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예술기행 -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곽재구 글, 정정엽 그림 / 열림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좋은 글이란 역시 치밀한 관찰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나 <원형의 섬 진도>를 읽을 때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곽재구의 예술기행』을 읽으면서 또 같은 생각을 했다.  달리 말하면, 생계에 목을 맨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을 지긋이, 또는 가까이서 찬찬히 살피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가만가만 짚어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언제나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다 밤이 되면 짚단처럼 풀썩 쓰러지는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 책은 <사평역에서>로 잘 알려진 곽재구 시인이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노래한 글들을 모아 묶은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결국 시인이 아끼고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시인이란 본디 겉으로 드러난 풍경을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이니 작가의 여정은 하나도 중요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그의 마음이 향하는 촉수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여 시인이 쓴 여행기는 지명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언제,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감칠맛이 난다.

 

"싸리꽃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을 제외하고는 가장 짙고 찬란하게 피어난 싸리꽃 무더기였다.  나는 조금 흥분했었을 것이다.  싸리꽃들은 길을 따라 어디론가 죽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그날의 그애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조급해졌으며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도 그대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다가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꽃 한 가지를 꺾었다.  앞으로 닥칠, 전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만남에 대한 추상이 마음속으로 찾아들었다."    (p.25)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다양하다.  이성복 시인, 소설가 김동리, 서정주 시인, 신동엽 시인, 화가 윤두서와 다산 정약용, 김환기 화백, 작곡가 윤이상, 박인환 시인, 소설가 이효석, 소설가 이청준과 한승원, 그리고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진도 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곽재구 시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아, 나는 누가 뭐래도 천상 한국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오랜 옛적부터 면면히 내려온 '한(恨)의 정서'가 내 핏줄 어딘가에서 고요히 숨죽이다가 그의 글로 인해 태곳적 우리 조상들의 삶과 이어져 꿈틀대곤 한다.

 

그래서일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을 찾아가는 작가와 그 길에 동행한 김유택 시인은 이효석의 자취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고 장재인 시인의 흔적을 따라간다.  장재인 시인은 서울 덕수 상고의 영어 선생으로, 그의 부인이었던 최영애는 내면 고교의 불어 선생으로 근무하며 한반도의 동과 서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다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곤 했었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고, 아들과 아내가 아비를 만나기 위해 탔던 강원여객 직행버스는 빗길에 섬강교 아래로 추락했다.  1990년 9월 1일의 사고였다.  탑승객 스물여덟 명 중 스물네 명이 사망하였고, 장재인 시인은 그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장재인 시인은 사고 발생 보름 만에 열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긴 유서를 남기고 이 지상을 떠났다고 한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시지보다 더 생생한 삶의 경종이 어디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처자를 따라간 저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말 것을 당부드리며,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분들은 제가 없어도 능히 견딜 수 있지만 저희 세 사람은 함께 있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 장재인 시인의 유서' 중에서 p.219)

 

이 책에는 '진도 소리를 찾아서'가 두 번 나온다.  그 두 번째의 '진도 소리를 찾아서'는 책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시인에게 삶의 애환이 담긴 절절한 가락은 차마 잊을 수 없는 시요,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유구한 역사가 아니었을까?  시인은 어쩌면 그 노랫가락 속에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에서 몇 홉쯤의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야 삶은 왜 이리 슬프냐.  근디 너는 왜 이리 예쁘냐.  산굽이를 따라 끝없이 늘어선 갈대들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회심곡 한자락을 이승의 서러운 산자락에 풀어놓고 있었다."    (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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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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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일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는 편이 좋다.  평소보다 눈에 힘을 반쯤 빼고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흔하디 흔한 일들도 마냥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슬몃 놓쳐버린 일들, 무채색의 흐릿한 일상도 시간이 멀찌감치 흘렀을 때는 분명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게 흘려버린 일들을 생각할 때면 과거에는 매우 소중하게 느꼈었던 것들과 별 것 아니라고 내팽겨쳤던 일들이 일순 자리바꿈을 하곤 한다.  후회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렇듯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후회는 어쩌면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품었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었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뒤바뀐 자리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게다.  그렇게 시작된 후회는 언제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으로 끝나곤 한다.

 

한강(韓江)의 소설은 독자들의 일상적이고도 소소한 후회를 떠올리게 한다.  장아찌독을 누르던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  가슴 깊이 눌렸던 슬픔이 오히려 헤살거리는 웃음으로 터져나올 때의 처연함.  그 단초는 언제나 한강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한다.  매번 그랬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그 언저리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그녀의 산문집은 그나마 조금 나았다.  얼마 전, 그녀의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고 리뷰를 썼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6099863)  그때도 나는 여전히 꿈과 의식의 경계에서 한참을 서성였었다.

 

생각이 생각만으로 끝난다는 것, 차고 넘치는 많은 생각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물 흐르듯 퍼져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답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 땡볕이 한낮의 소란을 깊이 삼켜버렸을 때의 비현실적 정적과 흠사한 부드러운 고요가 저릿저릿하게 밀려왔었다.  그쯤부터 나는 내 삶과 어깨를 겯고 흐르던 꿈, 이상과 같은 것들이 한층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던 헤르만 헤세의 일갈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삶의 한 귀퉁이를 제 손으로 무너뜨렸거나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삶의 외딴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들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는 현실은 쓰라리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만큼 아프다.  그러나 삶의 고통 속에서 바라볼 때의 '순리'라는 의미는 오히려 명징하다. 마치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의 하늘이 더없이 맑은 것처럼.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파란 돌" 중에서 p.214 - 215)

 

작가는 시간의 잔물결이 그려내는 삶의 무늬와 블랙홀처럼 빨려드는 죽음에 대하여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부조리에 대하여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다룬다.  삶을 대하는 독자의 시선이 숲이었다면 삶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낙엽이 쌓인 그루터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는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외면하려 하는 곳.  작가는 독자의 목을 틀어잡고 '똑바로 보라'고 외치는 듯하다.

 

문학평론가 강지희씨는 “한강의 소설은 아무리 겪어도 무뎌지지 않는 고통 속으로 영원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어둠 속에 한 줌의 희미한 빛이 구원처럼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서 “억지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낙망과 두려움을 거친 후에야 서서히 번져 오는 깊고 맑은 빛. 그것이 그녀의 소설을 고통으로 찍어낸 ‘빛의 지문(指紋)’으로 보이게 한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p.299)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살고 싶은 때는 죽음과 마주하는 그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꺼져 가는 불빛이 마지막으로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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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늘의 별을 동경하는 까닭은 어둠 속에서도 어둠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성긴 별 사이에는 도통 어둠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밝음 속에서 밝음만 도드라질 뿐이다.  자신보다 못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결심.  별은 그렇게 빛난다.

 

이번주에 뉴스를 달구었던 '국정원 사태'를 보면서 인간의 추악함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 공무원들이 갖은 선동과 모략으로도 모잘라 자신들의 추악함을 덮기 위해 국격과 국익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전 세계의 외교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  우리는 그 부끄러운 모습을 우리의 안방에서 보고야 말았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치의 발전은 서로간의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신뢰를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정원과 여당의 행태는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들의 추악함을 덮기 위하여 그보다 더 추악한 일을 함에도 한치의 죄의식이 없었다.  오히려 감언이설로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고자 했다.

 

스포츠 경기에는 규칙이 있고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마땅히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물며 선거에 있어서랴.  지난 대통령 선거는 게리맨더링보다 더 심한 규칙의 위반이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덕 본 게 없다고 한다.  예컨대 심판을 매수한 팀이 경기에서 실력으로 이겼다 치자.  그렇다고 심판을 매수한 잘못이 무마되는 것인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신뢰란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 원칙의 준수에 있는 것이다.

 

시궁창 냄새에 더하여 똥 냄새가 진동하는 정치의 모습을 보면서 어둠 속에서 더한 어둠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별처럼 빛나는 정치의 모습은 언제나 볼 수 있으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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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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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터 빅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통해서였다.  '시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페터 빅셀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고, 바라보고, 때로는 이야기 하는 원형질의 삶을 중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글은 다소 시니컬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세상에 대해 한발 물러선 듯한 그의 태도로 인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느 작가의 전작(全作)을 다 읽지 않아도 그 작가에 대한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 그런 작가가 있다.  페터 빅셀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 책 <책상은 책상이다>에는 어른들을 위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원제가 <아이들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맘에 드는 유형을 분류하여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지구가 정말 둥근지 확인해 보려고 길을 떠나는 남자, 사물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사람, 전혀 웃기지 않는 광대,수십 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혼자 발명에 전념하다가 자기가 천신만고 끝에 발명에 성공한 물건이 어느새 이미 세상에 다 보급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를 한없이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세상 모든 사물을 요도크라고 부르는 할아버지, 열차 시간표를 모조리 외우고 다니면서도 결코 기차를 타지 않으며 남들이 기차 타는 것까지 방해하는 남자, 아무것도 더 이상 알지 않고 살려고 애쓰다가 결국 중국어까지 배우게 되는 남자 등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편집증 환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 특이한 인물들이다.

 

"코뿔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나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나가지만, 우리 안을 두어 바퀴 돌고 나서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시 오래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너무 일찍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코뿔소에게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코뿔소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너무 늦은 것 같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집에 돌아와 그는 자기 코뿔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로지 코뿔소 얘기만 했다.  "내 코뿔소는 생각은 너무 느리고 돌진하는 건 너무 빠르지.  그건 정말 그래."  그러면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기 삶을 꾸려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중에서)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들만 골라 이야기로 꾸며 놓은 듯했다.  만약 우리와 가까운 이웃 중에 또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 이런 인물들이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내 짐작으로는 다들 그 사람의 행동 반경이 미치는 범위 바깥으로 슬금슬금 도망쳤지 싶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런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누구도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고 골치 아픈 사람쯤으로 취급할 이런 사람들을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면 작가가 보여준 이런 종류의 집착이나 편향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이런 집착이나 편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누구나 한두 가지의 집착이나 편향이 있을 터,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피하고 외면할 뿐 그들을 이해하고 가까이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제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손가락질하는 격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언어와 소통'의 문제는 타인에게 쏠린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규정짓기보다는 그에 앞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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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 - 카투니스트 동범의 네팔 스케치 포엠
김동범 지음 / 예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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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나는 딱히 뛰어난 병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문관'에 가까운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닥 띄지 않는(그런 사병이 있었나 싶은) 평범한 군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대 군수과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나는 늘 타자기를 안고 살았다.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책상마다 4벌식 타자기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그 타자기를 이용하여 보고서를 쓰고 타 부대에 보낼 공문도 썼었다.

 

입대한 지 6개월이 지나야만 일병으로 승급할 수 있었던 그 당시에 일병은 내무반에서 고참을 수발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고참의 업무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일병은 언제나 바빴고 야간업무로 밤을 새우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야간업무를 다 마치고 나서도 서둘러 내무반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간만큼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사무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던 새벽녘의 그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새벽녘의 그 시간 동안 제대를 앞둔 고참의 연애 스토리를 글로 옮기곤 했다.  전역을 하는 고참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서였다.  고요한 새벽에 '타닥타닥' 울리던 타자기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그리운 장면이다.  마땅히 줄 게 없어서 재미삼아 써주었던 글을 고참들은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추자도에 살던 한 고참은 내가 쓴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응모하여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의 학보에 실리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내가 휴가를 나가면 술 한 잔 사겠다는 말과 함께.

 

단순히 제목만 보고 골랐던 이 책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카투니스트로 소개된 저자의 글은 오히려 신선했다.  그래서인지 네팔을 여행하며 기록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과 짤막짤막한 글들로 빼곡하다.  때로는 현지의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한끼의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림을 통하여 수줍은 남자의 사랑을 대신 전하기도 하는 장면들이 내 지나간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단한 작전을 부여받은 스파이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하고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앞쪽에 풀썩 앉아서 그림 그릴 자세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괜찮다, 라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이내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다른 사람을 그리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멀리서 네팔 동생과 그의 동료들이 수군대며 눈치를 보고 있다.  다 그린 그림을 찢어 동생을 쳐다본다.  '너에게 줄까?' '어떻게 할까?'란 동작을 취하자 동생 놈이 슬그머니 발을 뺀다.  그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사뭇 진지한 척하며 그녀에게 그림을 주었다.  "저 녀석이 당신을 그려달래서 그렸어요.  저 녀석이 당신을 많이 좋아한대요."  그림을 받아든 여자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흘깃흘깃 동생을 확인한다."    (p.304-305)

 

어쩌면 '길을 잃는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히 자신의 목적지를 에둘러서 갈 뿐, 그래서 조금 늦게 도착할 뿐 길을 잃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삶에서도 그런 게 아닐까?  어차피 삶을 완전히 이탈할 것도 아닌데 쉬엄쉬엄 둘러 간들 어떠리.  작가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그렇게 조금은 다른 겨울을 겪고 난 뒤 겨울이라는 계절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작가.

 

"혹, 이 책을 읽으시고 네팔에/가실 분들은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저기, 히말라야에 가시거든/제 이야기 하나 전해주세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너를 잊지 않았다고./언제일지 모르지만/다시/너에 품에 안길 거라고.//"    (p.320)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화성거주프로젝트(The Mars Homestead™ Project)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는 화성에 거주할 지원자 4명을 모집하는데 400명이나 몰렸다는 내용이었다.  화성까지는 기껏해야 10개월 정도 걸려서 도착하지만 사실상 귀환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 중 한명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화성까지 가지 않아도 똑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같은 지구 안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다만 조금 늦게 도착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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