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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특별하지 않은 일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는 편이 좋다. 평소보다 눈에 힘을 반쯤 빼고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흔하디 흔한 일들도 마냥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슬몃 놓쳐버린 일들, 무채색의 흐릿한 일상도 시간이 멀찌감치 흘렀을 때는 분명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게 흘려버린 일들을 생각할 때면 과거에는 매우 소중하게 느꼈었던 것들과 별 것 아니라고 내팽겨쳤던 일들이 일순 자리바꿈을 하곤 한다. 후회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렇듯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후회는 어쩌면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품었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었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뒤바뀐 자리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게다. 그렇게 시작된 후회는 언제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으로 끝나곤 한다.
한강(韓江)의 소설은 독자들의 일상적이고도 소소한 후회를 떠올리게 한다. 장아찌독을 누르던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 가슴 깊이 눌렸던 슬픔이 오히려 헤살거리는 웃음으로 터져나올 때의 처연함. 그 단초는 언제나 한강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한다. 매번 그랬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그 언저리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그녀의 산문집은 그나마 조금 나았다. 얼마 전, 그녀의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고 리뷰를 썼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6099863) 그때도 나는 여전히 꿈과 의식의 경계에서 한참을 서성였었다.
생각이 생각만으로 끝난다는 것, 차고 넘치는 많은 생각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물 흐르듯 퍼져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답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 땡볕이 한낮의 소란을 깊이 삼켜버렸을 때의 비현실적 정적과 흠사한 부드러운 고요가 저릿저릿하게 밀려왔었다. 그쯤부터 나는 내 삶과 어깨를 겯고 흐르던 꿈, 이상과 같은 것들이 한층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던 헤르만 헤세의 일갈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삶의 한 귀퉁이를 제 손으로 무너뜨렸거나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삶의 외딴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들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는 현실은 쓰라리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만큼 아프다. 그러나 삶의 고통 속에서 바라볼 때의 '순리'라는 의미는 오히려 명징하다. 마치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의 하늘이 더없이 맑은 것처럼.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파란 돌" 중에서 p.214 - 215)
작가는 시간의 잔물결이 그려내는 삶의 무늬와 블랙홀처럼 빨려드는 죽음에 대하여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부조리에 대하여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다룬다. 삶을 대하는 독자의 시선이 숲이었다면 삶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낙엽이 쌓인 그루터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는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외면하려 하는 곳. 작가는 독자의 목을 틀어잡고 '똑바로 보라'고 외치는 듯하다.
문학평론가 강지희씨는 “한강의 소설은 아무리 겪어도 무뎌지지 않는 고통 속으로 영원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어둠 속에 한 줌의 희미한 빛이 구원처럼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서 “억지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낙망과 두려움을 거친 후에야 서서히 번져 오는 깊고 맑은 빛. 그것이 그녀의 소설을 고통으로 찍어낸 ‘빛의 지문(指紋)’으로 보이게 한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p.299)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살고 싶은 때는 죽음과 마주하는 그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꺼져 가는 불빛이 마지막으로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