몰라라 하는 소년의 모습은 역시 작가가 상상한 도레의 어린 시절일 테고. 


대단한 것은 매 단계마다 일러스트와 이야기가 딱 붙는 것은 둘째 치고, 어떻게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매끄럽게 이어질 만한 그림들을 쏙쏙 골라냈나 하는 것이다. 도레가 일러스트를 그린 작품집만 이천 권이 넘는다는데!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의 작품인 만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한 편의 잘 짜인 모험담일 뿐 아니라, 신화적인 일러스트레이터와의 콜라보라는 대담한 시도를 확인하는 쾌감 또한 상당한, 꽤 오랜만에 만난 다이나믹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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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 빠진 훈제청어의 맛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3
앨런 브래들리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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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제목과 함께 돌아온 화학광 소녀 탐정 플라비아가 돌아왔다. 만세!

 

이번 권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점은 역시 엄마를 둘러싼 물음이 조금씩 해결될 징조가 보인다는 것.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시리즈는 명탐정 코난처럼 전체를 관통하는 수수께끼가 있고, 매 권마다 독립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수수께끼도 조금씩 베일이 벗겨지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경우 축이 되는 수수께끼란 바로 플라비아가 어렸을 때 설산에서 조난당했다는 엄마의 존재. 1, 2권 때만 해도 엄마가 드리운 그림자가 그렇게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역시 3권을 읽고 나니 그게 있어서 이 시리즈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겠음! 그도 그럴 게, 플라비아가 이렇게 맹랑하고 대담한 건 한창 귀여움을 받아야 할 시기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법을 터득한 결과고, 화학 마니아가 된 이유도 식구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집 안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서재에서 화학책을 발견해서였다(심지어 엄마가 보던 것). 행동력도 애를 낳자마자(!) 티베트로 등정을 떠난 엄마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고. 넌 주워온 아이라는 둥, 엄마가 죽은 건 너 때문이라는 둥 언니들이 괴롭히는 것도 실은 플라비아가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게 샘나서는 아닐까?

 

물론 새로운 사건 자체도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2권보다 호흡도 빠르고 여기서 빵, 저기서 빵, 사건이 잇달아 발생해서 정말 후딱후딱 책장이 넘어간다. 결국 멋들어지게 모든 사건을 하나로 수습하는 작가의 재능에 박수를.

 

참, 이번 권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도거♡가 농담도 한다. 전쟁 트라우마 때문에 살짝 정신지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간 특이한 집사(겸 정원사 겸 아버지의 심복 겸...) 도거는 뭔가 이 세상과 살짝 유리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플라비아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귀신같이 알아서 챙겨주는 존재다. 엄한 아버지나 극성맞게 따라붙으며 잔소리를 해대는 가정부 멀릿 부인과 달리 플라비아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라 하겠는데, 원래 말수도 극히 적고 필요한 말만 하던 그가 왠일로 농담을 다 한 것이다! 처음에는 플라비아도 이게 농담이 맞나 긴가민가 했지만 결국 농담으로 되받아치기까지 하하하.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짜잔 나타나는 도거라 등장하는 장면이 적긴 하지만 다음 권부터는 더 많이 보길 바라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흐흐.

 

깨알 같은 소설이라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았지만ㅠㅠ 마지막으로 딱 두 가지만 더 말하자면, 이 책에서 나는 화학실험실의 가장 기발한 이용 방법을 알았고, 소설을 끝맺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을 알았다. 각별히 아끼는 문장들이기에 아래 인용을.

 

나는 붕규산염 증발접시에 계란 여섯 개를 깨뜨려 또다른 버너 위에 올려놓고 유리막대로 휘휘 저었다. 그러자 곧 실험실 한가득 군침 도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제 토스트를 굽자. 한 번에 두 조각을 겹쳐서 구울 수 있어. 이번에도 집게를 사용해. 앞뒷면을 굽고, 그다음에는 겉과 속을 뒤집어서 구워."

나는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에 저절로 유능한 실험실 요리사가 되었다. 꽤 최근 일인데,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연금 조치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식료품 저장실에서 쇠기름을 가져다가 목이 넓은 삼각플라스크에 넣고 끓여서 점박이 푸딩을 만들었다. 덤으로,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지만 나일론은 213도까지 가열해야 녹기 때문에 필리가 애지중지하는 스타킹이 푸딩 봉지로서 완벽할 거라는 가설도 검증해냈다.

세상에는 분젠버너에 구운 소시지보다 맛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뭔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기름이 줄줄 흐르든 말든 아무렇게나 맨손으로 들고 먹으면서 느끼는 자유의 감정. 포슬레인과 나는 선교사들의 발길이 끊긴 탓에 오래 굶은 식인종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어치웠다. 오래지 않아 빵 부스러기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이제 우리 사이에는 막 친해지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직 그렇게 따뜻하거나 다정하진 않지만, 차갑지도 않고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는 그런 침묵. _207

 

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림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나 또한 알고 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것뿐이다. _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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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소녀 블랙펜 클럽 28
마야 유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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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의 문법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이 작품을 읽고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하기도 했었다. 뭐 탐정이 이래!

 

역자 후기를 보자면 일본 미스터리에 가장 먼저 트릭 및 사건의 논리적 해결을 중시하는 이른바 '본격 미스터리'가 있었고, 80년대 후반에 그보다 새로운 '신본격'이 등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작가는 신본격 중에서도 2세대. 모던이 뭔지도 모르면서 포스트모던을 알겠다고 덤빈 꼴이었다.

 

그래도 이어서 역자 후기를 보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본격'의 요소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마야 유타카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바로 '명탐정의 탄생'이었단다. '어릴 적부터 셜록 홈스나 긴다이지 고스케처럼 수수께끼를 화려하게 풀어내는 탐정을 동경'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명탐정이 되었는지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고. 아하. 미스터리에는 전지전능한 멋진 탐정이 등장한다는 게 바로 '본격'이, 그리고 나 역시도 의심하지 않았던 전제조건이고, 마야 유타카는 그 지점을 비튼 거구나.

 

뭐 본격이든 신본격이든 2세대든 몰라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엿한 탐정으로 자립하기 이전의, 어찌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도(?) 할 수 있는 한 소녀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게 이 책의 매력이라는 사실만 캐치할 수 있다면! 사건 못지않게 탐정의 이야기가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는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에서 돌려보던 <명탐정 코난>과 비슷한 것도 같다. 시종 할아버지의 명예밖에 외칠 줄 모르는 김전일보다 어려진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던 코난에게 더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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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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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어머니는 엄청나게 긴 주삿바늘을 심장에 꽂아야만 했다. 우리 세 남매는 울기만 했다. 어머니 몸에 그 정도 바늘이 꽂히는 것도 두 눈 뜨고 못 보는 우리 남매가 어머니 없이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얼마나 울었을까?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차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과 영영 헤어지는 일을 모두 끝마쳤다.-22쪽

정말 여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 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25쪽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29쪽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 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열무를 위해 먼저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물론 어렵겠지만.-31쪽

그나마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34쪽

아마도 같은 해 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 소설가 김소진 선배가 암으로 죽었으니 문상가자고 말했다. '절대로 가면 안돼!'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왜 가면 안되는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그 느낌에 반항하듯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책 날개에 실린 사진을 확대해놓은 영정에 두 번 절한 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앓았다. 소설이 뭔데? 청춘이 뭔데? 다 귀찮아졌다. 지긋지긋했다. 남은 평생 소설 따위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은 뒤, 문방구에서 이력서 용지를 사와서 여기저기 취직원서를 냈다. 그리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일산에서 장충동까지 매일 왕복 세 시간의, 여행에 가까운 출퇴근을 했다. 버스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때로 김소진 선배의 영정이 떠올랐다. 겨울 버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입김이 어린 뿌연 유리창 위로 미끄러지는 한 줄기 물방울 흔적 사이로 청춘은 영영 빠져나갔다.-41-42쪽

다른 어떤 동물도 죽을 줄 아는 길로 걸어가지 않는데, 왜 사람만은 그게 자기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일까? -49쪽

큰 얘기에만 관심을 두던 20대가 지나고 나니 삶의 한쪽 귀퉁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아가다가 사라진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니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는 구차한 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51쪽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내게 천냔 동은 없지만, 내게는 반드시 쓸, 하늘이 내린 재주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영조 마을 앞 해변에서 하늘에 박힌 별들을 바라보던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더없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84쪽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구도 삶의 날씨는 예보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당신과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잠시 가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아마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서로 멀리,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97쪽

사방팔방 하늘과 땅 위에 그 무엇도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공허였다. 그 공허 속으로 나란 욕구와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환희에 찬 공허를 거부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124쪽

나는 참 많이도 흘러 내려왔구나.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 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짠 스웨터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이따금 마음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가만.-125-126쪽

본디 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내가 경험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뭔가에 빠진다면 그건 내 안에 들어온 그 뭔가에 빠져든다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통의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내 경험의 공간 안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대하면서 나는 소통이 과연 어떤 것인지 여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한 여자애와 헤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했던 나만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나는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힌 슬픔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로소 나는 그 바깥의 슬픔에까지도 눈을 놀리게 됐다. -139쪽

내 나이 스물한 살에 만화방에서 밤을 지새며 불법복제한 일본만화를 윤문하다가 잠들어서는 기소중지자를 사냥하고 다니는 형사에게 신분증을 제출하기 위해 잠을 설치는 따위의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란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150쪽

그로부터 6년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 같다. 문인들이 모이는 어느 술자리에 갔다가 나는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말을 들을 지경이 됐다. 그 무례한 말에 있는 힘껏 항변했지만, 그건 내가 정말 끝난 것인지도 모르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10년이라고 했다. 아직 한 4년은 더 남아 있었다. (……) 10년 전 그 스님은 농담하느라 내게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 내게는 그 얘기가 있었다. 고마웠다. 어려워 당장 그만둬야 했을 때, 스님은 내게 4년을 더 준 셈이니까. -180-181쪽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운 밤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도 어둡고 어두운 어둠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어둠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주 하찮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201-202쪽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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