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개정판)
공지영.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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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유일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 간의 사랑처럼 서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이 끝나는 순간 본인의 삶도 함께 내려놓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간에 사랑했던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졌다는 사실을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비슷한 스토리의 사랑 이야기를 수많은 변주의 소설이나 시로, 혹은 음악이나 그림으로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여 감상하였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갈구하는 까닭 역시 우리 삶의 주제가 사랑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삶이 지속되는 한, 가슴의 심장이 뛰는 한 사랑을 향한 영혼의 심장도 쉼 없이 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노카시라 공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사슴 떼가 야트막한 언덕을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나는 잠시 내 환청을 믿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이 소리는 그와 아침마다 듣던 피아노 소리, 그의 어머니가 연주회에서 치던 피아노 소리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p.20 '공지영 편')


오지 않는 가을을 기다리며 이제나저제나 하릴없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늦여름의 어느 시기에 내가 읽었던 사랑 이야기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 원작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었습니다.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이 소설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에 의해 여자와 남자의 시각에서 쓰인 로맨스 소설이지만 한 방송사에 의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원작 소설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공지영 작가의 소설보다는 산문집을 더 좋아했던 까닭에 그녀가 쓴 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미 읽어본 나로서는 그와 같은 기획 형태에 조금 구태의연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루룩 내처 읽고 말았습니다.


1권은 여주인공 최홍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공지영 작가의 작품입니다.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젊은 시절의 윤동주처럼 일본에 닿았던 홍은 우연히 만났던 아오키 준고와의 우연이 겹치면서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도 없는 낯선 땅에서 문득문득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 매일 뛰었습니다. 서툴렀던 동거를 끝내고 홍은 결국 귀국을 결심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고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떠나는 순간에도 강하게 남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 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 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 봐."  (p.230 '공지영 편')


2권은 남자 주인공 아오키 준고의 시선으로 쓴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입니다. 아오키 준고와 최홍 사이에는 각자가 따로 살았던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습니다. 준고는 사사에 히카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되어 한국에 나타났습니다. 최홍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내일출판사의 편집자와 함께 준고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연은 다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지만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재회에 동요한 나머지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백합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얀 옷을 즐겨 입던 홍이는 지금 어른스러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내 앞에 서 있다."  (p.14 '츠지 히토나리 편')


홍이와 헤어졌던 시간 동안 홍이를 생각하며 썼던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절했고, 바다 건너 그녀에게 닿고 싶었던 준고의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준고에게도 홍이에게도 그들을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와 같은 위기를 넘기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비극적인 결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얼마 후에 있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별을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화와 같은 행복한 결말을 꿈꾸곤 합니다.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이라고 해서 모든 소설이 다 신파로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작가의 상상력은 언제나 행복한 쪽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현실과는 크게 다르게 말입니다.


"홍이와 헤어진 후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친구들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홍이와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 갔다."  (p.237 '츠지 히토나리 편')


한낮 햇살이 계절을 희롱하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스푼의 가을을 떠먹고 그 황홀한 맛에 취한 터라 계절을 거슬러 여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에도 이리 설레는 걸 보면 나의 영혼에도 이미 가을이 도래한 듯합니다. 벚나무의 바짝 마른 이파리들이 도로에 흩날립니다. 주말을 맞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만 향하는데 가을을 굳이 '독서의 계절'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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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산
낸 셰퍼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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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유년 시절의 나를 떠올릴라치면 자연과 동떨어졌던 기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숫제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몇몇 가지가 있었지만 기억에서 모두 지워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현재의 내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 가을날 억새밭에 누워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짚으로 만든 김치광 안에서 느꼈던 안온한 풍경, 뽀얗게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어미닭과 함께 걸어 나오던 노란 병아리 떼 등 선명한 기억 속에는 언제나 사람보다는 먼저 그날의 풍광이 선연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뒤늦게 태어난 여동생 덕분에 막내 자리는 물려주게 되었지만)로 성장했던 나는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은 물론 전화도 없었던 까닭에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려야 했던 공중전화도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용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내가 조선시대에서 환생한 '별에서 온 그대'쯤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엄연히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혜택을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받았을 뿐 드라마에서나 나올 만한 그런 구시대적 인물은 아니라는 말씀 되시겠다. 나의 성장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인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을 읽는 동안 '나는 왜 여전히 산과 자연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 섬뜩한 특징은 그것이 지닌 힘이다. 나는 물의 반짝이는 광채가 좋다. 음악적인 소리,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 내 몸을 때리는 감촉도 좋다. 하지만 그 완력만큼은 두렵다. 자연의 힘을 두려워했기에 숭배했던 조상들처럼 나 역시 자연이 두렵다."  (p.52)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나는 매일 아침 산책 삼아 집 근처의 산을 오른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습관으로 인해 다른 조건이 엇비슷하다면 집 근처에 산이나 공원이 존재하는 것이 집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거닐며 잠시나마 도시 생활의 번잡함과 여러 고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골에서의 성장 배경을 지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골에서 도시로 퇴출된 나와 같은 도시 난민들에겐 인근의 야산이나 공원처럼 일시적으로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할지도 모른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이나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는 까닭도 그와 같은 배경 때문일 테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이제는 몸과 마음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할 차례다. 다양한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 귀로 말하자면, 산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침묵이 얼마나 드문 존재인지 깨닫는다. 항상 무언가가 움직인다. 공기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을 때도 물은 흐르게 마련이니까. 산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고원의 물줄기는 대부분 돌 아래를 지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사방이 너무 적막하게 느껴질 때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p.152)


<살아 있는 산>은 스코틀랜드 케언곰 산맥 지도를 시작으로 머리말을 지나 1장 '고원', 2장 '계곡', 3장 '산봉우리들', 4장 '물', 5장 '서리와 눈', 6장 '공기와 빛', 7장 '생명체:식물', 8장 '생명체:새와 동물과 곤충', 9장 '생명체:인간', 10장 '잠', 11장 '감각', 12장 '존재'로 구성되었으며 뒤에는 영국의 산악인이자 문학가인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이 실려 있다는 게 특이하다. 1년 내내 산을 찾는 산 애호가로서 낸 셰퍼드의 글은 케언곰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도시내기가 읽는다 할지라도 대리만족을 느낄 정도의 감각적인 묘사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산』이 현대에도 의미 있는 책인 것은 신체적 사고에 대한 셰퍼드의 믿음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점점 더 심하게 분리되어 살아간다. 우리의 마음이 물려받은 유전 특성과 습득하는 관념뿐만 아니라 공간, 질감, 소리, 냄새나 습관처럼 신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점점 더 잊혀간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접촉을 잃고 있으며 과거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몸과 단절되는 중이다."  (p.204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 중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듯하던 여름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자연을 만끽하고자 욕심을 부리는 일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각박하고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의 기억에서 먼저 그날의 풍광이 떠오르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 모른다. 힘겹게 건너온 시간이었지만 자연이라는 뒷배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의 영혼이 내 몸과 단절되는 것을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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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실 관계자의 전언을 기사화한 내용이었는데 말인 즉, 대통령이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전투 식량을 직접 인터넷에서 구매해 먹어보았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 군의 전투식량과 비교해 보고, 개선점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고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런 잡무를 처리하는 데 굳이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나서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토록 한가한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업무는 국방부의 하급 관리가 처리하고도 남을 일이며, 개선점을 보고 받고 최종 결정을 하는 단계에서도 국방부의 중간 관리급에서 전결 처리할 일이지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보고할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물며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업무가 전가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휴가기간에 정 할 일이 없어서, 혹은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심해서 한다면 모를까 그런 일을 대통령이 한다는 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과 의무는 과도한 측면이 있는데 그와 같은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말이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매일 밀려드는 산적한 국정 현안을 대통령 일인이 감당하기에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텐데. 사정이 이러한 까닭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많지 않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숫제 손을 놓아버리거나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공부하고, 토론하며, 국정 운영에 매진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전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국정 현안에 손을 놓는다고 해도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 신분인 자신이 그저 잠이나 자고 좋은 술과 음식만 탐하기에는 국민들 보기에 민망한 노릇이니 뭔가 하고 있다는 태는 내야 하겠고... 그래서 찾은 일이 전투식량이 아니었을까.


대통령 부부가 체코 순방을 마치고 오늘 귀국했다. 체코의 원전 수주를 목표로 방문했다고는 하지만 당사국인 체코 언론은 그렇게 보지 않는 듯했다. 2024년 9월 21일자 체코 일간지 블레스크는 김 여사에 대해 과거 세금 회피, 표절, 학력 위조 등 다양한 혐의를 제기하며,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한국 대통령 옆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 부부에게 엿을 먹인 기사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 현안에 손을 놓은 바지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거기까지인 셈이다.


오늘은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 절기인 추분. '추분이 지나면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는데 과연 그럴지 지켜볼 일이다. 때 아닌 가을장마로 전국이 난리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낮 무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실내에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던 게 과연 얼마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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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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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는 거짓말처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밤새 비가 내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더위도 빗줄기에 한풀 씻겨 내려간 듯했다. 돌이켜보면 지독한 여름이었다. 직장인의 삶이라는 게 늦가을 해거름녘의 느린 산책처럼 여유롭고 한가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여름의 나는 입에서 단내가 물큰물큰 날 만큼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고 썼던 박성원의 소설집 <하루>를 읽는 내내 길었던 추석 연휴가 흘러갔고, 하루가 천 년 같았던 연휴 뒤끝의 근무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주말.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맥락도 없이 뒤섞였다.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게 진짜 세상이라기보다 누군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은 슬며시 구부러지고, 건물들은 마주 보거나 아니면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바깥은 여름이고, 나는 마흔이다. 알고 있다. 바보 같은 나이다."  (p.43 '볼링의 힘' 중에서)


어제부터 내린 비로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계속해서 물동그라미를 그린다. 선명하게 퍼지던 물동그라미의 파문이 이내 사라지고, 새로운 빗줄기에 의해 다시 또 생겨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 어디서 날아왔는지 마른 낙엽 한 장이 종이배처럼 떠 있다. 그 위로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이 이어졌고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렸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데 더위를 겨우 씻어낸 올해의 가을비는 한여름 장마처럼 끝이 길다.


"여자는 차창에 얼굴을 꼭 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허브냄새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악기 같다고 생각했다."  (p124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하루'를 비롯하여 '볼링의 힘', '얼룩',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저녁의 아침', '흔적' 등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의 단편을 이끄는 중심인물들은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하나 비슷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 모호하거나 알 수 없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녀 혹은 그 남자이거나 남편이나 아내, 때로는 여자나 남자 혹은 주인으로 명명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는 소설의 얼개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한 개인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무수히 많은 까닭에 그들의 이름조차 혼란스러운 것처럼. 그럼에도 소설은 무리 없이 읽힌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은 죽음과 금뿐이구나. 죽은 그것들은 이제 콧구멍도 없고 숨을 쉬는 허파도 없으며 되새김질할 수 있는 위장도 없다. 지금에 와선 그것이 부럽다. 죽음의 가장 큰 미덕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 점에선 내 삶이나 죽음이나 똑같구나."  (p.179 '저녁의 아침' 중에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강우량을 늘리고 있다. 사람들은 명절 연휴의 피로가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며 하염없는 시선을 이어갔다. 스러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 위로 속절없는 시간들이 지워지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가 꿈인 양 되살아났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스러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이 아련하고 끊이지 않는 빗소리가 익숙한 자장가처럼 잠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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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만 느껴지던 추석 연휴도 이제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휴일이라는 게 사실 그동안에 쌓인 피로를 씻고 재충전하고자 함이 일차적인 목표일 텐데 명절 연휴는 언제나 반대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쌓인 피로를 풀기는커녕 쌓인 피로에 새로운 피로를 더 얹어서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게다가 성장기에 있는 조카들이나 연로하신 어른들을 뵙고 나면 나 역시 잊고 지내던 세월의 흐름을 불현듯 느끼게 되어 정신적인 피로감도 만만치 않게 작용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자본주의라는 게 본디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의 서열을 매기는 까닭에 철이 들면 들수록 진실로부터 멀어지도록 부추기지 않던가. 자신의 처지나 속마음을 숨긴 채 몇 날 며칠을 부대끼며 연기를 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말이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누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듯 기진하여 영 맥을 못 추게 되고 만다.


연휴 기간 동안 나는 군에 입대한 아들을 면회하여 특별 외출로 잠시 집에 데리고 왔다가 다시 데려다주었고, 짬을 내어 처가 식구들과 '매드포갈릭'에서 외식을 했다. 자영업이 위기라는데 식당을 찾은 방문객들이 어찌나 많던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여념이 없고, 나는 그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잠시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들어가는 저 배추밭처럼 사람들 역시 시간 속으로 제 몸의 수분을 끝없이 밀어 넣다 보면 언젠가 거울 속에서 주름이 깊게 팬 푸석푸석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 메말라가는 것이다.


길었던 연휴 기간 동안 읽고 싶은 책은 많았지만 게으름과 이런저런 약속에 발목 잡혔던 나는 이 책 저 책 기웃대기만 했을 뿐 어느 것 하나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박성원이라는 소설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작가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던 것일까. 바보처럼 말이다. 그의 단편소설 <하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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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24-09-18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새롭게 알아갑니다. 소설가 박성원!

꼼쥐 2024-09-21 14:43   좋아요 1 | URL
제가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소설가라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그의 또다른 소설집 ‘나를 훔쳐라‘를 대출했습니다.