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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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마저 곱게 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책이 있다.  내 단단한 손톱이 작가의 여리디 여린 감성에 생채기를 낼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거칠어진 내 호흡마저 신경이 쓰이는데 그럴 때면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여린 숨결이 문득 부러워지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시인의 깊은 사색이 낙엽처럼 모이고 모여 독자의 머릿속에서 햇잎처럼 되살아나는 것.  그녀의 산문집은 잔설처럼 소복히 쌓이는 달빛의 음영이다.  또는 그렇게 읽을 일이다.

 

"이토록 이윽한 몽상과 휴식과 사랑의 시간.  나는 잠깐 발길을 멈추고 저 능선들이 품고 있을 다람쥐며 오소리며 산새들과 작은 벌레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한 목소리를 들은 듯합니다.  목소리이되, 그것은 몸 밖으로 소리를 파열시켜 내어보이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몸 속을 물결치며 우웅우웅 복화술로 말하듯 스며나오는 달의 목소리였습니다."    (p.43-44 '귀래에서 달을 보다'중에서)

 

작가는 스물아홉의 나이부터 통과제의처럼 이 글을 썼노라고 고백한다.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다른 아홉 즈음에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어떤 통과제의의 기록'을 남길 것을 소망한다.  꽉 찬 열을 향해 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그 아홉에 말이다.

 

"시로 풀어내기엔 너무 습습하거나 달뜬 것들, 혹은 너무 메마른 것들의 나신을 벌판 쪽으로 밀어올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청춘이 내 의식에 남긴 빛과 그림자의 환한 구멍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벗은 영혼을 심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의 자유, 나와 우리의 평화는 어떤 속삭임으로 영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p.4 '책머리에'중에서)

 

 1996년 창작과비평에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던 시인은 2000년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펴내었고, 2002년 첫 산문집으로 이 책 <물 밑에 달이 열릴 때>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죽음'에 매혹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는 시인은 자신이 향했던 곳(이를 테면 울릉도, 허난설헌 생가, 강원도 귀래면, 시인의 고향인 강릉 등)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가령 모네,꾸르베,프리다 깔로 등)과 읽었던 책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독서로, 독서에서 그림 감상으로, 그림 감상에서 고요한 사색과 몽환의 세계 속으로, 제 아무리 행위가 변한다 한들 순간의 삶에서 빚어내는 진실의 무늬는 같을 것이다.  시인은 그 탐색의 순간들을 말하려 했다.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은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p.101)   

 

'속세라는 불구덩이 집 속에서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구원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시인으로 이끌었던 사람들과, 책과, 영화와, 그림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인연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구성은 형식상으로는 총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주로 기억에 남는 장소와 시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 가족사에 대하여, 2부에서는 현실에서 만난 삶의 부조리와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3부에서는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하여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모여 이 책으로 태어났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일이란, 피 한 바가지를 시주받고 피 한 바가지를 시주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썼던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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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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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평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소한 직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4만여 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직업이야 허다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싶다.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고전 평론가라니...  아무튼 고미숙 작가는 자칭, 타칭 '고전 평론가'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겨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고전 평론가'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정년 자율업!', '학연? 지연? 혈연? 등등과 절대 무관한 100% 노력 및 능력제', '공부+친구+밥 평생 보장'.  물론 그녀만의 주장이다.(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녀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블루 오션'임에 틀림없다.(이런 제길!  진즉 알았더라면 나도 고전 평론가나 될 것을)

 

각설하고, 어떤 주제, 어떤 장르를 들고 나와도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작가가 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그렇고, 고전 평론가 고미숙 작가가 그렇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그녀의 쫄깃한 문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필수적으로 거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우아한 자세로 앉는다.(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가죽 의자가 좋겠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포개어 앉는다.(일명 '샤론 스톤 자세'가 되시겠다.)  왼손에는 작가의 책을 가볍게 얹는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에스프레소가 들려 있다.  안경을 낀 독자라면 안경은 가볍게 코끝에 걸친다.  이제 그만하면 자세는 완벽하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표현을 읽을라치면 자신이 읽던 책을 누가 볼새라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으로 와락 껴안게 되고 커피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사태가 이런 지경인데도 한미당국자들은 하나같이 확률상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위험물질만 제거하면, 먹어도 상관없다는 망언(!)을 한 의원도 있었다(미친!).  사스 때는 단 한 명의 의심 환자도 출현하지 않았건만, 그 생난리를 떨더니, 광우병은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한다."    (p.55)

 

그렇다.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도 클래식(?)하고 우아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착각도 심한 착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우아'는커녕 시정잡배의 말투에서 조금 정제된 정도라고나 할까?  작가는 교양과 도발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녀의 이런 '거침없음'은 '우아함'으로 치장한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여성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지금 여기', 곧 근대의 풍경과 서사를 스케치한 것이다.  위생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恨)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神), 이동과 접속 등.  이 항목들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온 핵심기제들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이 지금 어떤 시대적 조건에 발딛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유를 조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보라!"    (p.5 '책머리에'중에서) 

 

책의 내용은 1.'괴물'(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 2.'황산벌'(거시기! 표상을 전복하다), 3.'음란 서생'(포르노그라피와 멜로, 그 어울림과 맞섬), 4. '서편제'('한'(恨)과 '예술'의 은밀한 공모), 5.'밀양'(가족, 고향, 신:출구없는 욕망의 폐쇄회로), 6.'라디오스타'('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이다.  우리가 한번쯤은 보았을(또는 들었을) 듯 싶은 영화들이다.  작가는 이 영화들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의 가족 파괴와 인간 소외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개신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다.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 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녀회 등 각종 써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p.196)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녀의 '치열함'에 있을 듯하다.  고전은 읽기 어렵고,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배경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꾸준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언저리에도 이르기 어렵다는 얘기다.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맘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위트와 유머, 또는 도발적인(?) 문체가 아무런 바탕도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한테 고립감보다 더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도,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도, 그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망이 어느 순간, 전도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배경을 지워 버리고 오직 혼자만 빛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혼자만 빛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가족과 연애가 블랙홀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다."    (p.241)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그 익숙함에 다소 나른해지고 금세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썼느냐에 따라 흥미는 배가되기도 하고 시들해지기도 한다.  고미숙 작가의 야생성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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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이형권 지음 / 고래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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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봄소풍 장소로 언제나 인근의 절을 선택하곤 했었다.  가을에는 운동회로 소풍을 대신했으니 소풍 장소는 항상 절로 한정된 셈이었다.  이것은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곳곳에 놀이동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만한 채육관이나 강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그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소풍날이면 학교에서 출발하여 30분 정도를 걸어 목적지인 절에 도착하였고, 그 때마다 솜사탕 장수며 음료수를 파는 아줌마들이 아이들보다 미리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적멸보궁 앞의 잔디밭에 전교생이 모여 노래자랑도 하고 반별로 보물찾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종교로서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닌데도 절에 대한 거부감이나 종교적 적대감은 전혀 없다.  지금도 지인들과 가끔 등산을 할 때면 산의 일부분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사에 꼭 들르곤 한다.  산사의 그 고즈넉한 풍경은 숫기 없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았던 '절골'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의 가장 끄트머리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고,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절집 주인의 쌍둥이 아들도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이형권 시인이 쓴  『산사: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을 읽으면 내 어린 시절의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가슴 속으로 불어오는 듯하다.  구멍난 창호지 사이로 푸른 달빛이 스미는 듯도 하고.  

 

"한국인에게 절이란 이렇듯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공간이다.  불교의 의식과 신앙활동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건축이 있고 음악이 있고 공예가 있으며 회화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산사는 세속의 번뇌를 씻어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깨우침의 장소가 아니던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 오면서 한국의 불교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으니, 산사에는 겨레가 이루어 놓은 정신문화의 총화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머리말'중에서) 

 

내 신앙은 이제 하느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에 자리를 잡았지만 내 마음의 자장은 성당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의 터전이 절망으로 쩍쩍 갈라지는 날이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산사로 향하게 되니 말이다.  산사는 복닥거리는 현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도피처요, 현실세계를 벗어난 피안의 세계이자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두고 온 어미의 품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서산시 운산면의 개심사를 필두로, 내소사, 부석사, 대흥사, 송광사, 선암사, 선운사, 화암사, 미황사, 실상사, 해인사, 백련사, 월정사, 운주사, 통도사,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금산사, 귀신사, 건봉사, 경주 남산까지  22곳의 산사를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산사가 갖는 자연미 뿐만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던 역사적 유래를 더듬고 있다.

 

"그런데 선운사 골짜기에서 피어나는 상사화는 마치 수많은 군중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처럼 처절할 때가 있다.  이른 새벽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출 때,  상사화는 붉은색이 아니라 선연한 핏자국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도솔암 선재스님은 상사화를 두고 좋은 세상을 기다리다가 보람도 없이 쓰러져 간 동학군들의 넋이라고 했다."    (p.109 '선운사'중에서) 

 

지루한 '반쪽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자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눈 쌓인 겨울 산사로 나를 이끌기는커녕 청아한 풍경소리에 살풋 잠들게 했다.  더위는 이제 내 어깨를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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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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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 또는 작가가 일껏 모르고 지내다가도 한순간, 정말로 찰나와 같은 어느 한순간 '아, 저 사람도 늙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공인이란 본디 우리네가 나이를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저 막연하게 '몇 살쯤 되었을 걸?'하면서도 주름기 하나 없는 탱탱한 피부를 보면 '내가 잘못 알았었나?'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 연예인의 나이이고, 작가의 나이가 아니던가.  그렇게 무심히 지내던 어느 날, TV 화면에 얼핏 스쳐 지나가던 그녀의, 또는 그 남자의 축 쳐진 목주름에 눈길이 닿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나도, 내가 좋아하는(또는 좋아했던) 그 사람도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팬이다.  팬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팬카페에 가입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카페 회원들과 벙개 모임을 하거나,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뙤약볕에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도 해본 적 없고, 근거리에서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며칠씩이나 노숙을 불사한 적도 물론 없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조용히 신경숙 작가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쓴 글이라면 일부분만 읽어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이 책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는 그 자신감이 일정 부분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그녀만의 특징이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생경하고 낯설다고 느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변화다.  작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음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던 것은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소재의 선택에서도 그랬지만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보여지던 인과관계의 논리성, 또는 날카로움은 찾기 어렵다.  사실 그간에 써왔던 작가의 글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장편소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긴 글을 쓰려면 묘사의 적확성, 회화적인 글쓰기, 친근한 구어체 표현 등 작가의 타고난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었겠지만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무기처럼 사용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주인공이 화가 났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화가 났으니 그 주변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도 덩달아 화가 나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그것은 흡입력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작은 것도 쉽게 지나치지 못 하는 작가의 결벽쯤으로 여겨졌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단편소설집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아주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마치 그날 그날의 일기를 모은, 또는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편지들을 모은 수필집처럼 보인다.  구성의 기승전결도, 문체의 긴박함도, 묘사의 치밀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독자도 소설 속의 허구로서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이야기, 오래 전의 내 생각인 양 가볍게 읽힌다.  작가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쓰기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그쪽으로 옮겨갈 수는 없다.  첫째는 나의 능력 부족이고, 둘째는 나는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208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는 한 서평지 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손바닥만한 글을 자유롭게 써서 연재를 하자'는 그의 제안과 그가 표현한 '손바닥만한' '자유롭게'라는 말에 끌려서 여기에 실린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타고난 나의 성향과는 정 반대의 길이 비록 쉽고 편한 길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는 작가의 말처럼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저 너머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다.  하고픈 말은 많은데 그것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 삼키는 일은 또 얼마나 가슴 답답한 일이겠는가.

 

작가가 쓴 짧은 이야기들은 쉽게 읽힌다.  하나하나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두루뭉술 넘어갈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어떤 편견이나 주관적 잣대에 의지하지 않은 채 피력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사는 삶의 터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그 하나하나의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나의 주관과 편견은 내가 보는 모든 것들에 스미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길가의 풀 한 포기에, 그 옆을 소리도 없이 오가는 개미 한 마리도 사랑스럽고 때론 가엾게 여겨질 때면 보여지는 것들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비 탓이라고 느껴지는 날, 혹은 눈 탓이라고.  다시 말하면 그저 무슨 탓을 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은 웬만하면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잘 지내던 사람인데도 그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다 거슬려서 괜히 시비 걸고 싶어지니까"    (p.163  '봄비 오시는 날'중에서)

 

오늘 아침 산행길에서 이소(離巢)를 하는 어린 새의 날갯짓을 보았다.  생명이 자라는 모습은 언제나 대견하다.  그 끝이 어찌 되리라는 섯부른 예측은 생명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 곁에서 조용히 있어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삶이란 결국 경험하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작가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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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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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테오의 책은 처음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첫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한 작가가 쓴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처음 읽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향후의 책읽기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나 우연히 읽었던 한 부분만으로 선택했던 책들 중에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주 좋았거나 크게 실망했거나.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작가가 볼리비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 에세이이다.  책은 제본에서부터 일반의 보통 책과는 사뭇 달랐다.  옆으로 넘기는 대부분의 책이 일반적이라면 이 책은 상하로 넘기도록 제본되어 있다.  마치 청첩장이나 연하장처럼 말이다.  세로보다는 가로 비율이 더 큰 사진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작가의 취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어체로 씌어진 그의 글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처럼 때로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꼬로이꼬로 향하는 길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삶 전체를 걸고 길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그 정도 가치를 걸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    (p.17 '죽음의 도로'중에서) 

 

'글쓰기'라는 것이 '말하기'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때로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는 경우가 있다.  말이란 본디 하면 할수록 할 얘기가 더 많아지는 게 아니던가.  한동안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다시 전화를 걸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은 관성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한동안 쉼 없이 터져나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만 지속되기도 한다.  내 의지만으로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의 글은 계속된다.  그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멈추고 다시 시작했을 그 시간의 여백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가 향한 남미의 나라.  작가는 자신의 여행이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이자 사람이 궁금한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게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부닥뜨리는 과도한 감상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독자의 감정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직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한 한낱 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서울처럼 분주한 정글을 걷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카카오가 필요한데도 나는 여전히 카카오를 찾지 못합니다.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물하지도 못합니다.  대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쉽게 피곤해지는 건 순전히 카카오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카카오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피곤하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대정글 사람들보다 카카오만큼 더 고단합니다."    (p.142 '정글 과일 카카오'중에서)

 

나는 사실 볼리비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마을 코파까바나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소금 사막, 언제 적 일인지도 모르는 볼리비아 혁명 정도가 다일 것이다.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자연의 신비쯤으로 여겼던 우유니 소금 사막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면에 적고 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미의 고원지대를 나는 전혀 상상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에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것들은 죽음 이후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쌓인 눈물이 모여 구름이 되면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소금 사막이 놓아주지 않아서, 진득하게 썩지 못해서, 떠날 수 없던 것들이 눈물을 흘려, 비로소 몸을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제야 사막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기적이 시작됩니다.  사막이 호수가 되고, 오랜 슬픔이 호수를 떠나는 기적."    (p.258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중에서)  

 

옛날 잉카문명이 번성했던 곳, 볼리비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자연을 존중하는 듯 보이는 볼리비아의 사람들.  작가는 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서울의, 대한민국의 바쁜 일상과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여행자의 비현실적인 일상 속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 여유와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복은 일종의 서열과 같은 것이어서 내가 가진 행복의 서열이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느끼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럽게 행복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조언합니다.  자기보다 높은 행복은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낮은 행복을 갖고 있으면서 높은 행복을 쳐다보는 건 삼가야 하는 거라고.  자기보다 낮은 수준의 행복을 보며 만족하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나 나는 지금 다른 방식으로 행복합니다.  우월이 아니라 다름, 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남다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p.280  '소금 호텔에 밤이 내리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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