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고전 평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소한 직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4만여 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직업이야 허다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싶다.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고전 평론가라니...  아무튼 고미숙 작가는 자칭, 타칭 '고전 평론가'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겨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고전 평론가'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정년 자율업!', '학연? 지연? 혈연? 등등과 절대 무관한 100% 노력 및 능력제', '공부+친구+밥 평생 보장'.  물론 그녀만의 주장이다.(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녀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블루 오션'임에 틀림없다.(이런 제길!  진즉 알았더라면 나도 고전 평론가나 될 것을)

 

각설하고, 어떤 주제, 어떤 장르를 들고 나와도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작가가 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그렇고, 고전 평론가 고미숙 작가가 그렇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그녀의 쫄깃한 문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필수적으로 거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우아한 자세로 앉는다.(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가죽 의자가 좋겠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포개어 앉는다.(일명 '샤론 스톤 자세'가 되시겠다.)  왼손에는 작가의 책을 가볍게 얹는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에스프레소가 들려 있다.  안경을 낀 독자라면 안경은 가볍게 코끝에 걸친다.  이제 그만하면 자세는 완벽하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표현을 읽을라치면 자신이 읽던 책을 누가 볼새라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으로 와락 껴안게 되고 커피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사태가 이런 지경인데도 한미당국자들은 하나같이 확률상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위험물질만 제거하면, 먹어도 상관없다는 망언(!)을 한 의원도 있었다(미친!).  사스 때는 단 한 명의 의심 환자도 출현하지 않았건만, 그 생난리를 떨더니, 광우병은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한다."    (p.55)

 

그렇다.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도 클래식(?)하고 우아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착각도 심한 착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우아'는커녕 시정잡배의 말투에서 조금 정제된 정도라고나 할까?  작가는 교양과 도발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녀의 이런 '거침없음'은 '우아함'으로 치장한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여성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지금 여기', 곧 근대의 풍경과 서사를 스케치한 것이다.  위생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恨)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神), 이동과 접속 등.  이 항목들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온 핵심기제들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이 지금 어떤 시대적 조건에 발딛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유를 조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보라!"    (p.5 '책머리에'중에서) 

 

책의 내용은 1.'괴물'(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 2.'황산벌'(거시기! 표상을 전복하다), 3.'음란 서생'(포르노그라피와 멜로, 그 어울림과 맞섬), 4. '서편제'('한'(恨)과 '예술'의 은밀한 공모), 5.'밀양'(가족, 고향, 신:출구없는 욕망의 폐쇄회로), 6.'라디오스타'('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이다.  우리가 한번쯤은 보았을(또는 들었을) 듯 싶은 영화들이다.  작가는 이 영화들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의 가족 파괴와 인간 소외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개신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다.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 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녀회 등 각종 써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p.196)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녀의 '치열함'에 있을 듯하다.  고전은 읽기 어렵고,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배경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꾸준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언저리에도 이르기 어렵다는 얘기다.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맘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위트와 유머, 또는 도발적인(?) 문체가 아무런 바탕도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한테 고립감보다 더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도,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도, 그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망이 어느 순간, 전도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배경을 지워 버리고 오직 혼자만 빛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혼자만 빛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가족과 연애가 블랙홀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다."    (p.241)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그 익숙함에 다소 나른해지고 금세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썼느냐에 따라 흥미는 배가되기도 하고 시들해지기도 한다.  고미숙 작가의 야생성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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