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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 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
김탁환.강영호 지음 / 살림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99 / 김탁환, 강영호
나는 홍대 앞의 젊음과 열정, 타락과 술, 섹스와 눈물을 아낀다. 20대의 몇 년은 그 속에 파묻혀 절벽의 절벽까지, 꿈의 꿈까지, 경멸의 경멸까지 갔었다. 그러나 나는 함께 웃고 마시고 떠들면서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홍대 앞은 가끔 배회하며 기웃거릴 산책의 장소였고, 내겐 아득히 침작하여 밤낮 없이 전부를 쏟아부을 밀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택한 것이 드라큘라 성이다. 홍대 앞을 떠나지는 않되, 더 두꺼운 벽에 갇혀 더 높은 꼭대기에서 젊음이 벌이는 축제의 밤들을 내려다보며 음미하기도 한 것이다.
-P.22-
1.
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 홍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문구와, 그로테스크한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사버렸다. 늦은밤 취기에 이끌리듯 읽어나간 이야기는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보게 만들었다. 책을 덮은 시각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였고 왠지 모를 갈증에 집앞 편의점으로 발길을 향했다. 서울의 밤은 불야성이다. '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희미한 자신의 모습에 반하고, 모든걸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몸을 내맡긴다. 헐벗은 젊음이 내는 교성을 지나쳐 목적지인 편의점에 들어섰다. 금속의 차가운 맥주캔이 멍한 머리를 잠시 깨워준다. 밖을 바라본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로 뭔가가 보이는 듯 하다. 현실과 소설속 이야기의 경계가 사라진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이미지에 소름이 돋는다. 새벽 4시 왠지 뭔가가 일어날것 같은 시각이다.
서울은 밤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불야성이 된 지 오래다. '심야'라는 접두사가 어색할 정도로, 24시간 내내 특별시민을 기다리는 가게가 즐비하다. 새벽 3시에도 머리를 매만질 수 있고, 새벽 4시에도 축구 시합이 가능하며, 새벽 5시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도시. 서울에선 총기류 휴대가 불법인 탓에 뉴욕이나 워싱턴 혹은 런던보다도 더 소란스럽고 더 밝다. 홍대 클럽을 애용하는 외국인들은 서울의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과 음악과 술과 춤과 다음 날 숙취를 각오해야 하는 다양한 폭탄주에 놀란다. 때때로 나는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 서울의 밤을 상상한다. 호롱불 정도 깜빡이는 은하수의 도시. 그 어둠들이 만들어내던 갖가지 몽상과 이야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P.94-
2.
이야기꾼과 사진작가가 함께 만들어낸 기괴하고 흥미진진한 세계<99: 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 춤추는 사진작가 강영호와 역사 팩션을 선보여온 소설가 김탁환이 서로 이야기와 상상력을 주고받으며 완성한 장편연작소설이다. '드라큘라 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홍대 앞 상상사진관에 뱀파이어 같은 외모에 독특한 말투를 가진 건축가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홍대 주변에서는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기괴한 사연을 가진 손님들이 사진관을 찾아온다. 상대성 인간, 반딧불이 인간, 웨딩 인간,끈적 인간, 아몬드 인간, 알바트로스 인간, 턱을 기르는 왕 등 서울의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한 사진들과 함께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흡혼의 사진술사와 영혼을 빌려주는 이야기꾼이 어느 날 '상상사진관'에서 조우했다. 마치 드라큘라의 성 같은 상상사진관 안의 사무실, 그림자가 많이 생기는 조명 불빛 아래서,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그 둘이 만났을 때, 흡혼의 사진술사가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이미지의 충격적인 사진들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 속에서 끄집어내 프레임에 잡아 가둔 99마리의 괴물이 있어요. 어마 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영혼을 빌려주는 이야기꾼이 화답했다.
그 괴물을 살려내어 서울 곳곳에, 홍대 주변에, 목동 근처에, 풀어놓으리다.
-P.264-
3.
장마철 찐득한 공기와 같은 이야기였다.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이 이야기들이 그저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현실감각이 떨어질 정도의 취기와 밤의 묘한 몽롱함이 어우러져 나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생각해보면 '99'라는 숫자도 참 이상한 숫자다. 100이라는 완벽에는 조금 모자란 수니까. 하지만 어찌보면 그 99는 100이 되지 않음으로 무한이라는 잠재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지 않을까? 99개의 기묘한 이야기들은 왠지 끝이 있을것 같지 않으니깐 말이다.
이적의 <지문 사냥꾼>이라는 책을 재밌게 봤다면 이 책 역시 즐겁게 읽을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느낌의 고딕적이면서 말도 안되게 환상적인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