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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이후 ㅣ 밀리언셀러 클럽 12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5월
평점 :
해가 저문 이후 / 스티븐 킹
언뜻 신음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에밀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문을 지나고 앞마당을 가로질러 열린 트렁크로 달려갔다. 그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트렁크의 여자는 신음을 내지 않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칼자국이 열 군데도 넘은 데다 한 귀에서 다른 귀까지 길게 목이 잘려 있었다.
-P,78-
1.
(주의 : 스티븐 킹 빠에의한 그리고 빠를 위한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스티븐 킹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열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단편집입니다.(개인적으로 장편보다는 짧막한 단편을 선호합니다.) 국내 출판이 언제될까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밀클에서 발빠르게(?) 출간해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스티븐 킹의 이야기를 접한건 양장본으로 구성된 걸작선 중 단편집이였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은 오늘날 저를 스티븐 킹의 어린양으로 만들었죠. 그때 제가 느낀 공포감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공포였습니다. 그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에서 상상은 현실처럼 구체화 되었고 구체화된 상상은 누구나 안고있는 불안감과 결합하여 공포라는 요소를 불러왔습니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 보여준 죽음의 위협은 어디에든 숨겨져있다 뭐 이런 강박관념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날 고생할걸 알면서도 열심히 먹어대는 불닭마냥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매력. 아마 그런 매력이 제게 장르의 길을 열어준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합니다. 단편의 특성상 짜임새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스티븐 킹의 작품은 열장 내외의 이야기에도 이 짜임새가 탄탄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읽은 <해가 저문 이후>는 그동안 그가 보여준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문체와 구성방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거장의 솜씨를 보여주지만 그 주제면에 있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기존 단편들이 슬라임과 같은 끈적이는 회색물질,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등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단편은 실제 일어났던 911테러, 핵전쟁,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강박관념 등과 같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때문에 책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공포입니다.
아니, 무서운 얘기 싫어. 그녀가 싱크대 옆에 서서 속으로 중얼 거린다. 하지만 동시에 듣고 싶기도 하다. 누구나 섬뜩한 얘기를 원한다. 다들 미쳤으니까. 게다가 꿈을 발설하면 정말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얘기하신 적이 있다. 말하자면 악몽을 얘기해 스스로 길몽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P.146-
2.
(스포 有)
모든 단편들이 재미있지만 손가락 사정상 인상적이였던 몇 편의 이야기만 끄적여보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윌라>는 본인들이 죽은줄도 모르고 해메이는 유령들의 이야기 입니다. 유령이 나온다니 어찌보면 위에 설명한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라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작품을 읽어보면 이는 대립이나 갈등이 주가 아닌 풍자와 은유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조금은 지루한 플롯의 이야기에 늘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두번째 <진저브래드 걸>로 넘어가면서 부터 주인공 에밀리와 함께 쉴새없이 달리게 되었습니다.
조깅 도중 우연히 시체를 발견한 에밀리는 살인마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였습니다. 에밀리 본인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옵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긴박함이 매력적인 짜릿한 이야기였습니다.
<졸업식 오후>는 일상을 즐기던 제니스에게 갑자기 닥친 핵폭팔의 재앙을 이야기 합니다. 다섯장의 이야기지만 배경의 설정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오싹했습니다.
<N>은 한 사내가 가진 강박관념이 어떠한 장소에서 전염된다는 설장의 이야기였는데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있는 강박관념의 이야기가 서간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준 흑인소녀 아야나에 관한 체험과 그 후 내가 경험하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아야나>는 어릴적 감명깊게 본 <그린마일>을 닮아있는 단편이였는데요. 기적이 행운이 아닌 멍에가 될 수 있다는 스티븐 킹의 가치관을 담고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압권이었던 <아주 비좁은 곳>. <헤드헌터>의 똥통씬을 읽고 비위가 상한 분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우 재밌게 읽은 단편이였습니다.
"싫어? 내 생각하고 다르잖아? 나는 당신이 이것으로 마지막 석양을 즐겼다고 생각해. 사실 당신은 멋진 최후의 하루를 보낸거야. 당신을 살려 주는 것도 그 때문이고. 우스운 게 뭔지 알아? 날 건드리지 않았던들 당신은 분명 원하는 바를 얻었을 거야. 난 이미 똥통에 빠졌건만 그 사실도 모르고 있었거든. 우습지 않아?"
-P.543-
3.
<다크타워>, <셀>, <스탠드>등 최근 스티븐 킹의 작품들이 과거 작품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고, 저 역시 그에 공감하는 독자중 하나로서 이번 작품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었는데요. 생각 이상으로 재밌는 작품들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닌 현실적인 공포(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혹시 오븐을 켜두지는 않았는지, 가스를 깜빡 잊은 것은 아닌지 뒷문은 잠궜는지와 같은 일상 생활속에서 느끼는 공포)가 스믈스믈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은 여름철 무더위를 싹 날려줬는데요. 한 작품이라도 독자를 잠 못들게 했으면 좋겠다는 킹옹의 놀부 심보가 바다건너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대학생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는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올 여름 더위를 나기위한 필독서 <해가 저문 이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