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겨울비 탓인지 새벽의 등산로는 흠뻑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낙엽이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나뭇가지에 고여 있던 빗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등산로에 드러난 나무뿌리는 물에 젖어 몹시 미끄러웠다.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피해 빠르게 달아났다. 온 산이 비에 젖어 축축한데 고양이는 도대체 어디서 잠을 잤던 것일까.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고민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내 삶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블로그의 유지 문제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매년 연말이면 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한다. 내년부터 블로그를 접을 것인지 말 것인지 자본주의 논리로 저울질을 해보는 것이다.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의 이점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하는 독서이지만 이따금 리뷰를 쓰는 바람에(때로는 출판사에서 책을 기증받은 까닭에 의무적으로 리뷰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뜩이나 게으른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기록을 종종 남길 수 있다는 것과 마음이 심란할 때 짧게나마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에 블로그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은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는 게 가장 크고, 일이 바쁠 때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의 리뷰를 기한 내에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크다. sns에서 일체의 상업적 영리 활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에 결심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언제나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데 그럼에도 10년 넘게 블로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다른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 나는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올해로 블로그는 끝내고 내년부터는 일기장이나 한 권 쓰자'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붙잡았던 건 시답잖은 나의 글을 꼼꼼히 읽고 따뜻한 댓글을 남겨주는 이웃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나와 가까운 이에게는 내가 블로그를 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함구하고 있다. 친분이 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작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걸림돌을 나는 애시당초 원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내 블로그는 나만의 놀이터인 동시에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정신적 분출구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내 블로그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모두 나와는 친분이 없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제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 글을 읽었던 어떤 이웃은 내가 만약 책을 출간한다면 가족 열 분을 제외하고 열한 번째 독자가 되겠노라 약속하신 적도 있었고, 비밀 댓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온 이웃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사실 책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진심을 담은 그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블로그를 1년만 더 유지하자는 쪽으로 못 이기는 척 기울었던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이브. 하늘은 종일 어둡고 칙칙했지만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툭툭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