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 - 카투니스트 동범의 네팔 스케치 포엠
김동범 지음 / 예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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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나는 딱히 뛰어난 병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문관'에 가까운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닥 띄지 않는(그런 사병이 있었나 싶은) 평범한 군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대 군수과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나는 늘 타자기를 안고 살았다.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책상마다 4벌식 타자기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그 타자기를 이용하여 보고서를 쓰고 타 부대에 보낼 공문도 썼었다.

 

입대한 지 6개월이 지나야만 일병으로 승급할 수 있었던 그 당시에 일병은 내무반에서 고참을 수발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고참의 업무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일병은 언제나 바빴고 야간업무로 밤을 새우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야간업무를 다 마치고 나서도 서둘러 내무반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간만큼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사무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던 새벽녘의 그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새벽녘의 그 시간 동안 제대를 앞둔 고참의 연애 스토리를 글로 옮기곤 했다.  전역을 하는 고참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서였다.  고요한 새벽에 '타닥타닥' 울리던 타자기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그리운 장면이다.  마땅히 줄 게 없어서 재미삼아 써주었던 글을 고참들은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추자도에 살던 한 고참은 내가 쓴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응모하여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의 학보에 실리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내가 휴가를 나가면 술 한 잔 사겠다는 말과 함께.

 

단순히 제목만 보고 골랐던 이 책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카투니스트로 소개된 저자의 글은 오히려 신선했다.  그래서인지 네팔을 여행하며 기록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과 짤막짤막한 글들로 빼곡하다.  때로는 현지의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한끼의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림을 통하여 수줍은 남자의 사랑을 대신 전하기도 하는 장면들이 내 지나간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단한 작전을 부여받은 스파이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하고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앞쪽에 풀썩 앉아서 그림 그릴 자세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괜찮다, 라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이내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다른 사람을 그리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멀리서 네팔 동생과 그의 동료들이 수군대며 눈치를 보고 있다.  다 그린 그림을 찢어 동생을 쳐다본다.  '너에게 줄까?' '어떻게 할까?'란 동작을 취하자 동생 놈이 슬그머니 발을 뺀다.  그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사뭇 진지한 척하며 그녀에게 그림을 주었다.  "저 녀석이 당신을 그려달래서 그렸어요.  저 녀석이 당신을 많이 좋아한대요."  그림을 받아든 여자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흘깃흘깃 동생을 확인한다."    (p.304-305)

 

어쩌면 '길을 잃는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히 자신의 목적지를 에둘러서 갈 뿐, 그래서 조금 늦게 도착할 뿐 길을 잃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삶에서도 그런 게 아닐까?  어차피 삶을 완전히 이탈할 것도 아닌데 쉬엄쉬엄 둘러 간들 어떠리.  작가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그렇게 조금은 다른 겨울을 겪고 난 뒤 겨울이라는 계절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작가.

 

"혹, 이 책을 읽으시고 네팔에/가실 분들은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저기, 히말라야에 가시거든/제 이야기 하나 전해주세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너를 잊지 않았다고./언제일지 모르지만/다시/너에 품에 안길 거라고.//"    (p.320)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화성거주프로젝트(The Mars Homestead™ Project)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는 화성에 거주할 지원자 4명을 모집하는데 400명이나 몰렸다는 내용이었다.  화성까지는 기껏해야 10개월 정도 걸려서 도착하지만 사실상 귀환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 중 한명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화성까지 가지 않아도 똑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같은 지구 안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다만 조금 늦게 도착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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