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귀천 정사 ㅣ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회귀천 정사 / 렌조 미키히코
둘이서 관을 가라앉히려고,물이 통할 수 있도록 관에 구멍을 뚫어 바다에 던지자 거친 파도로 인해 관은 한순간 바다로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던질 때 밧줄로 견고하게 묶어 꼭 닫아두었던 뚜껑이 열린 모양입니다. 바다 저 밑에서 관에 넣어두었던 꽃들이 차례차례 떠오르며 순식간에 해수면 한가득 퍼지나 싶더니 그것도 잠시, 어느래 파도 틈으로 정처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P.40-
1.
(스포 有)
블로그 이웃분들과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임들의 세상'(이하 '추.임.세') 라는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이웃들과 만나 책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공통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무척이나 즐거운 모임입니다. 모임에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가장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서로에게 선물해주는 '마니또' 제도가 있는데요. 이번에 리뷰할 <회귀천 정사>는 이웃 토실여왕님(http://blog.naver.com/aim_dream)이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잔잔하고 담백하게 감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한 울림을 주는 책은 사랑에 대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정사(情死).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의 동반자살이라는 뜻을 담고있는 단어입니다.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러한 소동들이 과거에도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이 단어는 왠지 오싹한 동시에 낭만적이며 안타깝습니다. 사랑했지만 세상이 허락하지 않기에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겐 비난보단 동정이 먼저 쏟아집니다. 하지만 이 정사 뒷면에 추악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낭만적으로 비춰졌던 행동이 한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면 그 정사는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게 연극 속 오시치와는 달리 쇼와 3년(1928)이라는 어두운 시대, 한 빈곤한 소녀에게 허락된 사랑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네. 절망의 바닥에서 몸도 마음도 말라비틀어지기 직전, 쇼와 3년의 오시치는 처음으로 가슴에 핀 불꽃에서, 연극의 화려한 감정과는 다른 어두운 불꽃에 자신을 태웠어. 붉은 등불에 온몸이 젖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새하얀 꽃잎으로 조루리를 빌어 자신의 사랑을 걸었던 걸세.
-P.117-
2.
<등나무 향기>
유곽 근처에 살고 있는 ‘나’와 동거녀. 옆집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대필가 한 사람이 유흥가의 글 모르는 여자들을 대신해 그들의 고향으로 편지를 써 보내준다. 어느 날 얼굴이 짓이겨진 시체가 발견되고, 목격자의 증언으로 대필가는 체포된다. 나와 동거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위증을 하려 하지만 결국 대필가는 자살하고 만다. 이후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
<도라지꽃 피는 집>
손에 도라지꽃을 꼭 쥔 채 발견된 시체. 형사인 나와 선배는 시체 발견 장소에서 가까운 유곽에 도착해 탐문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피해자가 죽은 날, 후쿠무라라는 한 손님이 그 유곽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단골 상대였던 한 창기를 조사한다. 그녀의 방 앞 노대에는 하얀 도라지꽃이 한 가득 피어 있었는데…….
<오동나무 관(棺)>
‘나’는 작은 폭력 조직 가야바구미에서 과묵하고 네 손가락이 없는 한 사내 누키타의 수발을 들고 있다. 어느 날 그의 부탁으로 매주 한 여자와 밤을 보내게 된다. 인근한 조직과 세력을 다투던 중, 누키타는 ‘나’에게 가야바구미의 두목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왜 내가 속한 조직의 두목을 죽여야 했을까? 누키타 형님과 내가 밤을 함께하던 그 여자는 어떤 사이였을까?
<흰 연꽃 사찰>
내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한 남자를 죽이는 섬뜩한 영상이다. 어머니는 누구를 죽였을까. 그리고 왜 죽여야만 했는가.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수수께끼가 풀린 순간 내 눈앞에는 놀라운 진실이 떠오른다.
<회귀천 정사>
1920년대 일본, 천재 가인으로 불렸던 소노다 가쿠요는 두 번에 걸친 정사(情死) 미수 사건으로, 두 명의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소노다는 그 여정을 두 권의 가집으로 남기고는 목을 그어 서른넷 짧은 생을 마쳤다. 찬란한 명성을 얻은 두 권의 가집. 그 시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 과연 그 이면에는 어떤 진실이 자리하고 있을까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각각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였지만, 가장 가슴에 남았던 이야기는 <도라지꽃 피는 집>이였는데요. 유곽에 사는 어린 소녀의 사랑. 그 순수함이 불러온 참혹한 살인과, 오시치극의 대사가 무척이나 잘 어우러져서 마지막까지 깊은 여운을 불러왔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았다라 평하는 표제작 <회귀천 정사>는 글쎄요. 공감도 가지 않았을 뿐더러. 예상 가능한 이야기에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나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꽃을 향해 가슴속에서나마 두손 모아 기도하고 싶었다. 후미오의 생명이, 아야코와 미네의 생명이 그리고 소노다와 단 하룻밤의 정을 나눈 홍등가 여인들의 생명이, 아름다운 꽃의 색깔을 발하며 사후에 마주할 구원의 어둠 속에 떠 있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59-
3.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각각의 꽃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의미인 ‘화장(花葬) 시리즈’라 불리는 단편들인데요. 남녀간의 치정을 다룬 각각의 작품들에선 꽃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또한 모든 작품의 배경은 1차 세계 대전, 간토대지진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다이쇼 시대'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작가는 꽃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아마 화사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지고 버려지고 짓이겨지고 스며든 꽃의 또 다른 이면을 통해 시대의 어두움과 인간의 마음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곽에서, 절에서, 야쿠자의 세계에서 꽃들의 이미지는 슬프게 다가옵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의 정당성을 위해 피해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합니다. 여기서 피해자는 증오심과 사랑을 위한 대상이 아닌 도구일뿐입니다. 이야기는 잔인하지만 서정적입니다.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애달파 어느새 살인에 동조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꽃과 사랑. 표지의 선명한 이미지와 내용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였습니다. 화장시리즈의 나머지 3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저녁싸리 정사>역시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동안 기억에 남아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