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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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 또는 작가가 일껏 모르고 지내다가도 한순간, 정말로 찰나와 같은 어느 한순간 '아, 저 사람도 늙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공인이란 본디 우리네가 나이를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저 막연하게 '몇 살쯤 되었을 걸?'하면서도 주름기 하나 없는 탱탱한 피부를 보면 '내가 잘못 알았었나?'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 연예인의 나이이고, 작가의 나이가 아니던가.  그렇게 무심히 지내던 어느 날, TV 화면에 얼핏 스쳐 지나가던 그녀의, 또는 그 남자의 축 쳐진 목주름에 눈길이 닿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나도, 내가 좋아하는(또는 좋아했던) 그 사람도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팬이다.  팬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팬카페에 가입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카페 회원들과 벙개 모임을 하거나,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뙤약볕에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도 해본 적 없고, 근거리에서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며칠씩이나 노숙을 불사한 적도 물론 없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조용히 신경숙 작가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쓴 글이라면 일부분만 읽어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이 책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는 그 자신감이 일정 부분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그녀만의 특징이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생경하고 낯설다고 느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변화다.  작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음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던 것은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소재의 선택에서도 그랬지만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보여지던 인과관계의 논리성, 또는 날카로움은 찾기 어렵다.  사실 그간에 써왔던 작가의 글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장편소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긴 글을 쓰려면 묘사의 적확성, 회화적인 글쓰기, 친근한 구어체 표현 등 작가의 타고난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었겠지만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무기처럼 사용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주인공이 화가 났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화가 났으니 그 주변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도 덩달아 화가 나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그것은 흡입력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작은 것도 쉽게 지나치지 못 하는 작가의 결벽쯤으로 여겨졌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단편소설집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아주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마치 그날 그날의 일기를 모은, 또는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편지들을 모은 수필집처럼 보인다.  구성의 기승전결도, 문체의 긴박함도, 묘사의 치밀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독자도 소설 속의 허구로서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이야기, 오래 전의 내 생각인 양 가볍게 읽힌다.  작가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쓰기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그쪽으로 옮겨갈 수는 없다.  첫째는 나의 능력 부족이고, 둘째는 나는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208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는 한 서평지 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손바닥만한 글을 자유롭게 써서 연재를 하자'는 그의 제안과 그가 표현한 '손바닥만한' '자유롭게'라는 말에 끌려서 여기에 실린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타고난 나의 성향과는 정 반대의 길이 비록 쉽고 편한 길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는 작가의 말처럼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저 너머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다.  하고픈 말은 많은데 그것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 삼키는 일은 또 얼마나 가슴 답답한 일이겠는가.

 

작가가 쓴 짧은 이야기들은 쉽게 읽힌다.  하나하나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두루뭉술 넘어갈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어떤 편견이나 주관적 잣대에 의지하지 않은 채 피력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사는 삶의 터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그 하나하나의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나의 주관과 편견은 내가 보는 모든 것들에 스미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길가의 풀 한 포기에, 그 옆을 소리도 없이 오가는 개미 한 마리도 사랑스럽고 때론 가엾게 여겨질 때면 보여지는 것들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비 탓이라고 느껴지는 날, 혹은 눈 탓이라고.  다시 말하면 그저 무슨 탓을 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은 웬만하면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잘 지내던 사람인데도 그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다 거슬려서 괜히 시비 걸고 싶어지니까"    (p.163  '봄비 오시는 날'중에서)

 

오늘 아침 산행길에서 이소(離巢)를 하는 어린 새의 날갯짓을 보았다.  생명이 자라는 모습은 언제나 대견하다.  그 끝이 어찌 되리라는 섯부른 예측은 생명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 곁에서 조용히 있어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삶이란 결국 경험하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작가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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