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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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없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열의 아홉은 그럴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테면 비장애인이라는 특권, 이성애자라는 특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특권, 다문화 가정이 아닌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특권 등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여러 특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른바 '천부특권'을 누리고 살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천부인권론'을 옹호하는 국가가 아닌 '천부특권론'을 강하게 신뢰하는 국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류로 생활하다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별처럼 다른 위치에서 경험해보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평생 그 특권을 모를 수도 있다."  (p.32)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죄야?"라거나 "내가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남들이 나에게 보태준 거 있어?"라는 식으로 항변한다면 뭐라 대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천부인권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날벼락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권리를 관철할 수도 없는 소수자로 태어났다면 말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그들에게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족쇄를 덧씌우는 역할을 할 테지요. 그들이 평생 차별과 소외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p.171)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혹여라도 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자신의 특권에 대해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이런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건 꽤나 위협적인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 걸 뺏는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양보한다는 건 아흔아홉 섬 가진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대가도 없이 한 섬을 내어주는 꼴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할 듯합니다.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던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p.204)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입니다. 게다가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편 가르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는 건 요원한 일인 듯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미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정의의 실체를 믿고 이를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느리지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정의를 믿고 실천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몇 안 되는 누군가에 대한 헌사의 글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천부특권'의 혜택을 받고 자란 내가 새삼 미안해지는 까닭은 누군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침묵'이라는 회색적 언어를 통해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선 채 소수자를 외면해 왔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의의 언어는 다시 쓰여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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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틈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스며든다. 겨우내 난방이 너무 덥다며 불만을 쏟아내던 K 과장도 최근 며칠은 전혀 말이 없다. 간간이 눈이 내렸고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텅 빈 거리를 제 세상인 양  찬바람만 휩쓸고 지나갔고, 나는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내다보다 으스스 몸을 떨었다. 한겨울에도 햇볕이 좋은 날에는 늘 습관처럼 거닐던 인근 공원도 지금은 눈에 덮여 살풍경한 느낌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먹이를 찾는 새들이 포릉포릉 날고 뼈만 앙상한 나무들이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흔한 이어폰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청력 손상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덕분인지 지금도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청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때가 더러 있다. 거리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타인의 전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는 경우, 닭살이 돋을 듯한 사랑의 밀어나 콧소리가 섞인 세 살배기 어린애 말투 등을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사랑 표현에 적극적인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그 빈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유교보이로 자란 나로서는 목까지 차오르는 역겨움을 시시때때로 눌러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적인 전화를 소음공해라는 명목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와 같은 고충이 있다 보니 남들처럼 상시로 이어폰을 사용함으로써 청력을 지금보다 낮추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을 하게도 된다.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있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김애란 작가가 글을 매우 잘 쓰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리고 김애란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매우 공들여 쓰는 작가라는 사실. 작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랄까, 아무튼 갑자기 찾아온 기분 좋은 자극으로 인해 독서의 속도는 마냥 더디게 흘러간다.


"초여름 저녁 개수대 앞에 난 책받침만 한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총총 반짝였다. 다닥다닥 붙은 현대식 가옥 사이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십자가도 한둘 솟은 덕에 네모난 창틀 속 풍경은 그 자체로 고장 난 멜로디카드처럼 보였다. 하늘은 노랑이었다가 주황에서 보라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푸르게 변했다. 나는 산 아래 밀집한 온갖 형태의 집들을 바라봤다.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의 일부만 옮겨봤는데 이처럼 정제되고 감각적인 표현들이 책의 끝까지 내내 이어진다. 물론 작가 역시 자신이 처음 쓴 글에 퇴고에 퇴고를 거쳐 최종 결과를 책으로 내놓은 것일 테지만 나는 작가의 책을 읽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녀가 작가 지망생 시절 겪었을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애틋한 마음으로 어림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길거리를 거닐며 훔쳐 들었던 어느 행인의 전화 내용처럼 가볍거나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몸짓이나 말투는 물론 자신을 스쳐가는 온갖 풍경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붙잡기 위해 그녀가 들였을 땀과 노력에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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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2-0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꼼쥐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산문집의 문장을 읽으면서 그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한 땀과 노력이 느껴진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훌륭한 작가는 그 보다 더 대단한 안목을 지닌 독자로 부터 발견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아 감사 합니다. 뜻 깊은 주말 되세요!

꼼쥐 2025-02-08 12:43   좋아요 0 | URL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라 할지라도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감탄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독자로서 작가를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애란 작가의 솜씨는 새삼 놀랍게 다가온 게 사실입니다. 마힐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사이토 다카시의 훔치는 글쓰기 사이토 다카시의 훔치는 글쓰기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현주 옮김 / 더모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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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이 무작정 하다 보면 뭔가 이루어질 때가 있다. 그러한 성취에 대해 혹자는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꼴'이라고 한껏 깎아내려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단순히 운만 작동한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싶다. 운이라는 것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일들은 대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라는 기치 아래 반복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 그렇고 아이들의 독해력이 그렇다. 짬이 날 때마다 무작정 운동을 하고 책을 읽다 보면 살도 빠지고 시나브로 독해력도 부쩍 향상되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의 작가 '사이토 다카시'가 쓴 <훔치는 글쓰기>는 책의 첫머리에서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독해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문자에 노출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없는데 정작 독해력과 글쓰기 능력은 높아지지 않는 것일까? 작가의 평가는 냉정하다. 이와 같은 추세는 비단 일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문해력 저하로 인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업체에서 행사와 관련한 게시글에 마음 깊은 사과의 의미를 담아 '심심(甚深)한 사과'란 표현을 썼는데, '심심한'이라는 뜻을 '지루하고 재미없는'으로 오해한 다수의 사람들이 발끈하여 항의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국민의 전반적인 문해력 저하 논란이 불거지게 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내가 말하는 '읽었다'의 기준은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느냐'는 것이다. 단순히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동자만 움직여 글자를 '본 것'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  (p.32)


이와 같은 논란의 저변에는 언제나 독서의 부족이 문제점으로 떠오르곤 한다. 사실 독서가 습관화되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독서를 권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이토 다카시 역시 평소에 관심이 있는 잡지에서부터 독서를 시작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면 단행본이나 문고본 등 책의 세계로 옮겨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위주로 읽되 자신의 관심사를 서서히 넓혀가라는 게 작가가 권하는 독서 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글쓰기의 단계로 넘어간다.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작가는 이 책에서도 글쓰기 관련 노하우에 대해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주어와 술어를 대응시키는 '대응 의식'을 완전히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이 훈련을 많이 한 사람은 말할 때에도 문장의 꼬임이 적어지게 된다. 거꾸로 문장에 꼬임이 많고 횡설수설하는 사람은 쓰기 훈련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다."  (p.85)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좋은 글쓰기의 기본은 다독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많은 생각과 깊이 있는 사유(多商量)를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들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많은 글쓰기(多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식적인 원리를 꾸준히 실천하고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 <훔치는 글쓰기>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글쓰기 상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평소 독서와 글쓰기로 단련된 사람은 어휘가 풍부한 덕분에 대화에서도 의미의 함유율이 높은 대화가 가능하다. 의미의 함유율을 높이는 것이 이번 책의 숨겨진 테마이다. 말하기의 잔기술은 말 그대로 잔기술일 뿐, 독서와 글쓰기 기반이 없다면 지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할 수 없다."  (p.177 'EPILOGUE' 중에서)


연일 입춘 한파가 매섭게 이어지고 있다. 최근 2030대를 중심으로 독서와 필사를 즐기는 '텍스트힙(Text Hip)'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독서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일견 반갑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처럼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되는 시기에는 퇴근 후의 음주 약속을 잡기보다 일찍일찍 귀가하여 따뜻한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이 자신의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큰 이득이 아닐까 싶기는 한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훨씬 더 힙(Hip)해 보이는데 그것 역시 취향의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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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의 요체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중요성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 스스로도 반성해야 하는 점이 많은 인간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현실에 있어서 두루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도,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 강박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까닭도 상대방이 하는 말의 의도와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하는 말의 의도와 당시에 갖는 상대방의 생각을 100% 완벽하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할 때의 얼굴 표정이라든가, 몸짓이라든가, 시선이라든가 하는, 이른바 말에 동반되는 여러 요소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반대로 내가 말을 할 때 듣고 있는 상대방 역시 나의 생각이나 의도를 곡해하거나 무시할 수 있음을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나의 생각을 몰라준다고 섭섭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위에 언급한 소통의 기본을 소홀히 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인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입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도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말조차 듣지 않으려 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했던 말도 수시로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고 완강하게 버티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 구성원 중 어느 누구와도 소통다운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한 사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어 더없는 불행이자 악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집권한 2년 반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 퇴보에 퇴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를 우리 사회에서 영구히 제거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지금 사계절 출판사의 신간 <다이내믹 코리아>를 읽고 있습니다. 2022년 봄부터 시작된 '토론의 즐거움'이라는 모임에서 직업도 성격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 지금까지 140여 회의 토론을 이어오고 있다는데, 이 책에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포착한 13개 토론문이 담겼다고 합니다. 토론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주식 칼럼니스트, <지금은 없는 시민>을 쓴 강남규 작가, 박권일 연구자, 신혜림 피디, 은유 작가, 이재훈 기자, 장혜영 전 국회의원이 그들입니다. 12.3 비상계엄에 대한 은유 작가의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짜 시민들이 달려가서 장갑차 같은 거랑 맨몸으로 맞섰잖아요. 그거 보는데 너무 눈물이 나고, 광주항쟁 사진에서 봤던 거랑 겹치면서 이게 어떻게 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압박해왔어요. 제가 아는 활동가도 국회에 달려가서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하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거기 있으니까 더 미치겠더라고요."


봄날씨처럼 포근한 주말 오후입니다. 다음 주는 강력한 입춘 한파가 예고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미 2년 반이라는 긴 겨울을 겪어 왔던 까닭에 큰 두려움 없이 다가올 한 주를 맞을 수 있을 듯합니다. 잠깐 동안의 추위를 견디면 곧 봄이 온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우리 사회에서도 암적인 존재를 걷어내고 말하는 이의 의도와 생각을 잘 읽으려 노력하는 새로운 사람을 최고 권력자로 맞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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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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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을까? J.M. 쿳시의 소설 <폴란드인>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적정 연령대로 인정해야 할까. 물론 개인별, 혹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문화나 관습에 따라 어느 정도의 편차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면서 판단하거나 수용하는 사람의 견해차 역시 무시할 수 없겠지만.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쿳시는 자신이 쓴 소설에 지나치리만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담는다. 그것은 쿳시 소설의 매력인 동시에 소설 감상에 주어지는 큰 선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들이 만난 날 저녁, 택시에서 그의 손이 닿던 감촉을 생각해본다. 그녀는 그가 헤로나에서 그녀를 반겼을 때 그녀의 볼에 닿던 입술의 감촉을 생각해본다. 마른 뼈가 닿는 것 같은 느낌. 살아 있는 해골이랄까. 오싹하다. 그녀에게도 해골이 있다. 그러나 그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것은 흐릿하고 만져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무 메마르고 열정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일까? 그녀가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은 열정일까? 열정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나타나 격렬한 진짜 열정임을 드러낸다면, 그녀의 삶에는 그것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p.67)


40대의 스페인 여성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70대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비톨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음악 서클 임원이었던 베아트리스는 초청 연주자인 비톨트를 환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음악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40대의 은행가 남편을 둔 베아트리스와 쇼팽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주하는 독신의 피아니스트 비톨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음악회가 끝난 뒤 의례적인 저녁 식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후 비톨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베아트리스는 비톨트에 대해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한편 비톨트는 서툰 영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자 자신이 직접 연주한 쇼팽의 b단조 소나타 오디오 파일을 보내기도 하고, 자신과 함께 브라질로 떠나자고 하는 등 이메일을 통해 지속적인 구애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베아트리스는 마요르카에서 연주회가 있었던 비톨트를 가족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일주일을 같이 보낸다. 별장이 위치한 소예르는 마요르카에서 가까운 휴양섬이었다. 그후 베아트리스는 그와 냉정하게 결별한다.


"만약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를 향한 감정, 이 의심스러운 길로 접어들게 만든 감정은 무엇일까?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연민이라 하겠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그를 가엾게 여겨 연민의 감정에서 그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그랬던 거다. 그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p.130~p.131)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입술에 머금고 죽을 거요.'라고 말하는 나이 든 남자의 순수한 고백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쿳시의 소설이 늘 그렇듯 사랑의 결말은 언제나 쓸쓸하고 건조하다. 중년의 베아트리스가 비톨트에게서 느꼈던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 그것은 어쩌면 열정이 사라진 형식적이고 의도된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각자가 지금까지 느꼈던 헛헛한 감정을 해소시켜 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행위에 명명된 과분한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이 든 사람의 사랑이란 각자의 감정을 모태로 탄생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심각할 게 없다. 사랑은 우리가 바라볼 때조차 과거 속으로, 역사의 깊은 안쪽으로 물러나는 마음의 상태, 존재의 상태, 현상, 경향일까? 폴란드인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심각하게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인 자신도 역사의 잔재, 욕망이 진정한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암시가 있어야 했던 시대의 잔재다. 그녀, 즉 베아트리스 즉 그의 애인은 어떠한가? 그녀는 확실히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p.139)


길었던 설 연휴 이후 너무도 쉽게 맞이한 주말의 오후. 나는 겨울 나목의 메마른 가지 위에 존 쿳시가 명명한 허울뿐인 사랑을 걸어 두고 나른한 시선으로 한참 동안 응시했다. 탄탄했던 육체의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 주름이 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시나브로 열정을 잃고 차츰 형식만 존재하는 빈 껍데기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싱거운 하늘엔 낮달처럼 긴 침묵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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