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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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 단어에서 받는 느낌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다'거나 '골치가 딱딱 아프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나도 다르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내가 배웠던 철학(그때는 윤리나 세계사의 일부)은 인류의 삶에 어떠한 보탬도 되지 못하는 '한심한 짓거리'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철학은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난해한 학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대학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피숍이나 학사주점에서 철학적 담론을 나누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기 일쑤였다.  내 관점에서 그들은 아무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밥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철학을 혐오(?)하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철학에 빠져 살았다'고 말한다면 아마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애기를 하자면 길지만 최대한 짧게 요약해 보자.

 

나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에 도시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 형과 자취를 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집의 형편으로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였다.  공부를 잘하던 형이 공고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시골에서 만나던 친구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실력도, 가정 형편도, 체격도, 심지어 희여멀건 피부색까지도...  나는 그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견주어도 어느 것 하나 자신있게 내세울 수 없었던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먼저 잠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수면시간은 11시부터 2시까지, 하루에 3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졸음을 쫓기 위해 자취집 마당에 있었던 수돗물에 머리를 담그기도 했었다.  이런 일련의 행위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형은 지금도 명절에 나를 만나면 그때 얘기를 한다.  그때는 내가 참 무섭게 보였다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중학생인 동생이 잠을 쫓으려 한겨울의 수돗물에 머리를 담그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내가 정한 수면 습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전보다 늘어난 시간에 책을 읽기로 했다.  최종 목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서양철학을 독파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정한 것은 철학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친구들보다 더 많이 알고자 했던 지적 욕심이거나 지적 허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나는 철학자의 저서를 구할 수 있는 한 모두 구하여 읽었다.  그런 생활은 일종의 수도승의 생활과 다를 바 없는 금욕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기억력이 좋았던 나는 친구들의 감탄어린 시선에 우쭐했었고,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뜻도 모른 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플라톤의 저서부터 니이체의 저서까지 읽었다.

 

삶의 해법, 신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그때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달된 선물을 답례도 없이 넙죽넙죽 받는 것처럼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새로운 경험과 마주할 때,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은 어김없이 보내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 또는 새롭게 알게 된 어떤 지식은 적당한 상황이나 사물과 조우하여 새로운 틀로 변모되지 못하면 그것은 항상 '앎'이라는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실천적 의미의 지혜나 체화된 가치관으로의 진화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는 항용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맘에 딱 드는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생각만큼 자주 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혜의 발견은 일종의 '운'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내 나이쯤 살고보니 '지혜로운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철학은 이렇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예술, 학문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과 영화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모든 갈래와 만날 수 있고 모든 학문과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철학적 해석의 도구로 영화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작가는 이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트루먼 쇼>와 <굿 윌 헌팅>에서부터 <뷰티풀 마인드>, <메멘토>, <일 포스티노>에 이르기까지 8개의 주제로 29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내가 본 영화도 있고, 보지 못한 영화도 있었다.  그럼에도 책은 술술 읽혔다.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접목되는 부분에서는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좋은 영화에 대한 안내서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철학 입문서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는 언제 봐도 가슴을 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비록 가까운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손쉽게 선택하는 게 영화관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적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을 연구했던 많은 철학자를 생각할 수 있다면 영화를 관람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풍요롭고 벅찰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삶을 담은 영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일 수도 있는 장면 장면들이 철학적 영감과 함께 재해석될 수만 있다면 영화를 보는 재미와 감동은 더욱 커질 것이다.

 

"철학은 종종 이렇게 처음에는 '한심해 보이는 짓거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 한심해 보이는 짓거리에서 역사, 세계,우주를 변혁시키는 놀라운 이론들을 이끌어내곤 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왜 선생들은 거리에서 이 말을 하고 광장에서는 저 말을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플라톤은 '왜 꽃은 핀 대로 있지 않고 곧 지고 마는가?'라는 물음에서, 마르크스는 '어째서 가난뱅이는 가난한가?'라는 물음에서 문명사를 바꿔놓은 이론들을 끌어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했거니와 철학이란 남들이 무심히 스쳐지나는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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