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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이형권 지음 / 고래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적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봄소풍 장소로 언제나 인근의 절을 선택하곤 했었다. 가을에는 운동회로 소풍을 대신했으니 소풍 장소는 항상 절로 한정된 셈이었다. 이것은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을 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곳곳에 놀이동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만한 채육관이나 강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그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소풍날이면 학교에서 출발하여 30분 정도를 걸어 목적지인 절에 도착하였고, 그 때마다 솜사탕 장수며 음료수를 파는 아줌마들이 아이들보다 미리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적멸보궁 앞의 잔디밭에 전교생이 모여 노래자랑도 하고 반별로 보물찾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종교로서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닌데도 절에 대한 거부감이나 종교적 적대감은 전혀 없다. 지금도 지인들과 가끔 등산을 할 때면 산의 일부분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사에 꼭 들르곤 한다. 산사의 그 고즈넉한 풍경은 숫기 없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았던 '절골'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의 가장 끄트머리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고,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절집 주인의 쌍둥이 아들도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이형권 시인이 쓴 『산사: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을 읽으면 내 어린 시절의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가슴 속으로 불어오는 듯하다. 구멍난 창호지 사이로 푸른 달빛이 스미는 듯도 하고.
"한국인에게 절이란 이렇듯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공간이다. 불교의 의식과 신앙활동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건축이 있고 음악이 있고 공예가 있으며 회화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산사는 세속의 번뇌를 씻어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깨우침의 장소가 아니던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 오면서 한국의 불교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으니, 산사에는 겨레가 이루어 놓은 정신문화의 총화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머리말'중에서)
내 신앙은 이제 하느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에 자리를 잡았지만 내 마음의 자장은 성당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의 터전이 절망으로 쩍쩍 갈라지는 날이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산사로 향하게 되니 말이다. 산사는 복닥거리는 현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도피처요, 현실세계를 벗어난 피안의 세계이자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두고 온 어미의 품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서산시 운산면의 개심사를 필두로, 내소사, 부석사, 대흥사, 송광사, 선암사, 선운사, 화암사, 미황사, 실상사, 해인사, 백련사, 월정사, 운주사, 통도사,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금산사, 귀신사, 건봉사, 경주 남산까지 22곳의 산사를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산사가 갖는 자연미 뿐만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던 역사적 유래를 더듬고 있다.
"그런데 선운사 골짜기에서 피어나는 상사화는 마치 수많은 군중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처럼 처절할 때가 있다. 이른 새벽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출 때, 상사화는 붉은색이 아니라 선연한 핏자국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도솔암 선재스님은 상사화를 두고 좋은 세상을 기다리다가 보람도 없이 쓰러져 간 동학군들의 넋이라고 했다." (p.109 '선운사'중에서)
지루한 '반쪽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자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눈 쌓인 겨울 산사로 나를 이끌기는커녕 청아한 풍경소리에 살풋 잠들게 했다. 더위는 이제 내 어깨를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