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25년도 이제 오늘과 내일 단 이틀이 남았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세밑 무렵이면 언제나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개중에는 꼭 필요한 고민들도 있을 테고, '굳이 지금?' 하는 의문이 절로 드는 생뚱맞은 생각들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밀린 숙제를 하듯 미뤄두었던 생각들을 하나둘 끄집어내어 버릴 건 버리고, 해결할 건 해결하기 위해 헝클어진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이런 시간이 닥칠 때마다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를 앞에 두고 곰곰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이번 생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하게 역사적 소명이나 책무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하여 어떤 확고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남은 삶을 계속하여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삶을 살아갈 이유나 명분 같은 것이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내가 이번 생에서 풀어야 할 과제는 아주 먼 과거에 이미 주어졌었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에 주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이번 생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영영 풀지 못한 채 그것을 다음 생으로 미루고야 말겠구나 하는 낭패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저변에는 현재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인간은 코앞에 닥친 문제만 겨우겨우 해결하느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를 조망하고 해결하는 일은 손도 댈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대다수의 인간은 현실에 매몰된, 어쩌면 현실을 현실로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시간 열외자의 입장으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계획할 수 없는 까닭에 내가 참여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암흑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 <40세 정신과 영수증>이 떠오릅니다. '정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40여 년간 모아 온 영수증과 그 뒷면에 적어 내려간 삶의 기록입니다. 정신 작가는 23세부터 매일매일 영수증을 모아 왔다고 합니다. 그 사이 모은 영수증은 2만 5천 장-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20대를 보내던 정신 작가는 어느덧 40대가 되었습니다. 30대엔 단 한 사람을 만나 단단한 일상을 꾸릴 것 같았지만 40대의 인생도 여전히 막막하고 흐릿하기만 합니다.
"설렁탕을 한 그릇 먹고/성당에 찾아가/감사기도를 하는데/눈이 시렸다//나의 아빠가/눈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엄마의 남편도 아니었던 것 같고/나의 아빠도 아니었던 것 같은/그의 삶에 눈이 시렸다// 2017년 9월 8일 오후 1시 48분/설렁탕/13.00$/GAMMEEOK" (p.80)
내가 이번 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아주 먼 과거에 주어졌지만 무심했던 내가 까맣게 잊었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에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코앞에 닥친 크고 작은 문제를 처리하느라 현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2025년 한 해에 풀어야 했던 숙제도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단 이틀을 남겨둔 2025년의 세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