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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토막난 시체의 밤 / 사쿠라바 가즈키
살아있는 동안 꽤 뒤죽박죽인 이상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토막 시체가 된 것을 보니 묘하게도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뭐랄까, 안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그래, 이 사람은 예전부터 토막 나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토막을 내어 잘되었다,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심하게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P.18-
1.
요즘은 자극적인 제목의 소설들이 참 많이 보입니다. <가족사냥>부터 소개할 <토막난 시체의 밤>까지 말이죠. 이렇듯 -살인사건 등과 같은 소설들은 사실 밖에서는 쉽게 읽기 힘들답니다. 다큰 성인남자가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대며 충혈된 눈으로 이런 제목의 책을 보고있으면 '변태', '미친놈', '싸이코' 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요. 제목이 자극적일수록 독자의 흥미가 높아지는건 사실일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매로 갈지는 미지수입니다. 빨간색 배경에, 징그러운 인형, 끔찍한 제목은 사실 들고 다니기 무척이나 민망하거든요. 이건 뭐 제가 표지와 제목에 보수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차에 버금가는 작품이라 광고해서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실망도 컸습니다. 먼저 위에 언급한 표지와 제목들이 아쉬웠고, 끝까지 반전없는 이야기에 짜증이 났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순문학에 더 가까울법한 책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뭐랄까요 자극적인 소재를 다뤄나가는 작가의 문장이 무척이나 유연해서 주인공들의 시각을 따라가는 과정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가독성도 뛰어났구요.
얼핏 모두 평범한 여자로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거리에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빠져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모두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빌린다. 이 정도라면 갚을 수 있다고. 그렇게 고금리의 함정에 빠져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P.253-
2.
허름한 헌책방 이층에 사는 시로이 사바쿠. 어느날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오래전 이곳에서 살았다는 번역가 요시노 사토루. 두 남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몸을 섞지만, 사바쿠가 사토루에게 돈을 요구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사바쿠의 엄마는 정부와 드라이브를 하며 바람을 피던 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아버지 또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혼자 남은 사바쿠는 우연히 금융 기관에 갔다가 너무나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리에서 돈을 빌려 얼굴 여기저기를 성형하기 시작하지요. 그런 사바쿠 주변으로는 멋진 남자들이 항상 따릅니다. 하지만 매달 대출 이자를 갚는 것이 버거워지면서, 사바쿠는 다중 채무자로 전략하고 폭력적인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회사도 그만두고, 어머니와 바람난 상대였던 헌책방 주인 사토를 찾아가게되는 사바쿠. 그녀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사토는 말없이 사바쿠를 받아줍니다
한편 사토루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예쁜 딸 하나를 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그도 남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대학을 다니기 위해 도쿄로 상경한 그는, 빈곤한 생활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게 됩니다. 그렇게 쌓인 부채가 상당했고, 이제서야 겨우 그 부채를 상환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사정을 모르는 사바쿠는 정사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무기로 그를 협박합니다.
누구나 평범한 인생을 견뎌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니, 얼마나 희비극인가. 그것에 짓눌릴 듯이, 잠자코, 오늘도 살아갈 것인가. 내일도 걸어갈 것인가
-P.301-
3.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감추고 있는 진실들은 욕망과, 돈에 얽힌 추악한 것들입니다. 책의 중반부 '돈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땀을 뿌리면 돈이 자란다는 돈나무. 과연 현대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 돈을 손에 쥘 수 있는걸까요. 그렇다면 열심히 노력했지만 돈의 잔혹한 덫에 걸려버린 주인공들은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걸까요?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헌책방 주인인 사토가 카페에 만나 자유롭게 웃고있는 젊은 여성들을 보며 '거리에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빠져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신용에 맞게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쓸때는 좋겠지만 이 빌린돈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하지만 당장 내일 내가 사직을 당한다면 그 돈을 갚을 능력은 없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린돈은 이자가 붙어 점점 늘어나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버립니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바쿠의 허영심을 욕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요. 어쩌면 그녀의 모습은 평범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흔한 모습일겁니다. 남들에게 좀 더 멋져보이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망. 그 욕망에 망가져 버린 그녀는 어쩌면 지나치기 순수했기 때문은 아니였을까요. 괜한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 책의 표지는 무척이나 잔인할것 같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닥 무섭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