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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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를 이토록 열심히 읽었던 적이 과연 있을까 싶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그럴 필요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그런 느낌으로 읽었던 게 다가 아닐까. 아무튼 그랬다. 그러나 황정은의 <작은 일기>는 차마 그렇게 읽을 수가 없었다. 황정은의 <작은 일기>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속도를 최대한 낮춰 아주 천천히 그날을 향해 복기하듯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아가는 동안 작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어떤 시간에서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아주 가까운 궤적을 스치듯이 지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결국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오후 열 시 이십삼 분에 만날 것을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를 향해, 복기하듯 아주 천천히,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양심들의 상태가 내 예상이나 기대보다 처참하다. 그걸 목격하느라 매일 지치고 다친다. 기운을 너무 잃지 않으려면 거리로 나가 사람들 얼굴을 봐야 한다. 이게 옳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듣고 그들 곁에서 걷는 일이,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 내게 필요하다. (내란 옹호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도 이러하면 어쩌지.)"  (p.67)


원하는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 <작은 일기>를 읽으며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그저 암담했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상황은 쉽게 낙관할 수 없었다. 낙관은커녕 계엄 이전의 상태로 퇴행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했다. 그래서 황정은의 <작은 일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일기를 읽고 있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길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정권이 바뀐 작금의 현실에도 주변에는 '윤 어게인'을 외치는 자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구치소에 있는 윤석열은 조사와 재판을 전면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한강진 대첩'과 '키세스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침 뉴스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서울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사람들 몸을 덮은 은박 담요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처럼 또 누군가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돕고 살피며 밤을 보낼 줄은."  (p.87)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내란이냐?'며 윤석열의 무죄를 주장하곤 한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논리. 누군가가 평화로운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가 깜짝 놀란 집주인이 소리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훔치지 못한 채 도망쳐 나왔다면 그는 무죄라는 주장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그들의 논리에 어이가 없어 때로는 실소가 터지지만, 내가 그들과 동시대를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불쑥 화가 치솟는다. 나도 작가도 윤석열의 파면 선고가 있었던 2025년 4월 4일까지 내면에서 치솟는 분노를 우리는 얼마나 가까스로 삭이며 울퉁불퉁한 시간들을 견뎌 왔던 것일까. 그런 시간들에 대한 위로는 누구로부터 받아내야 할 것인가.


"어리석음이 종종 늙음의 얼굴로 온다는 것은 기필코 늙는 존재인 내게도 섬뜩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어리석음이 마침내 늙음에서 개화했겠나, 인생 곳곳에 만발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생각하며 앉아 있다. 시국이 이래서 헛소리하는 이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있다."  (p.142)


우리는 그렇게 다시 봄을 맞았고,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계엄의 정당성을 외치는 이들과 윤석열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이 마치 일제 치하의 고등계 순사처럼 포진되어 있다. 내란 정국에서 보았던 건전한 시민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굳건한 힘과 의지로 민주 시민의 역량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반민주 세력이 우리 사회를 언제라도 다시 전복하려 들 것이다. 한번 보였던 바퀴벌레가 좀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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