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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평점 :
책장마저 곱게 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책이 있다. 내 단단한 손톱이 작가의 여리디 여린 감성에 생채기를 낼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거칠어진 내 호흡마저 신경이 쓰이는데 그럴 때면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여린 숨결이 문득 부러워지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시인의 깊은 사색이 낙엽처럼 모이고 모여 독자의 머릿속에서 햇잎처럼 되살아나는 것. 그녀의 산문집은 잔설처럼 소복히 쌓이는 달빛의 음영이다. 또는 그렇게 읽을 일이다.
"이토록 이윽한 몽상과 휴식과 사랑의 시간. 나는 잠깐 발길을 멈추고 저 능선들이 품고 있을 다람쥐며 오소리며 산새들과 작은 벌레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한 목소리를 들은 듯합니다. 목소리이되, 그것은 몸 밖으로 소리를 파열시켜 내어보이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몸 속을 물결치며 우웅우웅 복화술로 말하듯 스며나오는 달의 목소리였습니다." (p.43-44 '귀래에서 달을 보다'중에서)
작가는 스물아홉의 나이부터 통과제의처럼 이 글을 썼노라고 고백한다.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다른 아홉 즈음에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어떤 통과제의의 기록'을 남길 것을 소망한다. 꽉 찬 열을 향해 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그 아홉에 말이다.
"시로 풀어내기엔 너무 습습하거나 달뜬 것들, 혹은 너무 메마른 것들의 나신을 벌판 쪽으로 밀어올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청춘이 내 의식에 남긴 빛과 그림자의 환한 구멍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벗은 영혼을 심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의 자유, 나와 우리의 평화는 어떤 속삭임으로 영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p.4 '책머리에'중에서)
1996년 창작과비평에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던 시인은 2000년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펴내었고, 2002년 첫 산문집으로 이 책 <물 밑에 달이 열릴 때>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죽음'에 매혹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는 시인은 자신이 향했던 곳(이를 테면 울릉도, 허난설헌 생가, 강원도 귀래면, 시인의 고향인 강릉 등)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가령 모네,꾸르베,프리다 깔로 등)과 읽었던 책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독서로, 독서에서 그림 감상으로, 그림 감상에서 고요한 사색과 몽환의 세계 속으로, 제 아무리 행위가 변한다 한들 순간의 삶에서 빚어내는 진실의 무늬는 같을 것이다. 시인은 그 탐색의 순간들을 말하려 했다.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은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p.101)
'속세라는 불구덩이 집 속에서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구원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시인으로 이끌었던 사람들과, 책과, 영화와, 그림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인연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구성은 형식상으로는 총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주로 기억에 남는 장소와 시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 가족사에 대하여, 2부에서는 현실에서 만난 삶의 부조리와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3부에서는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하여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모여 이 책으로 태어났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일이란, 피 한 바가지를 시주받고 피 한 바가지를 시주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썼던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