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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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 단어에서 받는 느낌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다'거나 '골치가 딱딱 아프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나도 다르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내가 배웠던 철학(그때는 윤리나 세계사의 일부)은 인류의 삶에 어떠한 보탬도 되지 못하는 '한심한 짓거리'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철학은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난해한 학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대학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피숍이나 학사주점에서 철학적 담론을 나누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기 일쑤였다.  내 관점에서 그들은 아무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밥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철학을 혐오(?)하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철학에 빠져 살았다'고 말한다면 아마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애기를 하자면 길지만 최대한 짧게 요약해 보자.

 

나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에 도시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 형과 자취를 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집의 형편으로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였다.  공부를 잘하던 형이 공고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시골에서 만나던 친구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실력도, 가정 형편도, 체격도, 심지어 희여멀건 피부색까지도...  나는 그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견주어도 어느 것 하나 자신있게 내세울 수 없었던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먼저 잠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수면시간은 11시부터 2시까지, 하루에 3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졸음을 쫓기 위해 자취집 마당에 있었던 수돗물에 머리를 담그기도 했었다.  이런 일련의 행위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형은 지금도 명절에 나를 만나면 그때 얘기를 한다.  그때는 내가 참 무섭게 보였다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중학생인 동생이 잠을 쫓으려 한겨울의 수돗물에 머리를 담그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내가 정한 수면 습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전보다 늘어난 시간에 책을 읽기로 했다.  최종 목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서양철학을 독파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정한 것은 철학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친구들보다 더 많이 알고자 했던 지적 욕심이거나 지적 허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나는 철학자의 저서를 구할 수 있는 한 모두 구하여 읽었다.  그런 생활은 일종의 수도승의 생활과 다를 바 없는 금욕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기억력이 좋았던 나는 친구들의 감탄어린 시선에 우쭐했었고,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뜻도 모른 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플라톤의 저서부터 니이체의 저서까지 읽었다.

 

삶의 해법, 신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그때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달된 선물을 답례도 없이 넙죽넙죽 받는 것처럼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새로운 경험과 마주할 때,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은 어김없이 보내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 또는 새롭게 알게 된 어떤 지식은 적당한 상황이나 사물과 조우하여 새로운 틀로 변모되지 못하면 그것은 항상 '앎'이라는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실천적 의미의 지혜나 체화된 가치관으로의 진화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는 항용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맘에 딱 드는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생각만큼 자주 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혜의 발견은 일종의 '운'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내 나이쯤 살고보니 '지혜로운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철학은 이렇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예술, 학문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과 영화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모든 갈래와 만날 수 있고 모든 학문과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철학적 해석의 도구로 영화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작가는 이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트루먼 쇼>와 <굿 윌 헌팅>에서부터 <뷰티풀 마인드>, <메멘토>, <일 포스티노>에 이르기까지 8개의 주제로 29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내가 본 영화도 있고, 보지 못한 영화도 있었다.  그럼에도 책은 술술 읽혔다.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접목되는 부분에서는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좋은 영화에 대한 안내서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철학 입문서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는 언제 봐도 가슴을 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비록 가까운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손쉽게 선택하는 게 영화관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적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을 연구했던 많은 철학자를 생각할 수 있다면 영화를 관람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풍요롭고 벅찰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삶을 담은 영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일 수도 있는 장면 장면들이 철학적 영감과 함께 재해석될 수만 있다면 영화를 보는 재미와 감동은 더욱 커질 것이다.

 

"철학은 종종 이렇게 처음에는 '한심해 보이는 짓거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 한심해 보이는 짓거리에서 역사, 세계,우주를 변혁시키는 놀라운 이론들을 이끌어내곤 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왜 선생들은 거리에서 이 말을 하고 광장에서는 저 말을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플라톤은 '왜 꽃은 핀 대로 있지 않고 곧 지고 마는가?'라는 물음에서, 마르크스는 '어째서 가난뱅이는 가난한가?'라는 물음에서 문명사를 바꿔놓은 이론들을 끌어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했거니와 철학이란 남들이 무심히 스쳐지나는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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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고 번잡한 날은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렇다.  딱히 신경을 곤두 세울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병에 걸려 골골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하루 종일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뿔뿔이 흩어지기만 한다.  애먼 날씨 탓으로 돌리는 것도 참 부질없어 보이고, 길바닥에 떨어진 공처럼 제멋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상념을 뒤좇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어지러워 속이 메슥거린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지만, 오늘처럼 헛된 상념에 단단히 사로잡히는 날엔 사는 게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 편해서 그래요."하며 면박을 주는 게 아닌가.  '정말 그런가?'하는 의문이 얼마 간의 시간을 집어 먹고, 또 잠시 멍해지다가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는 일 없이 맥쩍게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다.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댄 탓에 입 안이 텁텁하고, 소태나 먹은 것처럼 쓰다.  이런 날 저녁으로 찬밥덩이를 밀어넣는 것도 처량맞을 듯하여 집에 오는 길에 근처의 마트에 들렀다.  점심도 일찍 먹어 속은 허한데 마땅히 손이 가는 물건이 없다.  빈 카트를 끌고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몇 바퀴를 돌았다.

 

내 집을 무시로 드나들던 아이들도 오늘은 수업이 없다고 안심한 탓인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장본 물건들을 거듬거듬 정리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괴괴한 어둠만이 남은 하루의 발치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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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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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거나 방어할 잠시의 겨를도 없이 사방에서 휘감기는 것들은 모두 싫어한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싫음'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울 것이다.  내 몸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는 것들.  그것이 설령 열락이나 더할 수 없는 행복일지라도 말이다.  이응준의 소설 속에는 그런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한동안 외면했거나 일부러 애써 피하려 했던 그런 것들.  형체도 없이 내 오감의 비상구로 슬며시 들어와서는 일순 전신에 소름이 확 돋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가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이론적인 귀결일 뿐이지 결코 실제적인 체감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날리는 방향을 보거나 나뭇잎이 쏠리는 방향을 보고 바람은 그 반대편에서 불어오겠거니 편하게 유추하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바람 속에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내 몸의 일부만(또는 한쪽편만)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본 적이 없다.  이응준의 소설은 8월말의 습한 바람처럼 그렇게 읽힌다.  지면에서 튀어나온 낱글자는 어색하게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물에 젖은 거즈처럼 모공 속으로 형체도 없이 스민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우룩한 는개에 젖듯이.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비롯,일곱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은 주제와 소재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색깔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과 죽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두 개의 키워드는 밀란 쿤데라식 철학적 사색과 신경숙의 슬픔이 교묘히 뒤섞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마치 우물 내벽에 매달린 두레박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지향하면서도 팽팽한 동아줄에 의해 허공에서 위태롭게 대롱거리는 두레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음처럼 삶은 시간이 멎기 전까지 헛된 몸짓일망정 쉼 없이 바동거려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는 인간 군상들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멈춤'은 '죽음'과 동일어가 된 지 오래이니까.

 

작가 이응준의 소설이 신경숙의 멜로나 축축함으로 빠지지 않는 까닭은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교묘히 파고드는 철학적 사색 덕분이 아닐까 한다.  예컨대 위태롭게 매달린 두레박은 우물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냉철함은 딱 그쯤에서 멈춘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비 오는 지구는 그렇지 않은 날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렇게 지겹던 방구석도 장마철만 되면, 꼭 내가 있어야만 할 자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눈을 감는다.  함박눈은 눈(目)으로 봐야 하지만, 비는 먼저 소리로 다가온다.  아침에 커튼을 걷어봐야만 비로소 폭설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새벽녘을 알 수 없는 감회로 서성인다.  만일 누군가 내게 어쩔 수 없이 눈 오는 세상과 비 오는 세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잠결에도 계속 지붕이 젖고 강이 불어남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비만 내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P.142)

 

그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멈추어도, 삶의 자각을 바동거리는 몸짓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서사와 추이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인지되는 그 무엇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각각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깨달음의 저편에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자학과 같은 몸부림을 쳐서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슬프다. 

 

최면시술사의 얘기를 다룬「Lemon Tree」에 이어 등장하는「이교도의 풍경」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동성애자로서 살다가 끝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문화비평가 구문모의 삶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뻔한 멜로 드라마가 될 법한 이 소재가 이응준의 작품에서는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고 느꼈다.  작가는 구문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죽음의 귀결을 '낙타를 사랑한 고래의 무모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어쩔 수 없는 유전자를 담담히 지켜보고 있다.

 

"서른다섯 해를 자라고 늙어가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 거대하고 위태위태한 밤이 다시금 도래하겠지.  앞으로는 누구를 만나든,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리라.  내가 아까 그녀에게 했던 대답은 틀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엔, 틀림없는 당사자들이 있다.  설혹, 그것이 고래와 낙타의 사랑일지라도 그러하다.  하얗게 빠른 속도로 풍경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사랑마저도 사각형의 쇠자물통을 하고 있는 거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P.61)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지금부터 딱 십 년쯤 지나면 고승의 염주알처럼 매끈하고 단아해진 자신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  혹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도 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허송세월?  밤마다 잘근잘근 씹다 버려진 쓸쓸함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비참한 아침풍경?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실체를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살고, 내일도 또 그렇게 집을 나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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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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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다 하더라도 결국 소설 속에서 내가 좋아하게 되는(또는 맘에 드는) 인물은 하나로 국한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것이 꼭 소설 속의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스토리의 정 중앙에 그 인물을 배치하고 나머지의 인물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내가 임의로 결정한 주변인들은 그들의 말, 행동, 생각, 사상 등 우리가 독자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내가 살면서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말이나 행동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보다 더한 신뢰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백화점의 점원이 권하는 옷보다는 우연히 동행한 친구의 안목을 더 신뢰하는 경우,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실수, 예컨대 내가 기대했던 결과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로 혼란스러워하거나 약간의 후회를 곁들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마땅히 치뤄야 할 대가라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들이 내게 준 사랑에 비하면 번거롭고 헝클어진 결과에 대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경비는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더구나 그들 중 누군가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달, 혹은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독서는 온전히 나만의 기억이며, 나만의 경험이라는 나의 아집이 산산히 부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 때로는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하면서도 끝내 다시 보지 않았던 책과 지금은 내용마저 아득한 마음 속의 명저들이 왜 내 삶과 끝내 동행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삶의 번잡함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던 책은 몇 권이나 될까? 하는 낙담은 결국 '독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원을 찾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저자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어머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항암치료를 기다리는 시간에 서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떻겠냐고.  회원이 단 둘뿐인 북클럽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저명한 교육자였으며 하버드 대학교의 입학처장과 돌턴 스쿨의 대학 진학 전문 지도교사를 역임했으며 난민 구조 활동과 아프가니스탄의 도서관 건립 사업에 헌신했던 저자의 어머니는 그에게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독서 파트너였던 셈이다.

 

책에는 저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2년여의 시간 동안 그들이 함께 읽고 토론했던 28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책들과 저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책, 그리고 최근에 같이 읽었던 모든 책들에 대해 모자는 서로의 생각을 듣고 말한다.  저자는 엄마와 함께 한 이 '마지막 북클럽'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과 조카들이 저자의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 있다면 과거를 기념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동시에 미래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책을 기억하게 될 테고, 아이들이 충분히 나이 먹으면 그들에게 그 책을 주고, 그것이 바로 할머니가 사랑했던 책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무나도 어린 손주들은 결코 할머니의 눈을 통해 영국제도를 바라보지 못할 테지만, 할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던 작가들의 눈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이다."    (P.184)

 

저자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가고 이를 지켜보는 저자도 슬픔과 불안 속에서 살지만 읽을 책을 고르고, 읽었던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문득 떠오른 책을 권하면서 말기암 환자라는 생각도, 그 곁을 지키는 안타까운 보호자라는 생각도 모두 잊는다.  언젠가 어머니가 죽고 많은 시간이 흐를지라도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장을 넘기면 그 시절의 어머니 음성이 자장가처럼 들려오지 않겠는가.  그때 읽었던 책은 죽음을 예고하는 죽은 활자의 집합체가 아니요, 대를 이어 영원히 이어지며 추억과 함께 살아 있을 벗이요, 가족인 것이다.  관계 속에서의 책, 추억 속에서의 책은 단순한 사물로서의 의미 이상인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나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를, 보통은 당신이 분명히 좋아했을 듯한 책에 대해서 막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머니가 없음에도, 어쨌든 그 내용을 이야기한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의 도서관 건립에 300만 달러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려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이 출간될 때쯤이면, 카불의 도서관도 건립돼 있을 터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P.434-435) 

나는 저자의 '마지막 북클럽'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저자는 여전히 어머니의 음성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물을 것이다.  "당신이 읽었던 책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안녕한가요?  그리고 내가 읽었던 책은 당신의 삶 속에서 잘 있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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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각은 뭐니 뭐니 해도 일어나자마자 산에 오르는 짧은 순간이다.

특히 오늘처럼 밤새 눈이 내린 날은 산을 오르기도 전에 한껏 들뜨고 설레게 마련이다.  연인과의 데이트 약속에 나가는 청춘남녀의 심정이랄까?  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바빠지고, 등산화의 신발끈을 바짝 조이고, 옆집이 깨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복도를 걷는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차가운 아침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

 

등산로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눈 덮힌 산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행복했던 기억들이 어린애마냥 눈밭을 뒹구는 동안,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하나둘 불이 켜졌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저마다의 가슴에 불을 밝히는 일이 아닌가.  아침이 왔노라고 어둠을 향해 당당히 선언하는 일일 터인데...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올라와 키가 큰 상수리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때마침 그 밑을 지나던 나는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 세례에 흠칫 놀랐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떨어질 줄 몰랐다.

 

산길에는 먹이를 찾으러 나왔는지 작은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지다 숲으로 사라지고, 잠이 덜 깬 산은 옅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잔가지와  나무둥치에 붙은 눈이 겨울의 정취를 자아낸다.  묏등에도 눈이 소복하다.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 눈 밟히는 소리가 재미있다.  거대한 정적에 둘러싸인 산과 그 고요 속을 걷는 나는 처음서부터 하나였음을 알겠다.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심살내리던 마음도 멀리 달아나고 어깨는 한결 가벼워진다.  입춘도 지났으니 봄도 멀지 않을 터, 샛노란 가벼움이 온 산을 뒤덮을 때면 보고픈 사람들과 유람이라도 떠나야겠다.  걸음걸음마다 발 밑에 밟히는 눈덩이가 내 발걸음을 마냥 느리게 했다.  조금만 더 머무르라고 내 발을 잡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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