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끝없이 변한다. '미치다'는 말만 해도 그렇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되다.'는 흔한 의미와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다.'는 의미로 주로 쓰이던 것이 최근에는 맛이 비정상적으로 맛있다거나 날씨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극단적으로 치닫는 현상에 대해서도 '미쳤다'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물론 '날씨가 미쳤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하자면 '비문(非文)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날씨가 인간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극단적인 상태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취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게 될 뿐 어떤 목적이나 의도는 내재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에 대해 정상이나 비정상을 가리는 의미의 '미치다'를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여러 대상에 대해 '미쳤다'는 말로 그 상태를 표현한다. 의미의 확장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다.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작은 일기>를 읽고 있다. 소설 <百의 그림자>를 통하여 황정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나는 이후 작가의 소설은 전부 읽어보았다. 황정은 작가는 소설에 있어 자신만의 문체를 지닌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예컨대 자신만의 문체를 지녔다는 건 작가가 쓴 소설 중 일부를 떼어낸 후 작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작가의 이름을 곧바로 알아맞힐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박민규 작가나 천명관 작가(불행하게도 <고래>에서만 그것을 유지했다.), 당연하지만 한강 작가, 최근에는 배수아 작가나 황정은 작가 등이 그렇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작가가 자신만의 문체를 유지한 채 오래도록 작품 활동을 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공중그네>를 쓴 오쿠다 히데오 역시 그 하나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자신만의 문체를 그는 자신이 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다시 재현하지 못했다. 천명관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황정은의 에세이 <작은 일기>는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던 2024년 12월 3일부터 2025년 5월 1일까지의 기록이다. 물론 일기라는 글의 특성상 자신의 일과 혹은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 등을 솔직하게 쓴 것이기에 작가가 쓴 소설의 문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간결하고 솔직하다.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던 4월 4일의 기록을 조금 옮겨본다.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感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p.166)


미친 자들이 일으킨 미친 행동으로 인해 대다수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안에 떨었던 지난 시간. 작가 역시 제정신으로는 살기 어려웠던 그 암흑의 시간 동안 무엇인가 쓰고, 행동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지 않았더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아서 자주 무력했지만 다른 작음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p.190 '후기' 중에서)에 대한 기록을 읽는다는 건 나에겐 꽤나 벅찬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일기>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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