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부쩍 길어졌다.

새벽 6시에 운동을 나가는 나는

집을 나설 때는 그렇지 않지만,

막상 등산로 입구에 접어들어 

매일 오르는 산을

먼 발치에서 바라볼 때면 오싹한 한기를 느끼곤 한다.

 

캄캄한 어둠에 묻힌 산.

그것은 약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갖게 한다.

어렸을 때 품었음직한 귀신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는 사뭇 다른,

내 존재가 어둠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공포이다.

 

<생각노트>의 저자 기타노 다케시는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잊히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렇게 쉽게 잊힐 만큼

내 인생이 텅 비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진다는 냉정하고 살벌한 이 사실이

죽음 그 자체로서의 공포를 아주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산을 오르며 미망에 빠지는 것도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상상에 빠질 때도 있다.

 

예컨대 미래의 어느 날 있을지 모르는 의학혁명으로

사후세계를 우주여행 하듯 다녀올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제일 먼저 사라질 것은 종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렇게 된다면 불교의 경전도, 기독교의 경전도,

그 외의 다른 경전도 모두 원시시대의 인류가 쓰고 믿었던

동화와 같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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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 마지막 리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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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책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에쿠우스를 닮은 엄숙주의가 좌회전을 하는 사이 가볍게 통통 튀는 낙천주의가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풍선을 매단 카트라이더가 거칠 것 없이 내달리듯이.  북칼럼니스트 이다헤가 들려주는 책과 관련한 수다는 끝이 없어 보인다.  성인 독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게임 오버가 되더라도 무한반복할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처럼 어느 순간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는다면 내 삶이 끝나는 순간에도 다음 날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받아들 것처럼 말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장정일의 독서일기>, 또는 정헤윤 PD의 <삶을 바꾸는 책읽기> 이후 이렇게 재밌는 서평집을 읽은 적이 있을까?  나는 가끔 꿈속에서도 책을 읽는 꿈을 꾸곤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정말로 책을 좋아하긴 하는가 보다,는 것인데, 단 한 번도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꿈을 꾸어본 적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없어서?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댈 수 없지만 궁금한 건 군금한 거다.  현실에서도 나는 내 생각을 들려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쪽을 택한다.  가만가만 듣고 있노라면 내 생각과 일치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때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렇다고 매번 그럴 수는 없는 일.  때로는 처음 듣는 작가의 생경한 이야기도 듣게 되고, 그 때문에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그 나름의 기쁨이 있다.  "아, 이런 책도 있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때면 어렸을 때 소풍가서 하던 보물찾기 놀이가 떠오르곤 한다.

 

작가 이다혜는 자신의 생각을 심각하게 말하지 않아서 좋다.  작가가 이 책에서 언급한 120여권의 책중에 내가 읽었던 책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일 때, 그동안 내가 취했던 행동은 작가가 언급한 책을 대충이라도 다 읽고나서야 서평집을 펼치는 것이었다.  일종의 결벽증인데, 그도 그렇게만 치부할 것도 아닌 것이 대개의 서평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신이 직접 그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데 있다.  더구나 수시로 튀어나오는 전문용어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평론에 관련된 전문서적을 적어도 서너 권쯤은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평론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일반독자가 이런 수고를 감내하며 서평집을 끝까지 읽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 이다혜의 책은 달랐다.  마치 무뚝뚝한 남자 친구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애교 만점의 여자처럼 맛깔나는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작품도 전혀 낯설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구술적 표현이 무미건조한 활자의 느낌을 확 날려버리는 까닭에 400쪽에 가까운 책의 볼륨에도 독자로서의 지루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성을 볼 때 어디부터 보는가?  남자라면 여자의 눈(이라고 쓰고 가슴으로 읽는다)-가슴-다리(라고 쓰고 가슴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가 가장 일반적인 루트인 것 같다.  여자들은 남자의 얼굴, 엉덩이, 손 등 산발적인 부위에, 목소리나 체취를 더해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일이 많다.  그렇다면 책을 고를 때는 어떨까?  책의 어디가 당신을 유혹하는가? "   (P.311)

 

글쎄?  책의 어디가 나를 유혹하고 있을까?  저자의 얼굴(이라고 쓰고 가슴이라고 읽어야 하나?)이라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하다.  아무튼 이런 식의 가벼운 터치는 독자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우리는 비록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멀리 함께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어요, 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언젠가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경계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이 가득한데도 또 다시 많은 책을 새로 구입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구매 리스트에는 새로 추가된 목록들로 가득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지름신이 강림하면 나는 생각도 없이 주문 버튼을 누르고야 말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브이아이피(VIP)'라 하고 가족들은 나를 '폐지장수'라 부른다.  서재를 따로 둘 여유가 없는데 책은 점점 쌓여간다.  여러 식구의 책이 뒤섞인 채 짐만 되고 있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못 찾아서 두 권 산 책이 있다.  읽은 책인데 기억이 안 난다.  책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  (P.395) 이런 사람들을 위한 책 정리 노하우가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읽기만 했을 뿐 실천은 장담하지 못하겠다.  혹시 모른다.  우렁각시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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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11-16 14:01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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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2-11-18 15:10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
 

비가 예보되어 있는 주일!

밖에는 수상한 바람이 '솨,솨' 소리를 내며 마른 잎을 훑고 지나간다.

이런 날은 알 수 없는 우울과 새삼스러운 추억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촉촉하게 젖어오곤 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양도 정리되지 않은 우울이 얕은 빨랫줄에 걸려 있다.

그 위로 심술궂은 바람이 그 형태의 우울로 미이라를 만들려는 듯 잔혹하게 습기를 걷어낸다.

나는 고든 라이트후트(Gordon Lightfoot)의 "Second cup of coffee"를 듣고 있다.

 

I'm on my second cup of coffee and I still can't face the day
I'm thinking of the lady who got lost along the way
And if I don't stop this trembling hand from reaching for the phone
I'll be reachin' for the bottle, Lord, before this day is done
I'm on my second cup of coffee and I still can't face the day
The room was filled with laughs as we danced the night away
But my sleep was filled with dreaming of the wrongs that I had done
And the gentle sweet reminder of a daughter and a son

이런 노래를 들으면 슬픔은 언제나 물질로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슬픔이 어딘가로부터 날아 와

먼저 내 얼굴의 가장 높은 부분인 코를 찡하고 달구면

전이된 슬픔은 코와 가장 가까운 눈물샘을 자극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슬픔은 비로소 맑은 액체의 눈물로 체화한다. 

이런 과정은 열이나 전기의 전도현상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건데 슬픔을 어찌 상상 속의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랴. 

나는 슬픔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기로 했다.

 

탄생에서부터 수동적인 인간은

비록 그 행동의 8할이 수동성을 띤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가을의 시간 속으로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지 않으려 한다.

나는 슬픔이 짙게 깔린 가을의 시간을 향해

내 두 발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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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십서 1 : 손자병법, 오자병법 - 중국의 모든 지혜를 담은 10대 병법서
신동준 역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터인지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학 책을 즐겨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껏해야 "꿈의 해석" 정도를 읽어보았을 뿐,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말이다.  내가 심리학에 빠져든 것도 기실 2009년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불어닥친 심리학 열풍에 나도 모르게 편승한 것이 주된 계기였지만 쉽게 사그라질 줄로만 알았던 심리학의 매력은 올해로 벌써 그럭저럭 3년이 되어가고 있다.  꺼질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잔불처럼 요즘도 나는 생각날 때마다 심리학 서적을 뒤적이곤 한다.

 

내가 읽었던 심리학 서적은 대학이나 연구목적을 위한 전공서적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어떤 전문적 깊이를 논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 독서도 아니었지만 심리학과 관련된 여러 영역으로 내 관심의 폭이 조금씩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가령 종교단체에서 주관하는 힐링 프로그램이나 템플 스테이, 또는 심리학 강의와 같은 색다른 것에 호기심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귀차니즘의 전형인 내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듯한 새로운 느낌이다.  그럴 때마다 'Curiosity killed the cat.'이라는 속담이 생각나 두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가던 중 나는 우연찮게 병법서를 만났다.(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것도 한참 전인데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인문학 서적을 이제야 알아보다니!)  심리학 서적과 병법서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뜬금없이 병법서를 들먹이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 서적이 주로 다양한 인간 심리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식으로 다루는 데 반해 병법서는 인간 심리의 기저에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시시때때로 변하는 피상적 심리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변의 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의 심리를 다룬 책이 병법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실수로 인해 백두난간 황천길로 떨어지고마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데 그 무엇보다 유용한 것은 상대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일상에서의 피상적인 심리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앞에 둔 자의 본원적 심리, 아프게 응시하고 있는 자기 내면의 심연,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는 원초적인 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병법서는 탈출구가 없는 천애절벽의 끝에서 만나는 인간의 절박함을 다룬다.

 

나는 병법서를 읽을 때마다 좀 더 겸손해지는 느낌이 든다.  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 내 속에도 약간의 비겁함과 비열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 우쭐할 것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 그런 여러 가지 상념이 오가곤 한다.

 

<무경십서>는 병법서의 집대성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손자병법>, 오자서의 <오자병법>, 사마양저의 <사마법>, 그 외에 <울료자>, <당리문대>, <육도>와 <삼략>을 "무경칠서"라 하고, 이에 더하여 <손빈병법>, <장원>, <삼십육계>를 더하여 "무경십서"라고 한다.  작가 신동준은 <손자병법>을 필두로 무경십서 전권을 다루고 있다.  병법서를 원문과 함께 해석하고 해설을 덧붙인 형식이다.  자칫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고전의 이미지를 불식시키 듯 현대적인 사례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제 겨우 그 제1권을 읽고 웬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깊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1권에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나온다.  심리학의 '심'자도 몰랐던 그 옛날에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적이 편히 쉬고 있으면 심리전 등으로 피로하게 만든다.  배불리 먹고 있으면 식량을 탈취하는 등 굶주리게 만든다.  안정된 곳에 영채를 세워 굳게 지키고 있으면 기습공격 등으로 동요하게 만든다."   (P.359)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옛날의 병법서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본심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칼싸움이나 하던 원시시대의 전쟁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나의 마음과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병법의 요체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도의 측면과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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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고 또 가는 계절의 순환을 생각할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정해진 길을 쉼없이 반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이곤 한다.  그리고 우리네 인간도 저들처럼 누군가 몰래 정해놓은 길을 어김없이 걷고 있는 것일까?  오직 그 길을 걷는 우리만 모른 채, 하는 생각도 함께.  그렇다면 테잎을 갈아 끼우듯 죽음도 그처럼 쉽게 대면할 자신이 있을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요즘 나는 비록 잠깐이지만 매주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을 심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매주 만나서 아이들 각자에게 한 권의 책을 빌려주고 주제를 달리 하며 토론도 하고, 강의도 해보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돈을 받지 않고 진행하는 봉사 차원의 수업이라서인지 아이들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빠지는 것이 다반사였고, 그렇게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결국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혈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기보다는 내 성의를 몰라주는 아이들이 야속했고, '이쯤에서 그만 둘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그만두지 못한 것은 매주 빠지지 않고 나오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의 정성과 열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논술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전문 강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작가도 아니었으니 내 강의를 듣는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두어 달을 억지춘향으로 나갔나보다.  수업하는 나도 힘들고 듣는 아이들도 힘들어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대학시절의 낙서장을 읽던 중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짧은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만 쥐어뜯었던 기억.  나는 그때 장난처럼 썼던 소설의 첫머리만 프린트하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다음에 이어질 적당한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에 맡기기로 했다.  그렇다고 각자가 생각나는 대로 써보라고 하면 숙제가 될 터이니 나는 아이들로부터 대략의 스토리 라인만 듣고 그 이야기에 약간의 살을 붙여 그럴 듯하게 쓰는 일은 내가 하기로 했다.

 

방법은 이랬다.  아이들 각자가 상상한 이야기를 칠판에 적고 그 중 가장 개연성 있고, 흥미있어 보이는 스토리를 투표로 선정한다.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일주일 내내 내가 글을 쓰고, 프린트를 하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아이들은 그 글을 읽고 이어질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고, 또 발표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저 입으로만 했던 이야기들이 활자로 찍혀지고, 한 주 한 주 점차 소설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에 열광했다.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햇다.  그리고 창조의 기쁨과 성취욕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아이들이 이끌어가는 한 편의 소설은 그들이 읽었던 어느 소설을 모방한 것도 있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약을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상황 자체를 차근차근 설명만 해줄 뿐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차피 젊음이란 사리나 이치가 아닌 동물적 감성으로 세상을 헤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나는 매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이야기의 진척은 마냥 더딜 수밖에 없고, 그 결말이 궁금한 아이들은 조바심을 내지만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달쯤 전에 시작한 글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의 전부를 보여줄 수도 없고, 매주 어느 정도의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지만 지난 주까지 썼던 이야기를 조금만 옮겨본다.(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실명을 썼다.)

 

‘크리스마스라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렇게 며칠만 더 지나면 2009년도 조용히 잠들겠구나.’ 이런 생각이 때로는 사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그렇게 한 일 년쯤 보내면 멀쩡히 존재하던 기억들도 모두 어둠 저편으로 사라질 듯했다. 시간은 잊혀지고 중력은 반대로 작용했다. 미라는 지면으로부터 5cm쯤 떠서 유영하며 도시라는 거대한 세트의 엑스트라들을 구경하였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음에도 한기가 불어닥치고 옷깃을 여며 봐도 차가움은 그대로 스며들었다. 스물넷의 그녀는 곧 사라지고 스물다섯의 낯선 그녀가 불쑥 찾아오겠지.

며칠째 눈도 내리지 않고 찬바람만 불었다.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 사무실 창문 밖으로 하얀 부스러기가 푸슬푸슬 떨어지더니 이내 지나는 행인들의 머리에 스티로폼 알갱이처럼 달라붙었다.

“잘 지내?”

미라는 흩어지는 눈발을 먼 발치에서 힘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응. 너는?”

“나도 그럭저럭.”

“나한테 화 많이 났었지?”

“화가 날 일이 뭐 있겠어? 전화도 하지 않고 찾아간 내가 잘못이지.”

미라의 자조 섞인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날 엄마, 아빠가 갑자기 찾아와서 집으로 끌려갔었어.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한테 전화할 생각도 못했어. 미안해.”

수진의 사과에도 미라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상의 겉도는 말들이 눈 내리는 도시의 거리를 웅웅거리며 떠도는 듯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위에서 밝힌 방식의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줄곧 내 머리를 어지럽혔던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이 아이들로 하여금 현실과 점차 멀어지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어쩌면 유치원 시절부터인지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학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이들이 현실을 차근차근 제대로 배워야 할 시기에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하등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에서 제시한 50여 권의 작품과 작품 탄생에 얽힌 뒷얘기가 사실일지라도 작가에게 찾아온 우연한 영감과 작가의 천재적인 창조성만으로 작품은 탄생되지 않는다.  비록 그 작품의 시발점에서는 우연적 기회와 순간의 아이디어가 한 몫을 담당했겠지만 작가의 수많은 현실 경험과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명작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명작을 선물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공부라는 틀에 갖혀 현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설 쓰기'를 통하여 최소한의 현실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창조의 기쁨은 크지만 그 씨앗은 언제나 현실의 토양에서 자라기에.

 

"어쩌면 이 이야기들도 문학적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작가들의 창조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은 도처에 영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도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란 한 순간에 사람의 두뇌를 압도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까맣게 잊히곤 한다.  그러나 준비가 된 사람은 영감이 머리를 스치는 그 찰나의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그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   <작가의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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