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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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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나무, 풀 모두가 가을을 예감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을뿐 아직 본격적인 가을의 현란하고 강렬하고 환희에 찬 색들을 펼쳐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를 띤 적이 없는'듯한 가을이다.  나는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습관처럼 할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의 그늘에서 더부살이를 하셨던 나의 할머니.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도 언제나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던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고 온종일 술에 절어 살아갈 때에도 날품을 팔아 번 돈으로 손주들 용돈을 챙겨주시곤 했다.

 

언제였던가, 쫓기듯 서울로 이사를 했던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탄식처럼 말씀하셨다.  이제는 당신이 죽어도 묻힐 땅 한 뙈기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나는 그 말 속에서 할머니가 진정으로 아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은 농사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 탓에 고만고만한 나이의 어린 형제들과 일밖에 모르셨던 어머니, 자식의 방탕을 당신 탓으로만 돌리셨던 할머니는 종일 밭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된 농사일에 지칠 법도 하였건만 할머니는 틈틈이 꽃을 가꾸셨다.  꽃씨가 귀했던 당시에도 할머니는 분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해당화 등 여러 꽃씨를 잘도 구해 오셨다.  변변한 정원은 고사하고 빈터도 마땅치 않았던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꽃을 심을 자리를 어쩌면 그렇게 잘도 골라내셨을까.  담장 밑, 장독대 주변, 화장실 가는 길,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물을 길어 먹었던 실개천 옆의 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가득했고 뒷열에는 듬성듬성 키 큰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나는 가을 햇살이 뽀얗게 내려 앉던 그 코스모스길과 깨끗하게 비질 된 마당 한 켠에서 시들어가던 봉숭아 꽃잎을 생각하며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었다.  정갈한 머릿결처럼 비질 자국이 선명한 그 길을 유년 시절의 내가 꿈결처럼 걷고 있다.  살랑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의 리듬에 맞춰 나는 그 길에 작은 발자국을 얹고 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을 때 나의 할머니가 잃었던 것은 어쩌면 철마다 꽃을 피우던 그 작은 꽃밭이었는지도 모른다.  꽃을 가꾸면서 잠시 잊을 수 있던 삶의 시름과 자연 속에서의 무한한 위로를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으리라.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은 절제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런 능력은 원래 누구나 타고났으나 현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왜곡되고 잃어버린 채 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들이다.  이런 작은 기쁨은 이른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눈에 띄지도 않고 일상생활 속에 흔하게 흩어져 있어서 일에만 열중하는 수많은 사람의 둔한 감성으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71)

 

나의 할머니가 그랬듯 헤르만 헤세도  일생 동안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다고 한다.  작가이자 화가이고 한때는 포도농사로 생계를 꾸렸을 만큼 솜씨 좋은 원예가였던 헤세가 31~77세 사이에 자연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이 책에서 그는 간결하고도 투명한 문체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에게 정원 일은 혼란과 고통에 찬 시대에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고 작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청량제였다.

 

"미국 취향으로 변한 현대인들의 음악성이란 건축을 소유하는 것 이상이 아니고, 반짝거리는 니스 칠이 된 자동차가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이 되고 말았거든.  그런 것에나 만족하고 즐기는 반쪽자리 인간에게 시험 삼아 예술수업을 한번 해보게.  꽃이 시드는 것, 장미가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온갖 생명과 모든 아름다움의 비밀로서 함께 체험하도록 가르쳐보게나.  그들은 아마 놀랄 것이네! "    (p.97 - p.98)

 

독자들에게 위대한 작가의 글일수록 극과 극의 평가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이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렇게 읽혀지고 또 그런 평가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작가가 깨달았던 진리의 깊이를, 작가가 누렸을 삶의 평화와 그 크기를 독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이 주는 커다란 기쁨과 환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라져가는 계절의 모습을 글로, 그림으로 하나라도 더 남겨두지 못해 아쉬워했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글은 손자들의 행복한 삶을 그렇게도 갈망했던 내 할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이 가을에 내 유년의 그때로 되돌아가 코스모스 물결이 일렁이던 그 길을 온종일 걷고 싶다.  가을 햇살이 부서지던 애기 젖살처럼 뽀얀 그 길에서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 긴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밤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도 싶고, 까르르 웃고도 싶다.  삶이 지나치게 빠른 도시인의 일상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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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가슴에서 거꾸로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도 제 가슴 속에서는 제 키만큼 큰 가방을 메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때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말하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던 유아기의 그때로 퇴행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가 세월에 비례하여 쑥쑥 자라는 것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추석 명절에 처갓집을 방문하였을 때 저와 동서들에게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며 하셨던 장인어른의 말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든이 넘은 장인어른이 다섯 살 무렵에 찍었다는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칠십 년도 더 지난 사진 속에서 당신은 뭔가에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습니다.  장인어른은 사진과 함께 그때의 추억 한 토막을 들려주시면서 한껏 그리움에 젖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데 지난 일들은 어제 일처럼 또렷해."라고 말이죠.

 

주말부부로 지내는 내게 아들은 각별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석에 함께 보냈던 시간이라야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 며칠도 친척들과의 어수선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아들과 단 둘이서 호젓하게 보낸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화를 통하여 매일매일의 아들의 일상을 전해 듣고는 있지만 그리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부풀려지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런 까닭에 나는 아들을 만날 때마다 허락도 없이 아들의 물건들을 뒤적이곤 합니다.  아들의 손때가 묻은 레고 모형과 스케치북과 독서록 등. 그런 흔적들은 내 가슴 속에서 언젠가 아들의 지금 모습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석에 우연히 보았던 '고래'에 대해 쓴 아들의 영어 스피치 원고를 고치지 않고 옮겨 보았습니다. 

  

Whales are animals which live in seas. But they are not fish. They are mammals like humans. There are more than seventy- five different kinds of whales living all around the world's seas. We can divide whales into two main kinds: toothed whales and whalebone whales.  Toothed whales have teeth and hunt food by their teeth. Whalebone whales have baleens, which are like mustaches.  They use baleens to filter the food from the water by drinking and spitting water. Whales are born in water but they don't  die. It's because their tail comes out first and their mother pushes the baby to breathe. The baby knows that it shouldn't breathe until he or she reaches the surface. There are many kinds of whales. Many whales move in groups. Groups can be two or three upto hundreds of whales. The columns of water are actually their breath that is mixed with the cold air. Many people hunt whales. We should protect our giant friends living in seas. We can protect them by protesting whale hunting and telling our friends about it, too.  Thanks for listening to my speech!

 

아들은 내 가슴 속에서 여전히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모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모두 내 마음 속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리움의 세계에서는 항상 시간이 거꾸로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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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많지 않은 주제에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게 어쩌면 시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헌법 제21조에도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다고 하니 용기를 내어 써보려구요.

지금 쓰는 내용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사람마다 다 다를 수는 있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좋아지는 점이 꽤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들 단점을 찾는 것에만 급급할 뿐 장점은 말하지 않더군요.  두서없지만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까닭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점이 좋았어요.

어렸을 적에 무서워했던 귀신이나 요괴, 도깨비 등이 이제 그 실체를 알게 된 까닭인지 더 이상 두렵지 않더군요.  저는 어렸을 때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던 듯합니다.  두려워 하는 어른도 많았고, 어둠이 짙었던 밤도 두려웠고, 간간이 들리던 부엉이 울음소리도 무서웠습니다.  아, 또 있어요!  실체도 알지 못하던 '죽음'도 두려웠어요.  그랬던 제가 이처럼 무덤덤해질 수 있었던 데는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 한몫한 것 같아요.  물론 아직도 내게서 두려움을 완전히 다 몰아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죠.

 

나이가 들면서 그동안 나를 지배해왔던, 기복이 심하고 불안정했던 나의 감정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좋아요.  지나고 나면 다 후회할 일이지만 우리는 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 파르르하며 화를 내곤 하잖아요?  나이가 어릴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게 마련이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해를 더하면서 실수를 통하여 배우는 게 많아지면 크게 화낼 일도, 크게 낙담할 일도, 또는 크게 기뻐할 일도 줄어들더군요.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기대가 줄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람관계에 있어 좀 더 원만해졌다는 점이에요.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이 이제는 어떤 진리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디다.  13억 중국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불리는 지셴린의 책인데요,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나의 관찰 결과에 따르면 나쁜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내가 관찰한 몇몇 나쁜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변하지 않았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들을 위해 뭐라 변명을 해주고 싶어도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다.  어떤 때는 나도 정말 궁금하다.  세상에 정말 '나쁜 사람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짧고 간결하게 쓰려고 했는데 말이 길어지네요.  재주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이보다 훨씬 더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까 봅니다.  이제부터는 제 눈에 비친 꼴불견들을 쓰고 싶거든요.  젊어서는 별 느낌도 없었던 일들이 나이가 들면서 꼴불견으로 비춰지는 게 있습디다.

 

첫째는 나이 든 사람들의 성형입니다.  제 눈에는 꼴불견 1호로 보이거든요.  내 생각에 사람의 외모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서서히 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그래야만 본인도 정신적 충격을 덜 받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성형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봐요.  제 주변에도 주름살 제거 수술을 받거나 보톡스 주사를 맞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곧 닥칠 정신적 충격을 생각하면 불안불안하게만 보입니다.  마치 지진의 충격처럼 말이죠.  지진의 원리 아시죠?  지각과 상부 맨틀은 탄성체인 암석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한도까지는 구부러지지만 탄성한도를 넘으면 암석은 깨지고 그때 발생한 진동이지표에 전달됨으로써 땅이 흔들리는 원리죠.  즉 사람의 성형이라는 게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이거나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도피 행위잖아요?  영원히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느 날 의학적 도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본인이 받을 충격은 지진의 충격과 맞먹지 않을까요?

 

둘째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게 마련이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게 너무도 당연하죠.  그럼에도 몇몇 나이든 분들은 자신이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자연을 파괴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생태학자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감사와, 생동하는 어린 생명력에 대한 찬미와,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에 대한 인식이 자신도 모르게 솟아나야 마땅하거늘 개인의 들끓는 욕심은 나이도 잊게 하는가 봅니다.

 

제 눈에 비친 꼴불견도 나열하자면 이보다 한참이나 더 많습니다만 그만하렵니다.  제가 오히려 이상한 놈으로 보일까 봐서요.  저는 제 곁에서 자연스럽게 주름이 지는 제 아내가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제 아이의 놀라운 생명력도 감탄스럽구요.

 

오늘 아침에는 창밖으로 가는 빗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자동차 소리 등 이러저러한 삶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더군요.  이런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소리를 선별적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외부 환경에 자리를 펴듯 마음을 펼쳐 놓지 않으면 이런 소리들은 결코 신의 연주곡처럼 들리지 않거든요.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감사가 늘어날수록, 나이 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일수록 우리의 젊은이들도 나이 든 사람들을 더욱 존경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을 배우고 시간을 멈추려는 해괴한 짓거리는 당장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존경받지 못할 어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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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3-09-1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하게 느끼는 부분중에 하나가 나이를 먹을 수록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이 사라지는 부분이에요. 옛날은 연락 안하는 친구들이 너무 섭섭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그들도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가끔 결혼식, 아이들 돌...뭐 이런 행사때 얼굴 보는게 어디냐..그렇게 생각하니 섭섭한것도 없어요..

꼼쥐 2013-09-24 13:3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어쩌면 열정이 식어 무덤덤해졌다고 부정적으로 평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나이가 들수록 여유롭고 편해졌다고 생각해요.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성긴 마음결로 순한 바람이 스칠 듯한 9월입니다.

명절을 코앞에 둔 번잡한 주말, 서두를 것도 없는데 마음만 분주하고,

아이처럼 괜스레 딴짓을 하며 한나절을 보내고 싶은 그런 날들이 쫓기듯 흘러갑니다.

 

 

과학과 연관된 책을 접할 때마다  나는 괜한 욕심을 부리곤 합니다.  전공 분야도 아닌데 말입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까요.  아인슈타인에 대한 일화나 에피소드는 차고 넘치도록 읽거나 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살아 있는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유행처럼 팔리는 자기 계발서를 몇 권쯤 읽어 본 분이라면 성공학 분야의 대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나도 언젠가 그의 책을 두어 권 읽어 본 듯합니다.  그러나 대가의 이면에 가려진 젊은 시절의 노력과 경험담은 얼핏 듣기만 하였을 뿐 책으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느 유명인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힘겨웠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만큼 널리 읽힌 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에게도 최근에 새로 구입한 <어린왕자>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우리가 전 인생에 걸쳐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요? <어린왕자>를 100번 이상 읽었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합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취향이 많지는 않더라도 더러 있지 않을까요. 그의 시니컬한 문장이 때로는 독자의 마음을 가볍게 할 때가 있습니다. 속 깊은 이야기도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능력이 그의 매력인 듯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에세이를 즐겨 읽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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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3-09-0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
몇번 방문은 했는데 게으른 유령 블로거라서 덧글을 늘 못 달고 갔다가 저와 같은 책 읽고 싶은 에세이 페이퍼 보고 반가워서 덧글 쓰고 후다닥 사라집니다.
저도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하거든요. ^^
지난번 읽은 에세이는 이상하게 야동 순재가 아닌 야동 할배 하루키가 생각이 나서 진짜 즐겁게 읽었네요.

꼼쥐 2013-09-13 1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요즘은 블로그 업데이트를 잘 못하겠더라구요. 환절기라서 그런지 피곤하기만 하구 말이죠. 추곤증인가요? ㅎㅎ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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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좋은 책일수록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 봄소풍 자리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유난히 보물찾기에 재주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서너 개씩 찾는 동안 나는 단 하나도 찾지 못한 채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책 한 쪽도 읽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그때 내 손에 쥐어지던 쓸쓸한 바람결이 되살아나곤 한다.  이따금 찾아오는 그 서늘한 느낌은 나로 하여금 바쁜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 악착같음은 어데서 오는 것일까?  그때의 쓸쓸함일까, 아니면 나이를 더할수록 집요해지는 삶의 허기짐일까?  나는 그 둘을 마음속으로 응시하며 성큼 다가온 가을을 살고 있다.

 

도시의 가을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도시인의 조울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설움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왈칵 몰려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도시인의 이 느닷없는 감정이 말갛게 변하여 초겨울 눈으로 내리는지도 모른다.  가을은 그렇게 한 계절을 계절로 느낄 겨를도 없이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다가 후다닥 자취를 감추곤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가을이 지쳐올 때마다 나는 정희재 작가의 책을 읽는다.  버릇처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정희재 작가를 거장으로 꼽는다.  내게 있어 문학 분야의 거장으로 인정되는 단 하나의 조건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폭을 넓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지구의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이 작가의 삶에 녹아들 때, 비록 그가 쓴 글이 어쭙잖아 보여도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생명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의 글은 거짓이요, 위선일 수밖에 없다.

 

"도시, 서로의 곁을 내주지 않는 익명성을 편리로 인정해 주는 공간.  도시인, 익명의 공간에서 시치미를 떼며 살지만, 누군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사무치게 바라는 외로운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새벽잠을 설친 순간을 기어이 이겨내며 우린 참 치열하게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 마음 다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이도 있으리라.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작가의 말' 중에서)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정희재 작가의 일기와 같은 글이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을 것만 같다.  그 눈물 한방울로 인해 마음의 짐은 한결 덜어지곤 했다.  작가의 글은 스산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막막함에 가슴을 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듯하다.  세계 각국의 도시와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마음 공부를 해왔던 저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사람들과 턱없이 치솟는 배추값을 걱정하는 도시의 소시민들에게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며 위로하고 있다.  곧 있으면 추석.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니까 뉴스에서 헬기까지 띄워 가며 보여주는 영상은 이 시대가 표준으로 장려하고픈 덕목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이 행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고 느낀다.  이 결핍감과 박탈감이야말로 시스템이 바라는 심리적인 충격 요법이다.  표준에 속하라.  반도의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차량들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는 한민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다.  저처럼 혼잡과 불편을 딛고 가야할 곳, 끝끝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이유로든 이 도시에서 조금씩 일그러지고 빈틈을 지닌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시스템의 전언을 보고 듣다가 밀린 잠을 채울 뿐."    (p.90 ~ p.91)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처음오로 도시에 가 보았다는 작가는 중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한 뒤로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도시의 삶을 선택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고독하고 피로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시인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들을 세심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혼자 밥 먹기, 택배 받기, 출근하기, 명절 보내기, 편의점 가기, 전화하기, 장보기 등 바쁜 도시인의 일상을 46개의 소제목으로 쓰고 있다.

 

도시라는 거대한 실체와 마주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행복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길 바랐다는 작가는 이 책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묻고 답하는 길에서 주운 작은 열매라고도 했다.  도시의 변방으로 한걸음 물러날 때마다 한 켜씩 쌓이는 죄의식은, 속절없이 달았던 '게으름'이라는 죄목의 꼬리표는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이다.

이 가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는 한 해의 수확을 기뻐하는 노랫소리가 빗소리처럼 세상을 적실지 모르겠지만 그 귀퉁이 한옆에서는 먼짓내 풀풀 나는 마른 땅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어떤 모습으로 살든 행복을 찾는 줄기찬 노력만은 멈추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같은 도시인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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