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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물의 관 / 미치오 슈스케
요시카와 이쓰오는 몹시 지루하고 따분한 인간 아닐까. 뭐랄까 너무나도 평범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텔레비전 학교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곳에 비치는 학생처럼. 성적도 보통. 이름도 보통. 키도 보통. 얼굴도 보통. 반에서 눈에 띄지도 않거니와 존재 자체가 희박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누가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부모님이 여관을 경영한다는 점도 외지 사람이 보면 특이할지도 모르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다.
-P.19-
1.
저는 '미치오 슈스케'라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고 그의 팬이 되었다고 하지만, 제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달과 게>를 읽고 난 뒤였습니다.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과 같이 충격적인 반전도 없었고,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는 순문학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소년들의 섬세한 감정과, 순수해서 잔인한 그 속마음을 너무나 마음 저리게 표현해서 읽는 내내 공감하고 또 함께 아파했던 기억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이야기 대부분은 어른과 아이 사이의 미성숙한 학생들이 주인공입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는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왔고 방황도 많이 했었기에 그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에 북폴리오에서 출간한 <물의 관>의 주인공들 역시 사춘기 성장통을 겪는 소년과 소녀입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소녀 아쓰코는 폭력의 기억을 지우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평범한 여관집 아들 이쓰오는 평범하지 않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책은 이 두 아이들의 이야기와, 이쓰오의 할머니 이쿠의 닮은듯 다른 이야기를 일본소설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풀어나갑니다.
"몇 십년 동안 계속 거짓말을 하면..... 어느덧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법이지."
...
"이쓰오가 말을 알아듣게 되어 걔한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 후로는 어쩐지 나 자신도 그게 진짜라고 믿게 됐어. 하지만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하더구나."
-P.176~177-
2.
평범한 집안, 평범한 성적, 평범한 외모를 가진 자신은 '평범함의 막'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못내 답답하고 괴로운 소년 이쓰오.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무관심, 전학 온 이후 집단 괴롭힘을 당하며 오로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소녀 아쓰코.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소년과 소녀는 학교 문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됩니다. 재료를 사러 들른 잡화점에서 이쓰오는 아쓰코가 동생을 휘해 인형을 훔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요. 서로간의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아쓰코는 이쓰오에게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땅에 묻은 타임캡슐에 내용을 바꾸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말이죠. 아쓰코는 타임캡슐 속에 자신이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시간이 흐른뒤 아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편지를 썼고, 이쓰오는 아무런 생각없이 대충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쓰코는 자신이 괴롭힘 당한 과거를 잊기 위해 이 편지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이쓰오는 이 평범한 일상을 탈출하고자 아쓰코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둘은 이 편지의 내용을 바꾸기 위해 운동장을 몰래 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쓰오의 할머니인 '이쿠' 그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면서 모든게 갖추어진 풍족함이 싫어져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할머니의 친구라는 손님이 와서 하는 얘기는 할머니의 얘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마을의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소녀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소녀는 그 사건을 잊기위해 몇십년간 거짓말을 했고, 세월이지나 그 거짓말은 진실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오랜시간 묻어온 할머니의 진실은 극복하기 힘든 하나의 커다란 짐 입니다. 손자 이쓰오는 아쓰코와 할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의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세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구원하게 됩니다. '물'을 통해서 말이죠.
에미코가 이쓰오에게 기운을 복돋아주기 위해 한 그 말. 에미코가 말하고 싶었던 '잊는다'는 것은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거나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다'라는 의미였을까. 이쓰오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쓰코는 극복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극복하기 전에 잊어버렸다. 하지만 어쩌면 할머니의 증상은 극복할 힘 대신에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P.349-
3.
원형적 상징으로 물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신화를 바탕으로한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물'은 죽음과 동시에 모든것을 되살리는 재생과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의 마지막 이쓰오와 아쓰코 그리고 할머니 이쿠는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담은 인형을 댐안에 던져버립니다. 이러한 행위는 이쓰오와 아쓰코에게는 잊고 싶은 기억에 대한 극복의 의미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가진 할머니 이쿠에게는 망각과 동시에 새로운 재생을 의미하는 동작으로 이해됩니다. 조금은 상징적인 이미지들에 뒤에 해설이 달려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시중에 유통이 안된 책이여서 그런지 인터넷상에 올라온 리뷰도 없어 제가 생각한 끝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군요. 미스터리적 요소는 거의 없지만 담담한 문체로 절제되게 표현한 이야기가 <달과 게>만큼이나 좋았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