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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평점 :
다산과 연암. 동시대의 위대한 두 사람을 라이벌처럼 비교하며 쓴 평전. 한동안 다산에 빠져 관련된 책들을 읽어오던 터라 이 책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다산과 형제들, 연암과 친구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읽을만한 것들이 샘솟아 읽다가 여러번 무릎을 쳤다.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등 두 사람의 친구들이 겹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다산과 연암은 서로 별 인연이 없었다니.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뒷쪽으로 가면 갈수록 연암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그건 고미숙선생님의 시각에 영향을 받은 걸까.(모든 텍스트는 굴절된다고 본인이 스스로 책의 앞부분에서 인정하심) 오래 전 열하일기도 읽었었고, 고미숙선생님의 전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도 읽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연암의 이런 호방하고 멋진 남자 같은 매력을 전에는 몰랐을까.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이후로 나는 계속 다산만 우러러본 듯. 완전 멋져, 정말 멋져! 이러다가 문득 다산의 다른 모습들 - 세심하다 못해 지나치게 꼼꼼해서 고선생님의 표현대로 쪼잔하기까지 한- 을 보니 아 내 눈에 콩깍지가 덮였었나 싶기까지 하다. 다산같은 분이 아버지이거나 선생님이라면 숨막혔을듯.
반면에 그냥 호쾌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연암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했다. 이런 모습에 난 정말 혹하고 만다. 맏누님의 묘비명인데, 정말 아름답고 슬프다. 이런 글을 쓰는 남자라니. 아.. 멋져.
P. 365,<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묘지명 331쪽 )
산과 강물, 새벽달이 온통 누나로 보인다. 누님에 대한 그리움이 천지를 뒤덮은 것이다. 이 남동생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으리라.
우리말이 아닌 한문으로 쓴 글이 어쩌면 이럴까. 이런 정서가 대체 중년 남성의 글에서 나올수 있는 건가.
아무튼 책이 전체적으로 한자가 난무하고 빨리 읽을 수 없으며 이게 무슨 말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긴 한데, 그래도 관심있는 분께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두 별을 비교하다니 일단 발상이 특이하고, 모은 자료가 너무 구체적이고 좋다. 둘의 글쓰기를 비교한 부분이 책 내용의 전반적인 요약이 될수 있을 것같아 옮겨 본다.
P. 408,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다산)그의 박람강기는 중앙집중적이고, 일방향적이다. 서간집에서 잘 보여 주듯이, 타자의 목소리들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지식과 삶, 주체와 객체, 안과 바깥의 경계 또한 선명하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선 박학에의 열정과 이상을 향한 파토스만이 메아리친다. 다산선생이 지닌 '고독한 거인'이라는 이미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에 비하면 연암의 글쓰기는 쌍방향적이고 다중네트워크다. 연암은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의 소품류 에세이들은 대부분 누구의 서문이거나 누구에게 주는 편지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장이 만남과 대화, 사건과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연암의 글쓰기 수준이나 다산의 학문적 경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따라갈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른 요즘 말 그대로 '넘사벽'이랄까. 그럼에도 끌리고 닮고 싶고, 읽고 싶은 마음은 숨기기 어렵다. 연암도 42세 때 연암협으로 가서 살면서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고미숙선생님은 이걸 보고 "지성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학교"라고 했다. (p.57) 지성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학교! 아. 바라기는 내 인생도 그러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