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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에세이스트 테오의 책은 처음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첫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한 작가가 쓴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처음 읽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향후의 책읽기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나 우연히 읽었던 한 부분만으로 선택했던 책들 중에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주 좋았거나 크게 실망했거나.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작가가 볼리비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 에세이이다. 책은 제본에서부터 일반의 보통 책과는 사뭇 달랐다. 옆으로 넘기는 대부분의 책이 일반적이라면 이 책은 상하로 넘기도록 제본되어 있다. 마치 청첩장이나 연하장처럼 말이다. 세로보다는 가로 비율이 더 큰 사진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작가의 취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어체로 씌어진 그의 글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처럼 때로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꼬로이꼬로 향하는 길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삶 전체를 걸고 길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그 정도 가치를 걸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 (p.17 '죽음의 도로'중에서)
'글쓰기'라는 것이 '말하기'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때로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는 경우가 있다. 말이란 본디 하면 할수록 할 얘기가 더 많아지는 게 아니던가. 한동안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다시 전화를 걸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은 관성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한동안 쉼 없이 터져나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만 지속되기도 한다. 내 의지만으로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의 글은 계속된다. 그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멈추고 다시 시작했을 그 시간의 여백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가 향한 남미의 나라. 작가는 자신의 여행이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이자 사람이 궁금한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게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부닥뜨리는 과도한 감상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독자의 감정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직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한 한낱 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서울처럼 분주한 정글을 걷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카카오가 필요한데도 나는 여전히 카카오를 찾지 못합니다.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물하지도 못합니다. 대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쉽게 피곤해지는 건 순전히 카카오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카카오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피곤하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대정글 사람들보다 카카오만큼 더 고단합니다." (p.142 '정글 과일 카카오'중에서)
나는 사실 볼리비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마을 코파까바나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소금 사막, 언제 적 일인지도 모르는 볼리비아 혁명 정도가 다일 것이다.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자연의 신비쯤으로 여겼던 우유니 소금 사막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면에 적고 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미의 고원지대를 나는 전혀 상상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에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것들은 죽음 이후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쌓인 눈물이 모여 구름이 되면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소금 사막이 놓아주지 않아서, 진득하게 썩지 못해서, 떠날 수 없던 것들이 눈물을 흘려, 비로소 몸을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제야 사막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기적이 시작됩니다. 사막이 호수가 되고, 오랜 슬픔이 호수를 떠나는 기적." (p.258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중에서)
옛날 잉카문명이 번성했던 곳, 볼리비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자연을 존중하는 듯 보이는 볼리비아의 사람들. 작가는 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서울의, 대한민국의 바쁜 일상과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여행자의 비현실적인 일상 속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 여유와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복은 일종의 서열과 같은 것이어서 내가 가진 행복의 서열이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느끼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럽게 행복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조언합니다. 자기보다 높은 행복은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낮은 행복을 갖고 있으면서 높은 행복을 쳐다보는 건 삼가야 하는 거라고. 자기보다 낮은 수준의 행복을 보며 만족하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나 나는 지금 다른 방식으로 행복합니다. 우월이 아니라 다름, 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남다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p.280 '소금 호텔에 밤이 내리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