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몸을 앞질러 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성격이나 습관이라기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이랄까 아니면 강제적인 이끌림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처럼 새해가 시작되는 1월의 어느 휴일, 지난해 10월이나 11월의 어느 날처럼 한껏 빈둥대며 몸이 원하는 만큼의 게으름을 피워 본들 하늘이 무너지거나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가정의 재정이 오늘 갑자기 파탄날 일도 아닌데, 나는 서둘러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 후 책상 앞에 앉아 차분히 신년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이고 맙니다. 불현듯 말입니다. 이런 일상을 원했던 것도 아니면서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빠져드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어떤 일을 내가 하루 더 먼저 끝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하루 더 일찍 생을 마감한다면 결코 나아질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산책을 하다가 문득 아파트 화단의 조경수들을 보았습니다. 푸르르던 잎을 모두 떨구고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듯했습니다. 성마른 성격의 우리네처럼 어떻게든 이 계절만 견디면 좀 더 활동하기 좋은 다른 계절이 오겠지, 생각하며 조바심을 내는 게 아니라 자연은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입니다. 춥거나 더운 계절을 견디는 게 아니라 그저 담담히 흘려보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다른 계절과 다르지 않게 말입니다. 올해는 동장군을 핑계로 해돋이를 보기 위한 여행을 가지 않았습니다. 2025년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에도 나는 특별한 약속도 없이 조용히 귀가하여 특별한 의미도 두지 않은 채 일찍 잠들었던 것입니다. 여느 날처럼 말입니다.


제프 다이어의 에세이 <그러나 아름다운>을 읽고 있습니다. 글에도 박자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자신이 쓰는 글에 어울리는 특별한 박자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서 재즈를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작가는 마치 재즈 리듬처럼 문장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물건들이 탈색되고 있었다. 심지어 바깥 간판에도 창백한 초록빛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흰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큰 눈송이가 인도 위에 내렸고 나뭇가지를 뒤덮었으며 주차된 자동차들을 흰 담요처럼 덮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이라고는 없었고 그 누구도 다니지 않았으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시가 이처럼, 한 세기에 단 한 번 잠이 든 그 시간처럼,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고 켜 있는 텔레비전도, 다니는 자동차도 없었다."  (p.54~p.55 '빌리 홀리데이의 또 다른 별명' 중에서)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한 해를 시작하려 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흘러가는 모습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려 합니다. 견뎌야 할 일이 있으면 견디고, 즐길 일이 있으면 즐기면서 말입니다. 화단의 조경수처럼 조바심 내지 않고 묵묵하게 그렇게 살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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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26-01-0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내일 일은 난 모른다. 오늘을 살자. 욕심내지 말자. 버리고 갈 것만 생각하자.” 바뀐 다이어리 첫 장에 제가 써놓은 글귀입니다. 2026년 한 해 동안 ‘무탈평안’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