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해가 짧아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내가 아침 운동을 나가는 5시 30분은 한낮처럼 환해서 한 점 어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구름이 없는 맑은 날에도 조금씩 어스름이 깔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희끄무레 나무의 형체마저 선명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나면 완전한 어둠이 그 시각을 지배하게 될 터이다. 그래서였을까, 숲은 어제와는 뭔가 달라진 분위기였다. 엊저녁에 조금 내린 비로 등산로는 부드러웠고, 우듬지에서 떨어진 참나무 잔가지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입추가 지나면서 며칠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린 탓인지 누그러진 폭염에 아침 기온은 제법 선선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매년 이맘때면 늘 보던 풍경. 그것 때문에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을 터, 나는 산에 올라 운동을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에 골똘했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약속이나 한 듯 매미 울음소리가 뚝 끊겼던 것이다. 말매미 소리가 요란한 도심의 주택가와는 다르게 숲에서는 '맴 맴 맴 맴' 우는 참매미 소리만 가득한데, 매미들이 단체로 이사라도 갔는지 시끄럽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숲은 오직 적막함에 놓여 있었다. 숲의 고요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이따금 멧비둘기만 '구구구구' 낮은 소리로 울었다.


지금은 다시 한낮의 무더위가 거리를 뒤덮고 있다. 그 무더위를 몰아내려는 듯 목청 좋은 말매미가 한껏 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은 소음과 더위를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고 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이렇듯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오직 제 것에만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은 천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다. 투미할 정도로 말이다. 치넨 미키토가 쓴 <이웃집 너스에이드>를 읽고 있다. 저자는 현재 내과 전문의로 일하며 집필을 병행하고 있다는데, 세상에는 정말 믿기 힘든 정도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를 이따금 주눅 들게 하는 이들이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간호조무사에 지나지 않는 내게는 아무 힘도 없어...... 절망과 무력감으로 미오가 무너져 내리려던 그때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 위에서 하나에가 상체를 일으켰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미오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불안이 떠올라 있었다. 미오는 눈을 부릅뜨고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다. 포기하지 마! 하나에 씨를 가족 곁으로, 사랑하는 딸과 손자 곁으로 반드시 돌려 보낸다."  (p.60)

내일은 다시 비가 예보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대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뒤척이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날씨 변화에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약간의 관심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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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12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가을은 여름 안에 들어와 있네요. 풀벌레 소리가 들립니다.

꼼쥐 2025-08-13 16:32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지난 며칠 동안 여름 같지 않은 여름을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은 다시 또 더워지는 듯하네요.ㅜㅜ
 
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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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를 이토록 열심히 읽었던 적이 과연 있을까 싶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그럴 필요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그런 느낌으로 읽었던 게 다가 아닐까. 아무튼 그랬다. 그러나 황정은의 <작은 일기>는 차마 그렇게 읽을 수가 없었다. 황정은의 <작은 일기>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속도를 최대한 낮춰 아주 천천히 그날을 향해 복기하듯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아가는 동안 작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어떤 시간에서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아주 가까운 궤적을 스치듯이 지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결국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오후 열 시 이십삼 분에 만날 것을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를 향해, 복기하듯 아주 천천히,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양심들의 상태가 내 예상이나 기대보다 처참하다. 그걸 목격하느라 매일 지치고 다친다. 기운을 너무 잃지 않으려면 거리로 나가 사람들 얼굴을 봐야 한다. 이게 옳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듣고 그들 곁에서 걷는 일이,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 내게 필요하다. (내란 옹호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도 이러하면 어쩌지.)"  (p.67)


원하는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 <작은 일기>를 읽으며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그저 암담했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상황은 쉽게 낙관할 수 없었다. 낙관은커녕 계엄 이전의 상태로 퇴행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했다. 그래서 황정은의 <작은 일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일기를 읽고 있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길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정권이 바뀐 작금의 현실에도 주변에는 '윤 어게인'을 외치는 자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구치소에 있는 윤석열은 조사와 재판을 전면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한강진 대첩'과 '키세스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침 뉴스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서울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사람들 몸을 덮은 은박 담요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처럼 또 누군가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돕고 살피며 밤을 보낼 줄은."  (p.87)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내란이냐?'며 윤석열의 무죄를 주장하곤 한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논리. 누군가가 평화로운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가 깜짝 놀란 집주인이 소리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훔치지 못한 채 도망쳐 나왔다면 그는 무죄라는 주장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그들의 논리에 어이가 없어 때로는 실소가 터지지만, 내가 그들과 동시대를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불쑥 화가 치솟는다. 나도 작가도 윤석열의 파면 선고가 있었던 2025년 4월 4일까지 내면에서 치솟는 분노를 우리는 얼마나 가까스로 삭이며 울퉁불퉁한 시간들을 견뎌 왔던 것일까. 그런 시간들에 대한 위로는 누구로부터 받아내야 할 것인가.


"어리석음이 종종 늙음의 얼굴로 온다는 것은 기필코 늙는 존재인 내게도 섬뜩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어리석음이 마침내 늙음에서 개화했겠나, 인생 곳곳에 만발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생각하며 앉아 있다. 시국이 이래서 헛소리하는 이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있다."  (p.142)


우리는 그렇게 다시 봄을 맞았고,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계엄의 정당성을 외치는 이들과 윤석열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이 마치 일제 치하의 고등계 순사처럼 포진되어 있다. 내란 정국에서 보았던 건전한 시민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굳건한 힘과 의지로 민주 시민의 역량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반민주 세력이 우리 사회를 언제라도 다시 전복하려 들 것이다. 한번 보였던 바퀴벌레가 좀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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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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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는 연예인 Y 씨가 자신을 비난하는 팬들에 대한 수준 낮은 대응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내란 정국에서 강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며 윤석열의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했던 S 목사가 주최한 한 행사에 Y 씨가 참석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는데, 이에 대해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는 팬들의 비난이 있었고, 이를 참지 못한 Y 씨가 자신의 SNS에 팬들을 조롱하는 듯한 사진을 올렸던 것이다. 자신의 이마에 초성 'ㅂ ㅅ'으로 된 부적절한 단어를 쓰고, 양 볼에는 손가락 욕설을 의미하는 그림을 그려 사진을 찍은 후 SNS에 올린 것인데, 그는 사진과 함께 "널 믿은 내가 XX이지. 맘껏 실망하고 맘껏 욕해. 너희에겐 그럴 자유가 있어. 내가 자살하긴 좀 그렇지 않아?"라는 글도 써서 화를 자초했던 것이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비난이나 칭찬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대개의 성숙한 연예인은 그와 같은 비난에 초연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논란이 될 만한 행사에 자신이 참석했다는 건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부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비난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지향하는 신념이나 가치관이 누군가의 비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가수 이승환이나 이은미, 배우 겸 가수 아이유나 배우 조진웅 등의 행보는 오히려 담담하고 대범하다.


반면에 문제가 되었던 연예인 Y 씨의 미성숙한 대처는 행사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가치관에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는 어른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까닭은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하나의 표식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아이는 어른에게 담담히 따지고 들 뿐 적어도 못된 행동으로 대들거나 어깃장을 놓지는 않는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쓴 <눈먼 자들의 나라>를 읽으면서 나는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 Y 씨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눈먼 자들 속에서 눈뜬 이들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눈먼 세대가 이어진 지 벌써 14세대가 되었다. 그동안 이들은 볼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됐다. 시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희미해졌고, 관련된 단어조차 다른 단어로 바뀌었다. 골짜기 밖 세상에 관한 이야기 역시 희미해지거나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골짜기를 둘러싼 벽과 바위 비탈 너머의 세상에 관한 모든 관심을 거두어들였던 것이다."  (p.45)


영국의 소설가이지 문명 비평가로 알려진 허버트 조지 웰스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SF의 아버지'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그가 쓴 소설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세계사 산책>이라는 역사서 덕분에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그처럼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1904년에 발표된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는 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본을 함께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지만 사실 분량면에서 부족함이 있다. 하여 소설과 함께 '편집자의 말', '독후 활동', '신윤옥의 문학과 음식', '저자 소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우월주의', '정상성에 관한 고찰', '필터버블' 등 소설의 내용을 다층적으로 음미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글들이 함께 실려 있다.


"1904년에 발표한 「눈먼 자들의 나라」는 시각이라는 감각을 중심으로 정상성과 우월성, 문명과 폭력의 문제를 통찰한 작품이다.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 공동체의 규범에 도전하지만, 공동체는 그의 '다름'을 병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한다. 웰스는 이 작품을 통해 계몽주의적 자만과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통렬히 풍자한다."  (p.135 '저자 소개' 중에서)


소설의 구성이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에콰도르 안데스산맥의 오지에 세상과 단절된 채 눈먼 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다. 예전에는 문명과 통하는 출구가 있었으나 민도밤바 대폭발로 그마저도 막혀버렸다. 땅도 비옥하고 초지도 있어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이상한 질병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었고 그렇게 14세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데스 산맥을 오르던 스위스 등반객의 가이드로 참여했던 젊은 청년 누네즈가 절벽에서 떨어져 우연히 그 나라에 방문하게 되었고, 시력을 잃은 채 후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기관을 발전시켜 온 시민들은 누네즈가 볼 수 있는 세상을 아무리 설명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모든 걸 체념한 채 시민 중 한 사람인 야콥의 종이 되어 살게 된 누네즈는 그의 막내딸인 메디나를 사랑하게 된다. 남들과 다른 누네즈의 행동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결국 눈을 수술하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메디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용해야만 하는데...


"누네즈가 편히 잠든 곳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눈먼 자들의 골짜기는 2킬로미터 아래의 거대한 구덩이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햇살이 내려앉아 사방에는 온통 빛이 만연했지만, 골짜기 안쪽으로는 안개와 그림자가 어둠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누네즈가 몸을 누인 언덕은 온통 밝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P.97)


정보가 범람하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는 종종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이른바 '필터 버블'의 환경에 갇혀 눈먼 자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이가 많거나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이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도 더러 그런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우리는 꽤나 당혹스러워진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볼 수 있는 누네즈가 세상 자체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는 풍경을 설명하는 것처럼 무용하고, 그로 인하여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연예인 Y 씨에게 우리가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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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끝없이 변한다. '미치다'는 말만 해도 그렇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되다.'는 흔한 의미와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다.'는 의미로 주로 쓰이던 것이 최근에는 맛이 비정상적으로 맛있다거나 날씨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극단적으로 치닫는 현상에 대해서도 '미쳤다'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물론 '날씨가 미쳤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하자면 '비문(非文)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날씨가 인간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극단적인 상태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취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게 될 뿐 어떤 목적이나 의도는 내재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에 대해 정상이나 비정상을 가리는 의미의 '미치다'를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여러 대상에 대해 '미쳤다'는 말로 그 상태를 표현한다. 의미의 확장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다.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작은 일기>를 읽고 있다. 소설 <百의 그림자>를 통하여 황정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나는 이후 작가의 소설은 전부 읽어보았다. 황정은 작가는 소설에 있어 자신만의 문체를 지닌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예컨대 자신만의 문체를 지녔다는 건 작가가 쓴 소설 중 일부를 떼어낸 후 작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작가의 이름을 곧바로 알아맞힐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박민규 작가나 천명관 작가(불행하게도 <고래>에서만 그것을 유지했다.), 당연하지만 한강 작가, 최근에는 배수아 작가나 황정은 작가 등이 그렇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작가가 자신만의 문체를 유지한 채 오래도록 작품 활동을 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공중그네>를 쓴 오쿠다 히데오 역시 그 하나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자신만의 문체를 그는 자신이 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다시 재현하지 못했다. 천명관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황정은의 에세이 <작은 일기>는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던 2024년 12월 3일부터 2025년 5월 1일까지의 기록이다. 물론 일기라는 글의 특성상 자신의 일과 혹은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 등을 솔직하게 쓴 것이기에 작가가 쓴 소설의 문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간결하고 솔직하다.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던 4월 4일의 기록을 조금 옮겨본다.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感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p.166)


미친 자들이 일으킨 미친 행동으로 인해 대다수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안에 떨었던 지난 시간. 작가 역시 제정신으로는 살기 어려웠던 그 암흑의 시간 동안 무엇인가 쓰고, 행동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지 않았더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아서 자주 무력했지만 다른 작음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p.190 '후기' 중에서)에 대한 기록을 읽는다는 건 나에겐 꽤나 벅찬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일기>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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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소담 클래식 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유혜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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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 하루 24시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이는 은퇴 후 행동반경이 좁아진 이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명제로 작용한다. 하루는 길고 한 달은 짧은 혹은 하루는 길고 1년 역시 짧은, 때로는 짧게 느껴지는 이런 모순은 노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어렵지 않은 마술이다. 하루의 길고 지루한 흐름 탓에 몸이 배배 꼬이는 것은 물론 크게 달라지지 않는 창밖 풍경을 열심히 관찰도 하고 좁은 거실을 괜스레 오가기도 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이를 재촉할 방법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이처럼 공간이 고정된 채 시간만 흐르는 삶의 비대칭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시간과 공간이 맞물리는 삶의 층위를 향해 나아가도록 종용한다. 우리가 꾸려가는 삶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하는, 4차원의 보편적인 구성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정된 공간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한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 어떤 시점의 공간으로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과거의 한 공간을 살게 되거나 과거의 한 공간에서 잠시 빠져나와 현재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중의 삶을 살게 된다.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지만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흔한 형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끔찍한 고백이었지만(그는 다시 모자를 썼다), 쉰세 살이 된 지금은 누구라도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매 순간순간, 한 방울 한 방울, 여기 이곳, 지금 이 순간, 햇살 속 리젠트 공원에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실은 지나치게 많았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모든 맛을 끄집어내기에는 한평생은 너무 짧았다. 모든 즐거움, 모든 의미를 다 끄집어내기에는 말이다."  (p.143~p.144)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출간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하원의원 댈러웨이의 부인인 클라리사가 겪은 6월의 어느 날 하루를 독자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우리들 각자가 사는 삶의 구성방식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깨닫게 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클라리사는 저녁에 있을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그녀가 보고, 만나고, 대화하고, 목적하였던 꽃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 속에 30년 전의 추억과 현재의 상황이 교차한다. 더불어 작가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클라리사 한 사람의 인생에 셉티머스의 삶을 대비시킨다.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증에 시달리는 셉티머스는 매 순간 죽음의 유혹에 내몰린다.


"그는 그 한 가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신들을 피해 가는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의사소통을 하려는 시도였다. 친밀했던 관계는 멀어지고, 황홀함은 시들고, 사람은 혼자였다. 죽음에는 포옹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자살을 한 이 청년은 자신의 보물을 들고 뛰어내린 걸까? "만약 지금이 죽을 때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다." 언젠가 흰옷을 입고 내려오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p.328)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소설을 구성하는 두 축은 화자인 클라리사와 중간중간 노출되는 셉티머스의 이야기이다. 파티를 통해 하루를 고단하게 보낸 지인들의 피로를 풀어줌으로써 그들에게 내일 다시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믿는 클라리사와 이제나저제나 죽음만을 생각하며 죽기 위해서 하루를 넘기는 셉티머스의 대비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극과 극으로 벌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많은 이들이 오늘에 이어 내일을 저 잘 살기 위해서 오늘을 마감하지만, 더이상의 삶이 부담스러워 오늘을 삶의 마지막 말로 선택하는 이도 있다는 걸 소설은 클라리사가 보낸 6월의 어느 하루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망각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배은망덕은 마음을 좀먹을 수도 잇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끝없이 쏟아지는 이 목소리는 무엇이든 몰고 갈 것이다. 이 맹세든, 이 화물차든, 이 삶이든, 이 행렬이든 아무튼 한데 감싸, 실어 갈 것이다. 마치 거친 빙하의 물결을 타고 얼음이 뼛조각, 푸른 이파리, 떡갈나무를 잡고 몰아가듯이 말이다."  (p.246)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바람에 독자들로 하여금 때로는 혼란에 빠지게 할 때도 있지만,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색은 한 권의 소설을 통한 한 권의 철학책 읽기를 끝낸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오늘은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휴가를 떠난 사람들로 사무실은 한산하고 창밖에선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주말 한낮의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자신의 삶이 힘들다고 자살을 꿈꾸는 건 오직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매미의 울음에 섞여 씁쓸한 기분을 자아낸다. 삶의 연속성을 위해 너는 저렇게 간절히 울어본 적 있는가, 말매미가 내게 묻고 있는 듯하다. 주말 한낮의 그 뜨거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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