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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평점 :
거짓을 사실처럼 잘 꾸며 내려면 사실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섞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색깔을 입히는 쪽이 얘기하기가
쉽다. 상대를 믿게 하려면, 자잘한 사실을 쌓아 올려 목적지인 거짓으로 유도해야 한다. 해자를 건넌 후에는 단숨에 본진을
공격한다.
거짓말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은 과연 무엇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P.48-
1.
오래간만에 '온다 리쿠'의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낼 때마다 그 고유한 느낌이 묻어나는 작가는 많지 않은데 '온다 리쿠'는 본인이 가진 장점을 작품속에 참 잘
살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몽환과 고딕 미소녀 등의 이미지가 어우러진 작품들은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데요. 이번에 읽은
<여름의 마지막 장미>역시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아하고 고급진 동시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고급 호텔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한편의 변주곡을 닮아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변주곡’은 '짤막한 주제를 바탕으로 리듬, 멜로디,
화성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즉 변주의 본질은 바로
‘변화’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변주곡에서의 ‘변화’는 ‘한정된 틀 속에서의 변화’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설속 인물들은 각각 자신만의
'장(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사실을 본인들의 악의에 맞추어 조금씩 왜곡시켜 나갑니다. 아름다운 공간 속 유복한 배우들의 검은 속내는 점점
비극으로 치닫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 따위는 소용없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류스케가 왠지 모를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은 시시껄렁한 진실보다는 재미있는
픽션에 돈을 지불한다, 이 세상 사람들 어느 누구도 진실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자신을 신비롭게
보이도록 하라, 수수께끼로 가득한 인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존경심도 얻는다, 그렇게요."
-P.230-
2.
국립공원의 산 정상에 있는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호텔. 매년 늦가을 이곳에서는 재벌가 사와타리
그룹의 세 자매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립니다. 올해도 수십 명의 손님이 초대받아
모여든 가운데, 어두운 비밀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 자매의 친척과 관계자들도 이곳을 찾게됩니다. 첫째 이츠코, 둘째 니카코, 그리고 셋째
미즈코. 만찬
석상에서 주빈인 세 자매는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사건들에 대해 청중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허구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 이야기 속에서 초대된 인물들은 그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 찾고 싶어
합니다.
위에 언급한 세 자매 외에도 자매의
조카인 류스케, 그녀의 부인 사쿠라코, 사쿠라코의 동생 아키라, 니카코의 딸 미즈호, 미즈호의 매니저 사키, 아마키 교수 등이 등장하는데요.
모두 겉으로는 웃고 있는 반면 속으로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각 장에서 비극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결말로 말이죠.
"우리 모두가 기억을 날조하고, 자신에게
생겼던 일, 과거에 있었을 일을 날마다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있었을지도 모르는 밀회, 만났을지도 모르는 연인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해 이곳에 와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일어날 일, 혹은 나 자신이 저지를 뻔한 일을. 어쩌면 그 일들은 현실에서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르죠.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두가 그걸 회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게 될 것만 같아요. 여러분은 현실을, 기억을,
그런 식으로 느껴본 적 없나요?"
-P.372-
3.
온다 리쿠의 몽환적인
세계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난해한 구성을(책의 중간 중간 영화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의
시나리오가 녹아들어 있다던지, 변주식 구조를 통해 주제를 확장시켜가는 과정이라던지) 띈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지만
이런 미적인 구조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건 '온다 리쿠'이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독특한 구조와 특유의 몽환적 문체를
사용하여 인간의 잠재된 악의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 작품은 비현실 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두렵습니다. 그 끝에 있어 새로운 세 자매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자들의 모습이 특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진실'을 찾기보다
'진실같은 거짓'에
마음을 놓곤 합니다. 대부분 그편이 더욱 마음 편하기 때문이죠. 거짓속에 묻어둔 진실은
스스로도 모를만큼 묻혀버려 결국 진실을 기억 못할때. 어쩌면 그때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온다 리쿠'의 색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