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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헤르만 헤세가 독서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 주로 1910~30년대 사이에 쓴 단편들이 많다. 거의 백년쯤 전의 글인데 그렇게 옛날 책인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독일 문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 모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당대 문학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거나 혹은 비평가들을 작가 입장에서 또한번 비평하는 근거, 예시들이 너무 세련되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백년 전의 글이지, 하고 아리송. 현대의 신랄한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내용이다. (아, 번역이 뛰어난건가.--;;)
표지에 세로로 쓰인 글이 예사롭지 않아 우선 일부를 인용한다.
p.10-12, <독서의 기술, 독서에 대하여1>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 ...(중략) 인생은 짧고, 저 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중략)...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겁에 질린 학생이 호랑이 선생님께 불려가듯 백수건달이 술병을 잡듯 해서는 안될 것이며, 마치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의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병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리라.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와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오호.. 정말 맞는 말씀. 잘못된 독서가 자신에게 부당하다는 말은 정말 공감한다. 얼마전 이 책을 권한 친구가 읽을 책 고를 때 쓰레기같은 책 고르지 말고 정말 좋은 책 골라 읽으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 영혼을 건강하게 살찌우려는 마음이랄까.
그렇지만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부터는 종종 "백수건달이 술병을 잡듯"이 시집을 집어들었던 내 모습이 생각나 민망. 고등학생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집어들었던 온갖 시집들. 뭐 아무튼 시가 피난처였던 시절이 있기에. 또 지금도 마음이 메마를 때 여전히 시나 소설로 도망가는 버릇이 남아 있기에 왠지 민망하다. 책 열심히 읽고 공부하라고 선생님이 당부하셨는데 몰래 엉뚱한 책 읽다가 들킨 느낌이랄까. 고등학생 때 윤리 시간에 윤리 책에 <토지> 끼워 읽다가 딱 걸렸을 때 기분. (나도 나름 착한 학생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딴 짓하다가 그렇게 걸렸던 게 처음이어서 아직도 그 때 놀란 기분이 생각남--;;)
알프스에 오르는 산악인처럼, 무기를 잡는 군인처럼 책을 읽으라니. 이쯤되면 헤르만헤세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정약용의 독일버전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 맞는 말씀만 하셔서 네네 그렇죠, 제가 좋은 책을 읽어야죠, 하다가도 그래도 불량식품도 한번씩 먹고 싶은데요, 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헤르만헤세가 항상 좋은 책만 읽었을지는 알수 없으나 그가 딱딱한 인문서적만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도 문학에 빠졌던 사람, 그도 시를 사랑한 사람. 당연하지! 시인인데!
p.23,<독서의 기술, 책의 마력>
왜냐하면 나 자신이 '책 읽는 이'로서, 어린 시절부터 책에 홀린 사람 중 하나로서, 작은 새 소리에 홀려 온 세상을 돌아다닌 하이스터바흐의 수도승처럼 넓은 책 세상의 온갖 신전과 미로, 동굴과 바다를 헤매면서도 이 세상이 좁아짐을 느끼지 못한 채 수백년 세월을 마냥 떠돌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독서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분명 있었음을 발견하고 속으로 기뻐했다. 그렇죠, 선생님? 지식을 가르치는 책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시도, 소설도 정말 황홀하게 아름답곤 하다는 것에 정말 동의하시는 거죠?
p. 45,<독서의 기술, 애독서>
그러나 중국에 너무나 멋진 문학이 존재하고 중국 특유의 인간관과 정신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내게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못해 정신적인 피난처요 제 2의 고향이 될 줄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짐작도 못했던 바다.
백년전 독일 책벌레 헤르만 헤세와 조선후기의 책벌레인 정약용, 현대를 사는 중국 책벌레 장 샤오위안까지 겹쳐지면서 왠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책벌레들의 롤모델을 보는 느낌이랄까. 읽고 쓰는 삶. 내가 꿈꾸는 한가로우면서 치열한 삶. 읽으면서 중간에 제일 의미심장하게 읽었던 부분은 "젊은 작가들에게 띄우는 편지"였다. 잊지 않고 싶어서 어제는 다이어리에도 옮겨적어 놨다.
p.57, <독서의 기술, 젊은 작가들에게 띄우는 편지>
젊은 사람의 재능을 판단한다는 게 생각처럼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당신을 제대로 모르는 만큼, 당신이 발전과정상 어느 단계에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시에 보이는 미숙함이 몇 달 안에 자취를 감출 수도 있고 아니면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십대 때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를 쓰다가도, 나이 서른이 되어서 그런 작품을 전혀 못 내거나 똑같은 타령만 되풀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서른, 마흔 살이 되어서야 비로서 재능이 꽃피는 경우도 있지요.
나는, 책을 다양하게 읽고 싶고, 깊이 있게 읽고 싶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게 잘 쓰고 싶다. 내게 주는 백년 전 위대한 지성의 잔잔한 조언,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