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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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을까? J.M. 쿳시의 소설 <폴란드인>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적정 연령대로 인정해야 할까. 물론 개인별, 혹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문화나 관습에 따라 어느 정도의 편차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면서 판단하거나 수용하는 사람의 견해차 역시 무시할 수 없겠지만.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쿳시는 자신이 쓴 소설에 지나치리만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담는다. 그것은 쿳시 소설의 매력인 동시에 소설 감상에 주어지는 큰 선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들이 만난 날 저녁, 택시에서 그의 손이 닿던 감촉을 생각해본다. 그녀는 그가 헤로나에서 그녀를 반겼을 때 그녀의 볼에 닿던 입술의 감촉을 생각해본다. 마른 뼈가 닿는 것 같은 느낌. 살아 있는 해골이랄까. 오싹하다. 그녀에게도 해골이 있다. 그러나 그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것은 흐릿하고 만져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무 메마르고 열정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일까? 그녀가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은 열정일까? 열정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나타나 격렬한 진짜 열정임을 드러낸다면, 그녀의 삶에는 그것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p.67)


40대의 스페인 여성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70대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비톨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음악 서클 임원이었던 베아트리스는 초청 연주자인 비톨트를 환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음악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40대의 은행가 남편을 둔 베아트리스와 쇼팽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주하는 독신의 피아니스트 비톨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음악회가 끝난 뒤 의례적인 저녁 식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후 비톨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베아트리스는 비톨트에 대해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한편 비톨트는 서툰 영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자 자신이 직접 연주한 쇼팽의 b단조 소나타 오디오 파일을 보내기도 하고, 자신과 함께 브라질로 떠나자고 하는 등 이메일을 통해 지속적인 구애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베아트리스는 마요르카에서 연주회가 있었던 비톨트를 가족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일주일을 같이 보낸다. 별장이 위치한 소예르는 마요르카에서 가까운 휴양섬이었다. 그후 베아트리스는 그와 냉정하게 결별한다.


"만약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를 향한 감정, 이 의심스러운 길로 접어들게 만든 감정은 무엇일까?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연민이라 하겠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그를 가엾게 여겨 연민의 감정에서 그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그랬던 거다. 그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p.130~p.131)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입술에 머금고 죽을 거요.'라고 말하는 나이 든 남자의 순수한 고백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쿳시의 소설이 늘 그렇듯 사랑의 결말은 언제나 쓸쓸하고 건조하다. 중년의 베아트리스가 비톨트에게서 느꼈던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 그것은 어쩌면 열정이 사라진 형식적이고 의도된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각자가 지금까지 느꼈던 헛헛한 감정을 해소시켜 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행위에 명명된 과분한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이 든 사람의 사랑이란 각자의 감정을 모태로 탄생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심각할 게 없다. 사랑은 우리가 바라볼 때조차 과거 속으로, 역사의 깊은 안쪽으로 물러나는 마음의 상태, 존재의 상태, 현상, 경향일까? 폴란드인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심각하게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인 자신도 역사의 잔재, 욕망이 진정한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암시가 있어야 했던 시대의 잔재다. 그녀, 즉 베아트리스 즉 그의 애인은 어떠한가? 그녀는 확실히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p.139)


길었던 설 연휴 이후 너무도 쉽게 맞이한 주말의 오후. 나는 겨울 나목의 메마른 가지 위에 존 쿳시가 명명한 허울뿐인 사랑을 걸어 두고 나른한 시선으로 한참 동안 응시했다. 탄탄했던 육체의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 주름이 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시나브로 열정을 잃고 차츰 형식만 존재하는 빈 껍데기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싱거운 하늘엔 낮달처럼 긴 침묵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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