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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예술기행 -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곽재구 글, 정정엽 그림 / 열림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좋은 글이란 역시 치밀한 관찰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나 <원형의 섬 진도>를 읽을 때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곽재구의 예술기행』을 읽으면서 또 같은 생각을 했다. 달리 말하면, 생계에 목을 맨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을 지긋이, 또는 가까이서 찬찬히 살피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가만가만 짚어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언제나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다 밤이 되면 짚단처럼 풀썩 쓰러지는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 책은 <사평역에서>로 잘 알려진 곽재구 시인이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노래한 글들을 모아 묶은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결국 시인이 아끼고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시인이란 본디 겉으로 드러난 풍경을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이니 작가의 여정은 하나도 중요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그의 마음이 향하는 촉수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여 시인이 쓴 여행기는 지명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언제,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감칠맛이 난다.
"싸리꽃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을 제외하고는 가장 짙고 찬란하게 피어난 싸리꽃 무더기였다. 나는 조금 흥분했었을 것이다. 싸리꽃들은 길을 따라 어디론가 죽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그날의 그애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조급해졌으며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도 그대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다가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꽃 한 가지를 꺾었다. 앞으로 닥칠, 전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만남에 대한 추상이 마음속으로 찾아들었다." (p.25)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다양하다. 이성복 시인, 소설가 김동리, 서정주 시인, 신동엽 시인, 화가 윤두서와 다산 정약용, 김환기 화백, 작곡가 윤이상, 박인환 시인, 소설가 이효석, 소설가 이청준과 한승원, 그리고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진도 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곽재구 시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아, 나는 누가 뭐래도 천상 한국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오랜 옛적부터 면면히 내려온 '한(恨)의 정서'가 내 핏줄 어딘가에서 고요히 숨죽이다가 그의 글로 인해 태곳적 우리 조상들의 삶과 이어져 꿈틀대곤 한다.
그래서일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을 찾아가는 작가와 그 길에 동행한 김유택 시인은 이효석의 자취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고 장재인 시인의 흔적을 따라간다. 장재인 시인은 서울 덕수 상고의 영어 선생으로, 그의 부인이었던 최영애는 내면 고교의 불어 선생으로 근무하며 한반도의 동과 서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다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곤 했었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고, 아들과 아내가 아비를 만나기 위해 탔던 강원여객 직행버스는 빗길에 섬강교 아래로 추락했다. 1990년 9월 1일의 사고였다. 탑승객 스물여덟 명 중 스물네 명이 사망하였고, 장재인 시인은 그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장재인 시인은 사고 발생 보름 만에 열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긴 유서를 남기고 이 지상을 떠났다고 한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시지보다 더 생생한 삶의 경종이 어디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처자를 따라간 저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말 것을 당부드리며,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분들은 제가 없어도 능히 견딜 수 있지만 저희 세 사람은 함께 있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 장재인 시인의 유서' 중에서 p.219)
이 책에는 '진도 소리를 찾아서'가 두 번 나온다. 그 두 번째의 '진도 소리를 찾아서'는 책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시인에게 삶의 애환이 담긴 절절한 가락은 차마 잊을 수 없는 시요,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유구한 역사가 아니었을까? 시인은 어쩌면 그 노랫가락 속에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에서 몇 홉쯤의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야 삶은 왜 이리 슬프냐. 근디 너는 왜 이리 예쁘냐. 산굽이를 따라 끝없이 늘어선 갈대들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회심곡 한자락을 이승의 서러운 산자락에 풀어놓고 있었다." (p.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